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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당신의 거절을 딛고 일어날게요 (92/155)


91화. 당신의 거절을 딛고 일어날게요
2023.06.03.


“황녀 전하는 이제 저를 퍽 좋아하세요. 지난번에 양장점에서 공자님을 만난 것도 이미 말씀드렸고, 오늘 약속도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아마 계획대로 되지 않으실 거예요.”

“로리샤 양.”

“…….”

“나는 져 본 적이 없어요. 말했잖아요. 당신은 이 바람둥이 로카르드 카이델의 첫 번째 연인이 될 겁니다.”

“……정말로 처음이었어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내가 놀라는 게 자존심이 상한 듯, 카이델 공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네 살 때부터 검을 잡았어요. 머리가 크자마자 최연소 기사가 되었고, 동시에 아카데미 조기 졸업 준비를 했고, 그걸 마무리할 무렵 툰바르 산맥으로 갔죠.”

“조기 입학이 아니라 졸업이요?”

“공부를 하다 보니 할 만하더군요.”

너무 잘난 놈이 잘났다고 말하니까 타박할 말도 안 떠올랐다.

“그래서 이것만 마무리 지으면 결혼 상대자를 찾아야지, 하다 보니 지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연애도 마치 일하듯이 생각하셨나 봐요?”

나는 그렇게 물어 놓고 스스로 실수라고 생각했다.

귀족들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태어나자마자 가문 간에 혼약을 맺어 두고, 결혼은 거래에 가깝다. 그들은 가문을 위해 나고 죽는 사람들이니까.

그는 이번에도 그리 숨기려 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일이라기보다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알았다면 진작 시간을 낼걸.”

이 남자는 속을 좀 숨겼으면 좋겠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사셨어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첫 번째 사자님의 아들이라면 별 노력하지 않아도 그 명예와 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텐데.

그의 손자까지 ‘우리 할아버지가 첫 번째 사자이셨다’로 평생 뻐기고 살 수 있을 정도인데 말이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카이델이니까요.”

언젠가 그에게 느껴졌던 아득한 거리감이 다시 찾아와,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고작 나 자신의 노후를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데, 그는 제국의 힘 자체라고 부를 만한 가문을 책임지기에 합당한 자가 되려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있었다.

기분 나빴지만, 나는 그레이언 전하가 그를 아끼며 곁에 두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는 게 당연한 일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 사이 테이블 세팅이 끝났다.

나는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바닷가재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 인간, 바다에 원한이 있나?’

내가 바닷가재 껍데기를 깨려 작은 망치를 쥐려는데 그가 얼른 가져갔다.

나는 뚱하게 말했다.

“안 때려요.”

그러자 그가 푸우, 숨을 뿜듯 웃었다. 그걸로 자기를 때릴 거라는 생각까지는 못 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내 접시도 가져가더니 바닷가재 살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괜찮…….”

정말 괜찮은데.

하지만 이미 말리기는 늦은 후였고, 나는 그의 손놀림을 바라보다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기사란 무지막지한 힘으로 적을 때려죽이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그의 손놀림은 정말 섬세했다.

그러다 그가 아마타족을 저렇게 섬세한 칼부림으로 죽였다면 하고 떠올리자 몸서리가 쳐졌다.

“로리샤 양, 괜찮아요?”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왜, 왜 갑자기 로리샤예요?”

“그럼요?”

“로아르. 로아르요.”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자기 확신이 생기셨군요. 로아르 양.”

“…….”

이 자식이 갑자기 사람 심장을 때린다. 마치 백작님과 나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가 이미 오래전에 백작님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이 로아르와 로바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으니 고정된 호칭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분 나쁘게.

하지만 그 말이 옳았다.

지금까지 나는 내게 붙은 로아르라는 성을 지나치게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꼈다.

그렇다고 로바라고 주장할 용기도 없었다. 그 성을 쓰면 너무 외로워질까 두려워서.

그런데 이제는 로아르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대로 견딜 만했다. 나 자신을 로아르라고 부르고, 백작님을 아버지라고 떠올리는 일도 예전만큼 힘들지 않았다.

카이델 공자는 빙긋 웃더니 한 무더기의 바닷가재 살을 내 접시로 옮겨 놓아 주었다.

“이 소스는 에트랑 특제예요. 꼭 맛보세요. 로리샤 양.”

“지금 제 요청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나는 그를 새침하게 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눈을 휘어 접어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금 주변 테이블이 다 우리를 집중하고 있어요. 당신을 로리샤 양이라고 불러야 친근해 보이죠.”

‘그냥 날 죽여라.’

나는 한숨을 푹 쉬며 포크로 바닷가재 살을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어머……!”

“훗.”

나는 태어나 평생 편견의 학대를 당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런 나조차도 편견을 품고 살았다니.

이 빌어먹을 귀족 놈들은 한가해서 여기서 빈둥거리는 게 아니었다. 이 에트랑 특제 소스가 맛있어서 몰려오는 것이었다!

카이델 공자는 맛의 충격으로 속절없이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보며 뻐기는 듯한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바닷가재를 박살 냈다.

이미 맛에 홀린 나는 우리 주변 테이블의 따가운 시선과 시간마저 잊었다.

내가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건 배가 불러 허리끈을 살짝 풀어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너무 넋 놓고 먹었나 후회가 들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맛없는 척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공자님, 최고였어요.”

“제가 좀 그래요.”

“아니요, 음식이요.”

“제가 시켰죠.”

“네, 네. 공자님이 최고예요.”

“천만에요.”

카이델 공자는 잔뜩 뻐기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오늘의 패배를 맵고 쓰라리게 여겨야 했지만, 배가 부르니 마음이 느긋해져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도 내 감사를 듣고 퍽 만족하는 눈치라 우리 사이의 분위기는 본의 아니게 부드러워졌다.

접시가 치워지고 후식이 나왔을 때, 그가 품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선물이에요.”

“……?”

반지라니. 내가 아는 반지와 그가 아는 반지가 같은 것이 맞는지.

나는 저 상자에 손끝도 대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했지만, 속으로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목적은 황녀 전하의 나에 대한 신뢰를 깨는 거지, 나와 결혼하는 것이 아닐 텐데?

하지만 그의 그 모자란 선생, 검술 교관이 떠오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카이델 공자는 반지 상자를 노려보는 나를 바라보다가, 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그것을 자기가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에메랄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공…… 자님?”

“라일리 경매에서 구매했어요. 당신이 훔쳤다는 누명을 썼던 황녀 전하의 에메랄드 반지 맞죠?”

이 반지 때문에 얼마나 매질을 당했던가. 나는 맑은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반지를 보며 뚱하게 말했다.

“지금 제 피맺힌 기억을 선물로 주신다고요?”

“경매장에서 이걸 보고 당신에게 돌려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깨부수든 길에 버리든, 속이 시원해지게 마음대로 해요.”

“이렇게 비싼 걸로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 저는 받을 수 없어요.”

“살펴보기라도 해요. 껴 본 적은 있어요?”

“아니요. 거의 상자째로 경매사에 넘기다시피 해서…….”

그때는 억울해서 내가 훔쳤다는 반지가 내 손가락에 맞는 것이기나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무심히 반지를 꺼내 끼워 보니 마치 내 것처럼 꼭 맞았다.

거참…….

시녀장에게 매질을 당하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휴.

나는 뚱한 얼굴로 손등을 한 번 본 다음 반지를 함에 넣어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그러자 주변 사방에서 ‘어머’, ‘헉’, ‘세상에!’ 따위의 작은 비명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

사방을 둘러보니 티 파티 영애 일행을 비롯해 많은 여자들이 경악한 얼굴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치 너는 사람도 아니라는 눈빛들.

내 손에 잘린 사람 머리라도 들려 있나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뭐, 또, 왜?

고개를 획 돌려 카이델 공자를 쏘아보니 그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불길함이 확 끼쳐 왔다.

이윽고 그가 눈짓으로 반지를 가리켰다.

“악!”

나는 쿵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말했다.

“지, 지금 사람들이 공자님이 제게 청혼한 걸로 오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걸……!”

“이런. 그렇군요.”

그의 대꾸는 너무 성의 없어서, 욕도 안 나올 정도였다.

“공자님, 대체……!”

그는 여전히 건성건성 대답했다.

“마음의 상심이 크긴 하지만 저는 타가르의 전쟁 영웅입니다.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아요. 오늘 당신의 거절이 준 상처를 딛고 계속 들이댈 테니 그리 알아요. 나의 로리샤 양.”

“하…….”

나는 빠진 턱으로 영혼까지 빠져나갈까 두려웠지만 손을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차를 내오던 점원이 카이델 공자에게 내가 괜찮은지 눈짓을 보낼 정도였다.

나는 점원이 돌아간 후 겨우 말했다.

“이게 정말 재미있으세요?”

“로리샤 양, 이건 지금까지 제가 배우고 해 온 어떤 싸움과도 달라요. 재미?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뼛속까지 흥분되는 건 오랜만입니다. 그 점만은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나는 이제 그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도 인정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말이 제법 잘 통하는 편이다.

하지만 말이 잘 통한다고 해서 그의 이 돌아 버린 사고방식까지 아무렇지 않아진다는 뜻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주섬주섬 냅킨을 걷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말했다.

“이만 가요, 공자님.”

“좋은 산책 코스로 안내하죠. 내 교관이 식후의 다정한 산책을 싫어하는 여성은 없을 거라고 맹세했습니다.”

“산책은 그 교관님이랑 하시고요, 저는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밀리오라 전하께 보고드려야겠어요.”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울컥 말하고 말았다.

“전하께서 이상한 오해를 하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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