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너 즐기고 있구나,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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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너 즐기고 있구나,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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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너 즐기고 있구나, 그렇지?
2023.06.02.
혼잣말인지 나를 떠보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오늘 카이델 공자가 내게 말을 건 것은 바로 이런 식의 오해가 일어나기를 노린 것이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미샤, 그냥 가서 공자님께 인사하고, 있잖아, ‘저한테 춤 신청하세요.’ 하는 부채질. 그거 해.”
입궁하기 전 예법 교육 때 백작 부인이 그런 것을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춤은 나와 상관없다고 귓등으로 흘려 버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럴까? ……아니야. 뭐 하러. 사실 아까도 인사했는데 눈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가시더라.”
미샤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미샤가 돌아가자 테이블에 있던 백작님은 나를 향해 웃어 주었다.
나도 백작님에게 묵례했는데, 그러다 주변 영애들의 시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었다.
‘네까짓 게 감히 우리 카이델 공자님을 거절해?’
이것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가 이긴 싸움이었다.
“하아…….”
* * *
긴 파티가 끝난 밤, 그레이언과 로카르드는 2황자궁으로 돌아와서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레이언의 침소 발코니에서, 깨끗하게 차려입었던 그들의 셔츠는 느슨하게 열려 있었고 웃음은 함부로 흘러나왔다.
그레이언이 술잔이 다 출렁이도록 클클거리자 로카르드가 바라보았다.
“아까 밀리오라 시녀의 표정을 보았지. 아주 네 뼈를 발라내고 싶어 하던데!”
“구애는 시작하기도 전에 의도를 들켰습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공략하는 방법뿐이에요. 아마 오늘이 지나면 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겁니다.”
“뺨이라도 한 번 맞겠던데?”
“그러면 더 좋고요.”
“절대 차이지 마. 네 어깨에 내 명예가 달렸단 말이다.”
“명예를 말씀하시기에는 전하의 계략은 치사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내는 것이 내 사자의 책무지. 명예롭게 치사하도록 해.”
그러자 로카르드는 팔을 열어 머리를 숙이며 과장된 예를 갖추어 보였다.
그레이언은 나직이 웃으며 물었다.
“너, 즐기고 있구나. 그렇지?”
“네. 맛있어요.”
하지만 그레이언은 술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의 시선이 차게 식었을 때야 돌아보았다.
“안 됩니까?”
“나도 모르는 네 표정을 그 시녀 때문에 발견하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아.”
“제게도 처음 보는 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흥미로워요.”
그레이언은 토라진 듯 작게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자기 탐구로 끝내. 너는 첫 번째 사자가 될 자다. 그녀 피의 반이 로아르라지만 사생아라니, 안 될 말이야.”
로카르드는 밤에 젖은 정원을 지그시 보다가 말했다.
“전하야말로, 앙카르트 영애와 즐거워 보이셨습니다.”
“…….”
그레이언은 한숨을 쉰 다음 술을 따랐다.
“앙카르트가가 내 편이 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까?”
“이변이 없다면 앙카르트 자작이 새 제철소 건설의 가장 큰 투자자가 되겠죠. 거기에서 나온 막대한 부에 철 공급권까지……. 그 정도면 지금 전하를 바라보고 있는 군벌 귀족들, 중부 세력까지 충분히 포섭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경연 때 그들은 실망을 표시했으니까요.”
“그러나?”
“…….”
“네 목소리에 ‘그러나’가 들어 있어.”
로카르드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앙카르트 자작이 전하께 요구할 대가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가 전하의 힘을 빌려 장사치들이 하는 짓을 계속하려는 것뿐이라면, 전하께는…….”
“제 가문의 부를 어디다 쓰면 좋겠느냐 묻더니, 이름을 바꿔 달라던데. 엄청난 계집애야.”
로카르드는 굳은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음성에는 화가 섞여 있었다.
“감히 칼린 앙카르트가 전하께 청혼했다는 말입니까?”
로카르드는 경멸을 담아 코웃음 치고는 술을 더 따랐다.
그레이언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꼼꼼히 뜯어 보고 있었다.
“그것이 네 대답이냐? 경멸이.”
로카르드는 캄캄한 밤에도 눈동자를 빛낼 줄 알았다. 그는 제 주군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누구에게 물으시는 겁니까, 전하의 시종입니까, 친구입니까?”
“차례로 물어보지.”
“시종 로카르드에게 물으신다면 그녀의 욕망을 통제할 고삐를 마련할 때까지 신중하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친구 로카르드라면?”
“전하의 옆자리에 제국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로카르드는 완전히 솔직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화가 나 있었다.
칼린 앙카르트는 오늘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자신의 부로 장래의 황제를 사려 하다니.
그것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다음 황후 자격이 없음을 증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권력은 그렇게 거래되는 것이 아니다. 사업가들끼리의 거래라면 몰라도 그 규모가 제국일 때는 완전히 다른 논리가 요구된다.
그 차이를 모르는 자는 그 자리에 다가와서는 안 된다.
그레이언 타가르는 오늘 그러한 제안을 들었을 때 그녀에게 화를 내고 모욕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대신 깊은 밤, 그녀의 제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로카르드는 그레이언과 칼린 모두에게 화가 났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 상황을 앞으로 그가 고려해야 할 변수에 집어넣었을 뿐이다.
그레이언은 그의 침묵에 화가 난 듯 말했다.
“하지만 내겐 돈이 필요해. 오를 형님은 우리 외가의 돈을 멋대로 퍼다 쓸 수 있지만 내게는 너밖에 없어. 내 사람에게 작은 포상 하나 주려 해도 돈을 어디서 만들어 낼까 골머리 쓸 수는 없단 말이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이 새끼가 진짜.”
“말씀드렸잖아요. 저 돈 많다고. 그런데 전하 덕에 더 많아졌어요.”
“무슨 소리냐.”
“공해 해적이요. 아지트를 찾았습니다. 이젠 주인 없는 보물이잖습니까.”
“컥, 로카……!”
“돈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그리고 새 타가르는 황태자 위에 오른 다음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너 이 새끼, 그걸 너 혼자……!”
“제가 빌린 배만 여섯 척, 하나는 불태웠습니다. 그 비용이 얼만 줄 아세요? 승리는 전하께, 전리품은 제가. 합당하지 않습니까?”
“하…….”
밤은 깊었고 취기도 충분했다. 로카르드는 제 주군을 향해 다시 한번 화려한 동작으로 인사한 다음, 자신의 침소로 돌아갔다.
입가에 얄궂은 웃음을 띠고서.
* * *
에트랑.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모서리에 에트랑이라고 적힌 실크 냅킨을 내려다보며 회한에 잠겼다.
티 파티 영애들이 에트랑에만 다녀오면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과연 이곳에는 대낮인데도 귀족과 부호들이 가득했다.
평민들이 한창 일할 낮 시간에 점심 먹고 노닥거리는 것 말고 할 일이 없는 거냐고!
내 앞에 앉은 카이델 공자는 불편해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위로하듯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나도 그를 향해 뜨겁게 웃었다.
우리의 온도 차는 확연했다. 그는 구애를 연기하는 남자의 보람찬 웃음, 나는 거기 당할 수밖에 없어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웃음.
그의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나는 사교계의 예법을 어겼고, 그것은 모욕적인 행동이고, 그러니 나는 그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고, 사과받을 상대의 요구에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이를 갈 듯 중얼거렸다.
“이 연패야.”
“응? 뭐라고요?”
“아니에요. 배고프네요.”
뱃심이 있어야 싸울 수 있다. 이자는 사람을 혼미하게 만드는 재주가 특히 뛰어나니까.
“식사가 곧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요. 식당에 분명히 말해 뒀어요. ‘로아르 양’이 도착하자마자 음식을 내 달라고.”
“……식당에 ‘로아르 양’에 대해 말했다고요?”
“당연하죠.”
“공자님은 전쟁 영웅이시잖아요. 제국의 새끼 사자시고요.”
“음, 그 호칭은 위험합니다. 로아르 양.”
갑자기 무슨 소린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자는 황제 폐하만 내리실 수 있는 가장 영광된 칭호예요. 그레이언 전하는 폐하를 대신에 툰바르에 계셨고, 제가 황족을 구한 상황에서 그런 말을 썼기에 용인되고 있지만, 폐하께서 문제 삼으신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미 온 세상이 공자님을 그렇게 부르는걸요.”
“바로 그래서 폐하께서 묵인하시는 걸 거예요.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절대 금해야 합니다.”
“몰랐어요. 주의할게요.”
“역시, 당신이 내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걸 또 이렇게 확인하네요. 기꺼이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또 방심했다.
이 자식은 순간을 안 놓치고 훅 들어온다. 검을 잘 써서 그런가?
“하아…….”
나는 무심결에 주변을 보았다가 우리 근처 테이블에 황녀 전하의 티 파티 멤버 영애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자기 일행과 우리를 보며 열심히 속닥거리고 있다가, 내가 돌아보자 고개를 획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뻔했다.
카이델 공자와 로리샤 로아르가 데이트를 한다!
나는 고개를 애매하게 비틀어 피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좀 구석진 자리를 예약할 수는 없었어요? ‘로아르 양’이 구석진 자리를 좋아한다고요.”
카이델 공자는 내가 방금 바라본 쪽을 흘끔 보더니 씨익 웃었다. 금세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살짝 짚어 가리며 눈을 감았다.
“일부러 이런 자리를 잡으신 거죠? 개인실은 물어보지도 않으셨죠?”
“저는 로리샤 양과 말이 잘 통해서 좋아요. 대화가 척척 통하는 상대를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시잖습니까.”
“제발 좀 어려웠으면 좋겠네요!”
그때 요리가 서빙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카이델 공자는 말을 멈추었지만, 방금 내 말이 퍽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들 보기엔 저 미소가 연애하는 남자의 그것일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나는 다른 테이블을 흘끔 살펴보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