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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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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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1)
2023.06.05.
“일어나.”
“응?”
“일어나라고. 황궁에서 언제까지 춤도 못 추는 채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아버지까지 욕보이는 일이야.”
“으응…….”
나는 얼떨결에 일어났고, 미샤는 내 앞에 서더니 춤의 기본자세를 취했다.
미샤는 익숙하지 않은 남자 스텝을 밟느라 고생하면서도 나를 붙잡고 기본 스텝을 가르쳐 주었다.
두 시간 넘게 그렇게 끙끙거린 다음, 그녀는 내게 댄스 교본을 내밀었다.
“미샤?”
“기본자세 취하고 여기 그려진 스텝대로 연습해. 일단 다 외워. 너 외우는 거 잘하잖아.”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미샤는 짜증을 냈다.
“다음 주에 내 성년식 파티가 열릴 거야. 학기 중에는 공부해야 하니까 방학 때 당겨서 열려고. 그땐 어설프게라도 춤을 춰야겠지, 로리샤?”
나는 아차 싶어 말했다.
“미샤, 네 말대로 춤에 능숙해지기 전에 파티에 가면 무슨 망신이겠어? 게다가 내가 가면 백작 부인이 얼마나 불편해하실지 알잖아.”
“카이델 공자님은 너랑 오신다던데?”
“……뭐?”
“기꺼이 오신다더라. 그분이 오시면 내 성년식은 대성공이 될 거야. 거기다 네가 카이델 공자님을 맡아 주면 훨씬 더 많은 영식이 자신감을 가지고 내게 꽃을 바칠 거야. 사교계에서 성년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나는 뒤통수가 얼얼했다.
“너, 나를 이용하는 거야?”
“내 성년식 선물이라고 생각해. 너는 여기서 네가 잘하는 걸 해. 나는 내가 잘하는 것 할래. 멋진 파티를 열고, 손님들에게 내 바이올린 연주도 선보일 거야.”
나는 미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샤가 활짝 웃었다.
“칼린에게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어. 그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니까!”
미샤는 즐거운 얼굴로 돌아갔고, 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지금 느끼는 얼얼함과 피로가 미샤로 인한 것인지 춤 연습 때문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엄마, 내가 괴물을 만들어 냈나 봐.”
* * *
“춤을 책으로 배우다니.”
나는 이 상황을 한없이 한심해하면서도 종이에 그려진 발자국 그림을 따라 스텝을 옮기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시녀로서 앞으로도 파티에 참석해야 하니 춤을 배워 두는 것이 옳았지만,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미샤의 뻔뻔함은 여전히 사람을 질리게 했다. 자기는 내 성년 생일을 그렇게 망쳤으면서, 제 성년식 선물로 나더러 카이델 공자를 맡으라니.
사실, 내 성년 생일이 그렇게 엉망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날 컴컴한 정원에서, 투덜거리며 내게 꽃을 꺾어 바치던 카이델 공자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웃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미샤의 성년식 날이 다가왔을 땐 기본 스텝은 그럭저럭 밟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남자와 춤을 추는 광경을 상상하면, 내가 짓밟아 망가뜨릴 남자의 구둣값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으로만 이어졌다.
“하지만 별수 없잖아.”
나는 어차피 구석에만 앉아 있을 생각이었으므로, 최대한 단조로운 드레스로 챙겨 입고 황궁 문을 나섰다.
거기에는 황궁에서 제공한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는 마차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뭐 해요?”
먼저 타고 있던 카이델 공자는 내 팔을 획 잡아당겨 자기 옆자리에 앉히더니 마차 문을 닫았다.
나는 헉 소리를 내며 재빨리 그의 맞은편 자리로 옮겨 앉았다.
“고, 공자님이 왜 여기 계세요?”
“당신도 미샤 로아르 양의 성년식에 참석하러 가는 게 아닙니까? 행선지가 같은데 마차를 굳이 두 대 빌릴 것 뭐 있어요. 당신이 궁내부에 마차를 신청했다길래, 미리 타고 기다렸습니다.”
“그…….”
그가 빙긋 웃었다.
“우린 이미 당신 집안에서도 인정받고 있나 봐요. 로리샤 양.”
“하아…….”
나는 긴 한숨을 쉬며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를 이용해 먹기만 하고. 나는 카이델 공자도 미샤도 다 싫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미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미샤가 싫었지만, 그 손을 쳐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오늘 미샤의 성년식에 참석해야 했고, 오늘 밤 이 잘나고 재수 없는 인간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걸로 마지막이다. 어차피 같은 마차로 돌아와야 하니, 그때 이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면 내일부터 사교계에는 새로운 소문이 퍼질 거다.
로아르가의 사생아가 카이델 공자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그래서 그가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내가 침묵하는 동안,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생경한 존재인 듯 집중해 오는 고요한 시선이 어색하고 간지럽고 불편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창 쪽으로 몸을 옮겼다.
둘이 있는데 뭐 하러 연기를 계속하는지.
그는 나를 자기 쪽으로 확 돌려 앉히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심술궂게 말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께 보고는 잘 마치셨습니까?”
“네. 저는 충성스러운 시녀거든요. 절대 걱정 안 하시게 잘 말씀드렸어요.”
“말해 봐요. 황녀 전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궁금해 죽겠어요?”
그는 휘휘 저어서 흐트러트리고 싶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궁금해 죽겠어요.”
“카이델 공자님이나 되니까 그런 무례한 일에도 불러내서 타이르는 걸로 끝낸 거래요. 공자님이 보석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게 당연하고요. ……이건 아닌가?”
나는 그와 진지하게 대화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떠오르는 대로 대충 말했다.
물론 황녀 전하가 내게 한 협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알면 신이 나 할 테니까.
카이델 공자는 내 말이 이상한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미소를 지었다.
저 승리자의 미소, 때려 주고 싶다.
“잠깐 들러서 가요.”
“어딜요?”
“성년식이니 꽃을 사야죠.”
나는 이렇게 말할 뻔했다.
‘백작저 정원에서 꺾으면 되죠, 돈 아깝게.’
하지만 어쩐지 그러기 싫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미샤에게도 직접 꺾어 다듬은 꽃을 선물하는 게 싫었다. 그러면 내 성년식 생일의 소중한 기억이 훼손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놀랐다.
미쳤나 봐.
그사이 마차는 황궁 거리를 지나 상가 구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내가 말이 없어서 그러는지, 카이델 공자가 흘끔 내 눈치를 보았다.
“첫 번째로 나오는 꽃집에서 살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네. 공자님.”
나는 예의 바르게 대답한 다음 얌전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첫 번째 꽃집 앞에서 마차가 멈추자, 카이델 공자가 길가에서 내렸다.
마차 안에서는 가게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성년식 꽃을 찾는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점원은 귀족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려고 그러는지, 반색하며 가장 좋은 꽃은 안에 있으니 들어와 보시라고 청했다.
‘내가 따라갈 걸 그랬나?’
그런데 그때 마차 문이 벌컥 열리고, 괴한이 나타나 내 몸에 자루를 씌웠다.
* * *
칼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황궁 복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믿지 못해서였다.
오늘 그녀는 미샤 로아르가 제 성년식에 자신만 초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카이델 공자를 포함하여 아카데미 생도 모두가 초대받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1황자 오를이 보낸 마차가 앙카르트 저택에 도착했을 땐, 칼린은 태어나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갈망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2황자 그레이언에게 하는 구애와 1황자 오를에게 받는 구애.
두 황자를 그녀의 양손에 올려 두고 비교하는 기분은, 숨결이 흐트러질 정도로 짜릿했다.
그녀 앞에 고풍스러운 문이 열렸을 때, 칼린은 어릴 적부터 피나는 노력으로 완성한 우아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서, 그녀는 단정한 은발의 남자에게 예를 올렸다.
“칼린 앙카르트가 타가르의 위대한 작은 태양 오를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칼린.”
오를은 나직이 부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앉아.”
칼린은 깊이 머리를 숙인 후 오를의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에는 상자를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아카데미에서 단연 우수한 인재라지? 바쁜 사람을 부른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오늘 바쁘지 않았다.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가 아니었으나, 오를 앞에서 2황자의 사람인 로카르드를 언급할 이유는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부친이 걱정하지 않던가? 내 특별히 경호를 붙인 마차를 보내기는 했는데.”
“황자 전하의 가호가 있는데 제 부친께서도 무엇을 걱정하시겠습니까.”
“차를 들어.”
그사이 하녀가 내어온 차가 향긋한 김을 뿜고 있었다.
칼린은 자신의 손이 떨릴까 싶어 찻잔을 들기 두려웠다. 하지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 순간을 돌파해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향이 좋습니다. 전하.”
“자작의 일은 잘되어 가나? 새 제철소의 투자권을 다 사들일 예정이라지?”
“제가 아직 영민하지 못해 부친의 일은 잘 모릅니다.”
칼린은 흠잡을 수 없이 답했으나, 오를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리고 칼린도 오를이 자기 말이 거짓임을 안다는 걸 알았다.
앙카르트 자작이 딸과 의논하지 않고는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었다.
칼린은 오를이 어째서 그 문제부터 꺼내는가 긴장했다.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설마.
오를 황자도 앙카르트가 장차 차지할 부를 욕심 내고 있다면…….
칼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