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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걱정하는 사람이 나니까. (95/155)


28화. 걱정하는 사람이 나니까.
2023.06.05.


뭐랄까. 흐트러진 모습을 이 저택에서는 처음 본다고 해야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은 은채의 뇌를 잠깐 정지시켰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내뱉은 질문도 뒤늦게 생각해 보니 당혹감에 찌든 음성이었다.

“고양이 털.”

“…….”

“처리할 시간도 안 주길래.”

그 말을 하면서 권기주가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건성으로 내부를 훑어보는 느린 시선은 덤이었다.

은채는 제가 불러올리긴 했지만,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움직임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 남자가 제 눈총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다른 방에서 복도로 나온 도우미와 눈이 마주쳤다. 저 경호원이 여긴 왜 왔지, 하는 의아한 눈빛이었다. 은채는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보란 듯 문을 닫아 시선을 차단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왠지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은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 기척에 고개를 반쯤 돌려 보는 권기주와 시선이 부딪혔다. 왜 불렀느냐는 질문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날 속이지 않았어요.”

무슨 말이냐고 묻듯이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고양이 알러지가 있다는 말 같은 건 믿지도 않았거든요.”

시험하고 싶은 심정은 굴뚝 같았으나 차마 질병을 시험할 순 없었다. 권기주가 제 발로 와 주었으니 결국 시험에 빠트리게 된 셈이지만.

“억울해하진 마요. 난 당신이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거든.”

그 말을 들은 권기주의 눈가가 한층 붉어졌다. 우는 것도 아닌데 마치 우는 것처럼. 은채가 눈가를 찌푸리며 유심히 보았지만 역시 눈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새카만 동공이 위태롭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근데…… 이제 상관없어요.”

“…….”

“내가 기댈 곳이 권기주 씨뿐이거든요. 아직도 껍데기뿐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요.”

손을 내밀어 주는 이도, 추위에 떠는 몸에 옷을 덮어 주는 이도 권기주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그녀에게는 그것도 기꺼울 수밖에.

은채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지나쳐서 걸었다. 발바닥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발소리가 좀 큰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은채는 책상 위에 있던 선물 상자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오늘 잘 놀아 준 보답이에요.”

눈을 내리뜨고 선물 상자를 뚫어지게 보던 기주가 소리도 없이 웃었다. 만약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면 진동을 동반했을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그가 상자를 덥석 움켜쥐었다. 심상치 않은 악력에 은채는 무의식적으로 놓지 않으려 버텼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는 강탈하다시피 상자를 빼앗아 곧장 쓰레기통에다 던져 버렸다. 선물 상자는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 쓰레기통에 퍽, 하고 처박혔다.

은채의 전신으로 전율이 퍼졌다. 그녀는 모친이 병에 완전히 장악당한 후에도 송명환 회장을 끝없이 의심하고, 그 빌어먹을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을 옆에서 똑똑이 지켜보았다. 진저리가 날 만큼 싫었는데.

“뭘 줘야 할지 그렇게 보여 줬는데도.”

화라도 난 것처럼 가라앉은 권기주의 목소리에. 화염에 휩싸인 듯 뜨거우나 미동은 없는 차가운 눈에. 안도감을 느꼈다.

결국 그 피가 내 몸에도 흐르고 있다고, 은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딴 식으로 굴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던 그는 시선은 반대로 치켜떴다. 그 시선이 할퀴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뺨이 얼얼했다. 분명 물리적인 힘이 가해질 수 없는, 그저 시선일 뿐인데도 은채의 감각은 생생했다.

낯선 감각에 은채가 당황할 새도 없었다. 그가 긴 다리를 성큼 뻗어,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단단한 팔로는 사슬처럼 허리를 옭아매었다.

은채는 자신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남자의 양어깨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그의 셔츠를 뚫을 듯이 파고드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권기주의 품은 넓었고 기이하리만큼 뜨거웠다. 걸신들린 것처럼 그 품에서 머리카락을 비비던 은채의 숨이 일순 멎었다.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탓이다. 동시에 강한 힘에 등허리를 짓눌리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권기주의 품에 갇혔다.

숨이 막혔다.

빈틈없이 맞붙은 채로 가까스로 그의 가슴께를 두드렸다. 놔달라고.

기주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상태로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그에게 밀쳐졌다. 은채는 황급하게 올려다보려고 했으나, 그가 몸을 돌려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창하게 한 것도 없는데 가쁜 호흡을 연신 고르면서 은채는 그를 바라보았다. 권기주는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는 나가버렸다.

그런 뒤에 문이 쾅, 닫혔다.

은채는 혼란과 무안함에 뺨이 뜨거웠다.

* * *

아침부터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바싹 마른 잔디를 향해 물을 뿜고 있었다.

쭈그려 앉아 물끄러미 보던 은채는 물줄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물이 손을 흥건하게 적시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이랄 게 드러나지 않아 얼핏 나사가 두어 개쯤 빠진 듯 보였다. 우편 배달부에게서 우편물을 받아 돌아서던 함안댁은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왜 그러고 있어요. 감기 걸려.”

그 소리에 은채는 힐긋 돌아보는가 싶더니 장난스럽게 웃고는 다시 또 고개를 돌렸다. 함안댁은 그녀가 앉은 방향 쪽으로 있는 경호 팀 숙소 건물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겉이랑 속이 달라 보이지도 않고 사람 괜찮지.”

“…….”

“근데 너무 붙어 다니진 말아요. 결혼 앞두고 이상한 소문날라.”

“…….”

“회장님 귀에 들어갔다가는 젊디젊은 청년 앞길 막혀요.”

몇 마디 더 덧붙이려고 입을 달싹이던 함안댁은 이내 입을 닫았다.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를 얼굴로 있던 은채는 그제야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나만 결혼 앞둔 거 아닌데.”

어차피 불장난일 뿐인데. 그 상대가 권기주면 뭐 어때서.

은채는 젖은 손을 털고 일어섰다. 사방으로 물을 뿜은 스프링클러 사이로 희미한 무지개가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은채가 눈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데, 기척이 들렸다.

이윽고 유려하게 솟은 무지개 위로 권기주가 다가와 섰다. 햇살을 등진 얼굴은 음영이 드리워져 감정이 읽어지지 않았다.

은채는 머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손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추워서 손을 오므리고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제 기분 상한 거 같았는데. 태연한 얼굴로 나타난 남자를 마주하니 멋쩍고 무안했다.

“기분 상한 거 아니었어요?”

질문을 해 놓고, 혹여나 그렇다는 대답이라도 돌아올까 봐 은채는 곧장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하면 관둬요.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까.”

은채는 자신의 허세를 속으로 비웃었지만, 그는 도리어 간단하게 일축했다.

“안 그만둘 건데.”

“…….”

“내가 그만큼 송은채 씨 원한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은채는 제 마음이 지조도 없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찌르면 찔리고, 쑤시면 쑤셔질 테니까…….”

자존심이 없는 권기주가 마음에 들었다.

“결혼은, 좀 미루면 안 될까.”

은채는 별안간 얼굴을 굳혔다.

“누차 말했는데 싫으면…….”

말하는 중에 권기주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바람에 집중력을 잃고 은채가 말끝을 흐리는데, 그가 서슴없이 이마로 손을 뻗어 왔다.

아.

이마에 그의 손등이 닿자 은채는 외마디를 내뱉었다. 좀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가 말했다.

“열 있네.”

기주는 손을 거두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 연습은 가지 마요.”

은채는 그때서야 몸이 뜨거운 이유를 알았다. 그는 눈만 끔뻑거리는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이 보았다.

“병원 갈 생각은 없을 거고.”

“…….”

“고열은 아니니까 방에서 좀 쉬어요.”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그쯤 되자 기주는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는 듯이 굽어보았다.

결국 은채는 등 떠밀리듯이 집으로 들어가, 곧장 자신의 방으로 와야만 했다. 어차피 잠옷 바람으로 잠깐 밖에 나간 거였으니 손만 대강 씻은 후에 침대로 들어갔다. 그 찰나에 신경이 예민해졌었는지 피로감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의식이 저편으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나, 하고 눈을 비볐다. 그런 다음 둔중한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시야에 권기주가 들어왔다. 손에는 체온계와 해열제로 추정되는 약, 그리고 물을 들고 있었다.

“약 먹어야지.”

“…….”

“아침밥 먹었다면서요.”

은채는 설핏 눈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왜 권기주 씨가 내 방을 들락거려요. 감기 가지고.”

“걱정하는 사람이 나니까.”

“내 방에 자주 오면 의심받을 텐데. 안 무서워요?”

“스릴 있는데 왜.”

은채는 권기주다운 무모함이다 싶어 무심결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역시 들키지 않아야 하는 건 슬프네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에서는 당연히 슬픔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술 더 떠서, 권기주가 그녀의 손을 그러쥐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문질렀다.

“자고 일어나면 죽 먹어요. 해 놓으라고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권기주가 일어섰다. 은채는 뻣뻣하게 누운 채로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눈은 습관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권기주가 열고 나간 문이 이윽고 탁, 하고 닫혔다.

그 순간 은채는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내친김에 그가 놓고 간 해열제까지 입안에 털어 넣고 누웠다. 약 기운 덕에 뒤척거리지 않고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수면에 취해 있었을까.

그나마 권기주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결에 뇌리를 스친 것도 같았다.

* * *

권태로운 오후였다.

이광일이 별안간 경호팀 숙소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가 거실에 마련된 컴퓨터 책상에 두 다리를 뻗고 앉은 기주를 곁눈질하며 소파로 가서 앉았다.

분명 기척을 느꼈을 텐데 의자 헤드에 기댄 권기주의 머리는 미동도 없었다. 광일은 한 손을 들어 마른 얼굴을 짜증스럽게 박박 쓸어내렸다.

“노친네가 접대를 끊으면 개도 똥을 끊지.”

광일은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소파에 몸을 늘어뜨렸다.

송명환의 충직한 경호원이 된 지도 햇수로 벌써 삼 년째다.

이쯤 되니 놈을 잡기 위해 잠입한 요원이라는 정체성보다 위조한 신분이 더 친근해질 지경이었다. 사회악의 옆에서 극진히 보필하며 먹고사는 기생충이 된 것만 같은 찝찝함에 기분은 날로 더러워지고.

“제주도로 라운딩 가신단다.”

나쁜 놈이 더 잘만 먹고 잘사는 세상이라니. 신이 존재하긴 하나. 의미 없는 생각을 흘려보내던 광일은 저절로 비웃음을 지었다.

“노친네가 의원님 의원님 하면서 아양 떠는 꼴 보는데 토할 뻔했다, 야.”

“…….”

“준비해라. 한씨 일가 리조트 방문 일정 때문에 송은채도 동행할 거거든. 특종 하나 잡으려고 혈안인 기자들이 순진한 애 꼬여서 허튼짓 못 하게.”

광일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데도 반응이 없는 기주를 흘깃 보았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탓인지는 몰라도 셔츠 소매를 접은 덕에 드러난 팔이 유독 단단해 보였다.

범접할 수 없이 긴 다리를 책상에 걸친 탓에 바짓단이 슬쩍 올라가 있었다. 그 바람에 드러난 복사뼈는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 놓은 듯 근사했다.

남자고 여자고 다 홀릴 외양이긴 한데, 그래선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정 붙이긴 어려운 놈이었다.

짜증이나 서운함, 억울함 같은 일상적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도 않아 진짜 조각인가 싶을 정도이니 말은 다 했지.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데. 뭘 그렇게 보고 있냐?”

그 질문을 하기 위해 그리도 긴 서두를 뗀 것이었다. 광일은 CCTV의 여러 화면 중 온실을 담고 있는 화면을 노려보았다. 혹시 송은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경호의 기본은 적정 거리 유지다.”

“…….”

“벌써 말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송은채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돌려 말하면 알아들을 놈이 아니니 결국 대놓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광일은 목덜미가 선득했다. 징그럽게도 직선적인 권기주의 시선을 받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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