94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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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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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2)
2023.06.06.
그녀가 2황자 그레이언에게 접근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황자 오를에게는 황후라는 강력한 뒷배가 있었다. 황후의 친정 가문은 부와 인맥을 동시에 틀어쥐고 있었고, 오를에게 지극히 헌신적이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어 그녀가 파고들 틈도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언은 달랐다.
그에게는 승전 지휘관이라는 명예와 로카르드 카이델이 있었으나, 그 나머지는 다 부족했다.
바로 거기에 그녀가 원하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오를에게도 틈이, 아니 기회의 문이 열린다면…….
욕망이 머리를 쳐듦과 동시에, 칼린은 덜컥 두려움을 느꼈다.
앙카르트가는 아직 고급 사교계에 출입하지 못한다. 이제는 최고의 양장점조차 못 간다.
그녀의 부가 오를에게도 가치를 지닌다 한들, 고고한 황후와 1황자가 과연 그녀를 멸시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지만 칼린이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살아온 것은 아마도 이 방에 발을 딛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끝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사이 오를은 칼린을 향해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기하군, 혹은 발칙하기 짝이 없군.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오를이 말했다.
“그 투자권을 모두 놓치면 참으로 안타깝겠군.”
와장창, 칼린은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고개를 드니 오를이 뱀과 같이 잔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칼린은 순간 사로잡혔던 망상에서 깨어났다.
오를 황자의 저의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녀가 2황자에게 접근한 걸 알고 경고하려 부른 것인가.
칼린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숨을 멈추었다.
그때 탁자에 놓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아직 남은 기회였다.
칼린은 두려운 듯 말했다.
“그러면 부친께서 상심이 몹시 크실 겁니다. 그 투자권을 위해 매일 밤까지 일하고 계시거든요.”
“내 것이라 믿은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지. 마치, 모래처럼.”
오를은 자신의 길고 흰 손가락 사이로 실제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걸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칼린은 침착하게 물었다.
“어찌하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을까요?”
“……나는 친우들을 보호해. 칼린. 나는 누가 나의 친우인지 아닌지, 모두 잘 기억하고 있어.”
오를은 미소를 머금은 채 검지 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칼린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어찌하면 전하의 친우가 될 수 있겠습니까?”
“황후 폐하 드십니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황후가 들어섰다.
세월을 의심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황후는 오를이 비킨 상석에 앉아 칼린을 응시했다.
“인사는 됐다. 칼린 앙카르트.”
그녀는 황후의 부드러운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칼린의 눈에 황후의 미모는 어지러울 정도였다.
오를이 칼린에게 앉으라고 해 주었다.
“…….”
황후는 내내 탁자에 놓여 있던 상자를 가져가 열었다. 그녀는 손에 든 적다이아몬드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오를도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이게 그 ‘붉은 눈물’이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붉어요.”
“그래. 붉지. 피처럼…….”
황후의 음성은 살짝 떨렸다.
칼린은 황후가 유명한 보석을 보고 감동하여 그런다고 믿었지만, 오를은 모후가 보석 따위에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시선에는 의아함이 감돌았다.
황후가 말했다.
“이게 한때 내 것이 될 뻔한 것을 아니?”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칼린이 그렇게 대답하려 할 때 황후가 먼저 물었다.
“이것을 해적에게 빼앗겼었다지?”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그러나 기적과 같이 되찾아 이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소중한 것은 잘 간수해야지. 잃어버리기 전에.”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파를 돌아 칼린의 뒤로 왔다.
그녀는 칼린의 목에 ‘붉은 눈물’을 걸어 주며 말했다.
“‘붉은 눈물’은 위대한 여자에게 어울리는 보석이란다.”
칼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위대한 여자. 황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오를이 훌륭한 황제가 되도록 돕고 있어. 절대 권력에는 여자들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거든.”
“……!”
황후는 칼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본 오를은 칼린에게 물었다.
“아까 내게 뭔가를 물었었지?”
칼린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목소리가 갈라져 짧게 답했다.
“예. 전하.”
“잘 생각해 보아. 칼린.”
“…….”
칼린이 ‘붉은 눈물’을 건 채 상자를 들고 나가자, 오를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그는 그녀의 주근깨와 공붓벌레 같은 얼굴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를은 칼린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계집애의 눈을 보셨습니까? 그리 욕심이 대단하다면 꾸미는 데나 더 애를 쓸 것이지.”
“계집의 외모를 품평하지 말거라, 오를. 사람은 다 제 쓸모가 있는 법이니.”
“저 애의 쓸모는 무엇입니까?”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는 저 목걸이를 돌려받고 싶어.”
* * *
나는 자루에서 꺼내진 다음 선 채로 기둥에 묶였다.
그곳은 창고 안이었다. 벽 쪽에는 상자와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고 곰팡내와 썩는 냄새가 났다.
천장 한 귀퉁이가 무너져 하늘이 보이는 것이 마치 십 년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곳 같았다.
나를 납치한 일당은 세 명이었다. 피부가 거친 중년 남자 하나는 내 앞에서 빵을 뜯고 있고, 나를 끌고 온 놈은 힘들었다는 듯 구석에서 쉬고 있었다.
빵을 뜯던 자가 ‘망 똑바로 봐!’ 하고 고함치자, 누군가 문밖에서 ‘잔소리는!’ 하고 대꾸했다.
‘대체 나를 왜 납치해서 뭐 하려고?’
떠오르는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저들의 허름한 차림새와 허리에 찬 특이한 단검을 보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저들은 뱃사람이었다.
‘해적이 틀림없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해적이 나를 납치할 이유란 하나뿐이었다.
로카르드 카이델!
이 납치극은 카이델 공자에 대한 복수의 일부가 틀림없었다. 그가 대부분 황궁에 머무니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출궁한 오늘을 노렸겠지.
미샤의 성년식이 내 장례식날이 되게 생겼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야, 그만 처누워 있어!”
빵을 먹던 자가 쉬고 있던 자에게 윽박질렀다. 그는 투덜거리며 일어나더니 품에서 플라스크를 꺼내 술을 홀짝거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저 계집애를 스마일란에 팔면 값을 잘 쳐서 받겠어. 어린 카이델 놈이 꽤 괜찮은 걸 끼고 다니는군.”
“이 미친 새끼야, 지금 계집 하나 값이 대수야? 놈이 우리에게 빼앗아 간 게 얼만데!”
“그래서 여기까지 왔잖아! 오늘에야말로 복수하는 거야.”
그들은 나를 향해 시커먼 이를 드러내고 끝도 없이 클클 웃었다. 빵을 먹던 놈은 송곳니가 빠져 있어서 보기에 더 끔찍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꼼지락거려 보았으나 내 상체를 칭칭 감은 밧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이델 공자에게 빚진 목숨을 이렇게 갚게 되다니…….’
빚을 졌으면 갚아야지, 싶은 생각과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아니지,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서로 싸웠다.
그때 나를 들쳐 메고 온 놈이 술을 홀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턱을 쳐들어 얼굴을 보려 했고, 나는 고개를 확 저어 그의 손길을 벗어났다.
그러자 그가 내 턱을 붙잡아 억지로 돌렸다.
“너 설마……. 어이, 갑판장, 이 계집애 눈에 익지 않아?”
나는 소름이 쫙 끼쳐 숨을 멈추었다.
이 해적들이 그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카이델 공자와 배에 타고 있는 날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들켰다가는 이 기둥에 묶인 채 목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갑판장이라 불린, 빵 먹던 놈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타가르 계집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어.”
“이 계집도 배에 타고 있었어!”
그러자 갑판장이 천천히 일어나 내 앞으로 왔다. 그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생각하기도 전에 대뜸 고함쳤다.
“이 우라질 것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죄 없는 사람을 납치해 놓고. 너희들 대가리 잘 챙겨, 언제 댕강 날아갈지 모르니까!”
거르지 않고 튀어나온 내 욕지거리에 두 해적이 서로 당혹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년, 타가르 귀족 아니었어?”
“이게 귀족년 말투겠어? 설마 그 카이델 놈이 우리가 올 줄 알고 미끼를…….”
“그건 오해야.”
“…….”
“…….”
“헙…….”
나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들이쉬고 말았다.
갑판장의 어깨 너머에 카이델 공자가 서 있었다. 검 끝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면서. 문지기를 해치운 것이다.
눈이 마주친 그는 너무 낯설었다. 늘 보이던 빙글거리는 미소, 여유로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갑판장은 몸을 획 돌리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빼며 카이델 공자에게 돌진했다.
“제 발로 무덤으로 걸어 들어오다니! 네놈이 우리 보물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네놈 살갗을 발라내서 알아낼 테다!”
이윽고 살벌하게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나는 아, 아, 소리만 겨우 냈다. 살기를 펄펄 뿜는 해적과 검을 맞부딪치면서, 그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나를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내가 어디 피라도 안 나는지 말이다.
‘그렇게 한눈팔다가 칼 맞아요!’
나는 열심히 고함을 지른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뿐이었다. 실제로는 그가 다칠까 봐 겁에 질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갑판장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날렸을 때, 카이델 공자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그를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가 손목을 짧게 돌려 검에 묻은 피를 털고 있을 때, 플라스크를 든 놈이 단검을 빼 들고 카이델 공자의 뒤로 다가섰다. 나와 멀지 않은 위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