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황녀의 뜻밖의 이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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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황녀의 뜻밖의 이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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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황녀의 뜻밖의 이해심
2023.06.04.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면 밀리오라 전하는 즉시 그레이언 전하에게 항의하실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 밀리오라 전하께 좋을 게 없어요.”
“…….”
그의 말이 옳다는 게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 없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자신에게 기어오르는 여동생을 곱게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를 전하가 그레이언 전하와 밀리오라 전하의 갈등을 약점으로 이용하려 들지도 모르는데, 만약 그랬다간…….
“그냥……!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카이델 공자님이 장난기가 돌아서 그 반지를 제 화풀이용으로 사 준 거라고요. 제가 누명을 썼던 건 황녀 전하께서 더 잘 아시니까요.”
그는 선선히 수긍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깝군요. 그렇다면 산책은 다음으로 미루죠.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로리샤 양.”
시간을 내줘? 당신이 협박했잖아!
“으으으!”
그는 내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호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에스코트했다.
* * *
“하…….”
밀리오라 전하의 반응은 뜻밖에 간결했다.
나는 에트랑에서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녀에게 카이델 공자와의 일을 보고했다.
반지에 대해서는 특히 자세히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가진 선물이었는지 말이다.
‘카이델 공자님은 보석이 장난감 같은가 봐요!’
하지만 황녀 전하는 질문도 대꾸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숨을 쉬었다.
“이해해.”
“네?”
나는 순간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신 건지……?
“어떤 여자가 카이델 공자에게 안 반하겠어. 남자도 반하는걸. 너는 아마타전 출정식 못 봤지? 그의 휘하 부대가 그를 어떤 시선으로 우러러봤는지.”
“황…….”
“뭐, 아니라고 할래? 로카르드 카이델이 멋있지 않다고 말할 셈이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알았다니까. 이해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카르드 공자인데 어떡하겠어. 그게 부정한다고 부정이 되니? 똑똑한 애인 줄 알았더니.”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헛하게 말했다. 내게 불리한 말이었지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반지를 가져온 건 제가 아니고 공자님이세요.”
“화풀이용이었다며. 카이델가 정도의 부면 보석 반지로 공기놀이라도 하지 뭘.”
“…….”
“운 좋은 줄 알아. 로카르드 공자니까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불러내서 타이르는 정도로 끝내는 거야. 그런데 내 시녀가 춤도 못 추다니, 끔찍하기도 하지!”
불러내서 타이르다니.
나는 빙긋 웃던 카이델 공자의 음모가적인 얼굴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내가 지난번 메달 사건 때 너무 단호하게 해명한 거다.
황녀 전하가 이 상황을 그렇게 정리한 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귀족 놈들!
나는 황녀 전하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카이델 공자의 욕은 늘 하던 것이지만, 차마 당사자가 눈앞에 두고 속으로 ‘빌어먹을 황족’이라고 말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황녀 전하는 나의 그런 괴로움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티 파티 때 못 봤니?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해. 그리고 카이델가는 공명정대와 관용으로 이름 높지. 로카르드는 참 카이델이고. 문제는 너야.”
“……!”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복장이 터져서 죽을 뻔했다.
“너, 로카르드 공자에게 반해서 나를 배신했다간……. 그의 환심을 사려고 나를 배신했다간, 내가 널 어떻게 할지 알아?”
가지런한 은발의 앞머리 아래 보석 같은 눈동자가 가늘게 길어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로리샤. 난 너밖에 없어. 경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를 위해 매를 맞아 줄 애도, 오라버니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줄 애도 너뿐이란 말이야. 그런데 네가 남자 때문에 나를 저버린다면…….”
“전하, 저는…….”
그녀는 내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나는, 화를 낼 거야. 몹시.”
“저는 절대로 전하를…….”
“알아들었니? 네 눈에는 내가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나는 타가르야.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어.”
“우습게 보다니, 제가 어떻게…….”
“알아들었어?”
“네. 네! 전하!”
이만 나가려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데 그녀가 다시 불렀다.
“로리샤.”
“네, 전하!”
“뒤통수 조심해.”
“……네?”
“넌 이제 타가르 사교계 영애들의 공적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까르르 웃었다.
11. 오가는 마음들
나는 며칠째 후원에서 론드 경과 수다나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내가 수다를 떨고 론드 경은 주로 앉아만 있었지만, 아무튼.
그런데 미샤가 찾아왔다고 했다.
백작님은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연락하지 않으실 거고, 지금은 황궁 내에서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찾아온 이유는 카이델 공자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미샤는 내 방 소파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재빨리 훑었지만 내 물건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내 방을 죄다 헤집어서 물건을 흩트려 놓았을 애가 얌전히 기다린 것이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미샤? 무슨 일 있어?”
미샤는 쌩하게 대답했다.
“일이라면 네가 일이지. 지금 네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알아? 다들 나한테 묻지 못해서 난리란 말이야.”
“……!”
이 문제에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나였음에도, 미샤가 그렇게 말하니 말문이 막혔다.
지금 상황이면 미샤는 내가 자기에게서 카이델 공자를 빼앗았다고 할 텐데!
하지만 미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한심한 연극이 황자녀 간의 치열한 경연의 일부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시치미를 뗐다.
“소문이라니?”
“모르는 척할 필요 없어. 나는 카이델 공자님 잊었으니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요즘 얘가 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지!
“사생아 자매와 남자를 두고 경쟁하다니. 내가 자존심 상해서, 정말!”
아아, 그런 이유였니?
나는 잠깐이나마 미샤에게 미안함을 느꼈던 자신에게 미안해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동시에 미샤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미샤는 여전히 나를 싫어했지만, 전처럼 진저리 치는 듯한 원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오랜 악감정의 관성이 남아 상대에게 친절해질 수 없을 뿐, 그럭저럭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 같았다.
‘잠깐만, 쟤가 방금 뭐랬지? ……자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약간 어지럽고, 가슴속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그 정체가 뭐든 지금 내가 소화하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감정이었다.
하지만 미샤 앞에서 속을 드러내면 지는 것 같아서, 나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미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다들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냐 하면, 공자님이 너한테 청혼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야. 네가 무슨 괴상한 주술을 써서 공자님을 조종한다던데?”
나는 침음을 흘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미샤, 나는 카이델 공자님과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우리는 엄격하게 공적인 관계야.”
“카이델가의 공자님이 엄격하게 공적인 일로 네 방 발코니를 넘어 다니셨다고?”
“헉!”
“헨리에타가 봤대.”
“…….”
나는 말문이 턱 막혀 미샤의 눈치를 보았다. 미샤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나를 흘겨보았다.
“나 눈 부은 것 보이니? 나쁜 계집애. 아주 머리털을 다 뽑아 놨으면 좋겠어!”
“미, 미샤. 기분은 알겠는데 그런 말은 좀…….”
“그런 말이 어때서? 나는 밤새도록 울었단 말이야.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분에게 그렇게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다니! 아아, 내 젊음은 왜 이런 거지?”
미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저기, 미샤. 그 편지를 누가 썼다고?’
내가 그 편지 때문에 어떤 고초를 겪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 당장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미샤, 그런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절대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야!”
“설마 내가 카이델 공작가의 명예를 더럽힐 일을 하겠니? 헨리에타는 단단히 입막음했어. 엄마도 모르셔. 만약 아셨다간…….”
미샤는 백작 부인을 생각하며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가 발끈했다.
“아무튼, 너는 나를 뭐로 보는 거야?”
“고, 고마워.”
“한참 울고 나니까 나 혼자 착각하고 있었단 걸 알겠더라. 아카데미에서 그분에게 구애하는 여자 생도가 한둘이었는 줄 알아? 그런데 그분은 늘 철벽을 치셨어. 사실은 나한테도 가능성이 없었던 거야.”
“으응…….”
“하지만 그런 공자님도 너처럼 만만한 애한테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으셨겠지.”
“으, 응?”
“사생아지, 행동거지는 또……. 네가 솔직히 여자니? 카이델 공자님이 네가 욕지거리하는 걸 한 번만 보신다면, 아휴.”
내 욕을 일단은 취향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하긴 했는데…….
“카이델 공자님은 너를 여자로 안 보시는 거야.”
언제는 나더러 잘났다더니!
나는 미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으음…….”
미샤는 울적하게 말했다.
“칼린 앙카르트에게 약점을 잡힌 것도 내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탓이었어. 모든 일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만 할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앞으로 그런 짓은 안 하려고.”
카이델 공자에게 보낸 연서를 제가 썼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그 계획은 출발부터 삐걱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미샤가 깨달음을 얻은 부분은 축하할 만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너한테 이해해 달라는 것 아니야. 네가 날 뭘 알아?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