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작작 좀 들이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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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작작 좀 들이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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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작작 좀 들이대시죠
2023.06.01.
“어머.”
나는 그가 더 이목을 끄는 짓을 하기 전에 얼른 일어나 그에게 갔다. 그의 넓은 품에 포위당하는 기분에 움직임을 신중하게 조절하면서.
발돋움해도 키가 모자라 파직 쏘아보자, 그가 허리를 약간 숙여 주었다. 그제야 그의 귓바퀴 바로 근처에 입술을 가져갈 수 있었다.
고급 사향이 섞인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내 호흡을 따라 끼쳐 왔다. 체취까지 돈 많다고 자랑을 해야 하나. 향이 좋기는 좋지만.
나는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아무도 춤 안 추는 것 모르시겠어요? 다 우리만 보고 있다고요! 작작 좀 들이대시죠?”
그는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사악하고도 장난기 가득한 입김이 내 귓가를 스쳤다.
“시내에서 식사는? 수락하면 바로 꺼져 주죠.”
“한낮에도 할 일 없는 귀족들이 북적거리는 고급 식당에서요?”
“당연히. 에트랑이 좋겠군요.”
“그래서 황녀님의 시녀인 제가 황녀님을 배신하고 당신에게 푹 빠졌다고 소문나게요?”
“그러면 좋고. 아니어도 로아르 양의 사기를 밝혀낼 기회가 생겨서 좋고.”
그놈의 편지 얘기는!
“어머, 그런 흉한 말씀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카이델 공자님.”
“로카르드라고 부르라니까. 내 이름을 크게 불러 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 화를 내면서 해도 괜찮아요. 당신의 발성에는 감정이 풍부해서 좋아요.”
“호호호. 변태 같은 말씀은 그만하시죠.”
모두 들을 수 있게 닥치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는다. 참고 또 참는다. 그는 내 인내심의 걸어 다니는 계측기 같은 작자였다.
그런데 바로 맞받아칠 줄 알았던 카이델 공자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전쟁 중이라지만 내가 너무 나갔나, 침묵이 깃든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니 가슴이 철렁했다.
“방금, 저더러 변태라고 했습니까?”
그의 미성이 묵직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이럴 때일수록 밀리면 안 된다. 이것은 나만의 싸움이 아니니까.
나는 배에 힘을 팍 주고, 최대한 평온하게 말했다.
“역시 청력은 멀쩡하시네요. 카이델, 공자님.”
잠깐의 정적 끝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풉.”
그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졌다가, 공중 어디를 바라보며 자신을 진정했다.
그리고 불쑥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 맞추었다. 은밀한 속삭임을 뱉는 입술이 내 손등을 깃털처럼 스치며 간지럽혔다.
“2황자 전하께서 나를 괜히 타가르의 새끼 사자라고 부르시는 게 아니랍니다. 로리샤 로아르 양. 나는 반드시 당신을 무너뜨릴 거예요.”
나는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듯 부채를 잘게 흔들며 한껏 눈웃음쳤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지요.”
“자, 나와 춤춰요. 오늘은 그걸로 물러가 드리죠.”
그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며,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전 춤 못 춰요. 공자님.”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이 굳었다.
아마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나는 내가 춤을 배워 두지 않은 걸 자랑스럽게 여기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이제 가 보세요. 공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는 몹시 딱딱하게 말했다.
“사교계 예법에 따르면 여성은 춤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남성에게 수모를 줄 목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춤을 못 추는걸요?”
“믿기 어렵군요.”
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생각하는 게 싫었다.
나는 주변을 흘끔 살핀 다음 작게 말했다.
“백작 부인이 제가 손님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거든요.”
“에트랑.”
“……네?”
“당신 말을 믿겠지만, 당신이 내 춤을 거절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내게 준 모욕감을 보상해요.”
“하……!”
나는 다행히 입을 쩍 벌리기 전에 가까스로 부채로 가릴 수 있었다.
“약속한 겁니다.”
그는 매력적으로 웃더니 내게서 멀어졌다.
* * *
칼린 또한 다른 여자들처럼 카이델 공자와 로리샤 시녀의 대화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로리샤에게 생생한 분노를 느꼈다.
그녀의 뺨에는 아직도 양장점에서 황녀에게 맞은 얼얼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지배인이 앞으로 앙카르트 가문의 손님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느낀 모욕감은 죽은 후에도 잊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고작 저따위 사생아가 시녀 자리도 모자라 카이델 공자의 관심까지 차지하다니, 저런 부당한 광경을 믿기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미샤 로아르가 지금 그녀의 꼴에 얼마나 고소해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위가 다 아파 왔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겠어!’
칼린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을 때 누군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을 청해도 될까?”
“그레이언 황자 전하!”
칼린은 자기 앞에 나타난 그레이언 황자를 보며, 좀 전의 분노를 깨끗이 잊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이 황족이 먼저 손을 뻗어 오는 여자가 되었음을 확인한 순간, 칼린은 커다란 만족감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바로 이것이 저렇게 아득바득 출셋길을 기어오르는 사생아와 그녀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칼린은 행복한 얼굴로 춤췄다. 광대뼈 부근의 주근깨가 도드라질까 두려워 활짝 웃지 못하는 버릇이 있긴 했지만, 용기를 내어 그레이언을 향해 가능한 만큼 예쁘게 웃어 보기도 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앙카르트.”
“전하를 뵐 수 있어 행복하거든요. 초대장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감사는 진심이었다.
황제의 탄신일 파티는 제국의 모든 귀족에게 문이 열려 있었지만, 사신 환영 파티 같은 행사에는 고급 귀족만 초대받았다.
오늘은 앙카르트가가 그 문턱을 처음으로 넘은 날이었다. 그러니 양장점에서 따귀를 맞은 것이 대수일까.
그레이언은 칼린의 웃음에 사교적인 웃음으로 보답했다.
“칼린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전하? 저는 전하께 솔직하고 싶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시면 그게 더 수월할 것 같아요.”
“나를 그레이언이라고 부르지만 않는다면. 칼린.”
칼린은 그의 농담에 기쁘게 웃으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제 부친께서는 처음으로 북부 진출을 앞두고 계세요.”
그레이언은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단도직입. 칼린은 황족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지위의 미천함 때문인지 타고난 과단성인지, 그는 아직 판단을 유보했다.
“툰바르 산맥 근처에 지어질 새 제철소 건설 사업에 앙카르트가가 제1 투자자가 될 것 같아요.”
“그리 듣고 있어.”
“황제 폐하의 은혜와 그레이언 전하의 노고 덕에 앙카르트가는 더 큰 부를 축적할 거예요.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
“조언이 있으신가요?”
그레이언은 음악에 맞춰 칼린을 한 바퀴 돌렸다. 그녀의 가벼운 드레스가 종처럼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그대는 그 부를 어찌 사용하고 싶지?”
칼린은 그레이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매혹당한 여자의 눈이었다.
그 시선을 읽은 그레이언은 옅은 미소 속에 말을 아꼈다.
그녀를 반하게 한 건 그의 뛰어난 외모가 아니었다. 그레이언은 그 점을 혼동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며, 칼린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을 바꾸고 싶어요.”
칼린 앙카르트가 아니라 칼린 타가르로.
그때 마지막 박자가 끝났다. 그레이언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붙잡아 스텝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둘은 춤의 예법에 따라 맞절했고, 그레이언은 그녀를 테이블로 데려다주었다.
그다음 그레이언은 방금 황녀와 춤을 마친 아가엘 사신과 짧은 대화를 나눈 다음 자리로 돌아왔다.
그레이언은 이제야 플로어로 나가는 로카르드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정교한 시계처럼 돌아가는 주제에, 이런 자리에 갖다 놓으면 저렇게 천진한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다니.
그리고 오를을 곁눈질했다.
그런데 오를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아닌가.
‘네가 뭘 하려는지 다 알아.’ 하는 듯이.
그레이언은 가벼운 미소로 묵례한 다음, 마치 다음 춤 상대를 찾는 것처럼 테이블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이상하게 소름이 끼쳐 돌아보니 미샤가 서 있었다. 오늘 그녀는 빨간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 작은 보석 핀 여러 개로 장식하고 있었다. 예뻤다.
“미샤.”
“안 오려다가 왔어.”
그녀는 마치 지나가다 멈춘 사람처럼 내게 상당한 거리를 벌려 섰다.
그녀는 내게만 들리기를 바라며 조그맣게 말했다.
“칼린이 나한테 아는 체를 안 한다?”
“…….”
“내가 그만큼 힘들었는지 이제야 알았지, 뭐야.”
“…….”
하지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미샤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내가 평생 괴롭힘당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럴 때 위로의 말 같은 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너도 힘들었겠다 싶고……. 나도 너한테는 칼린이었잖아.”
나는 그만 놀라서 미샤를 돌아보고 말았다.
‘얘, 왜 이래, 무섭게! 사람이 갑자기 철들면 삼 년…….’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대답했다.
“알았다니 다행이야.”
이번에는 미샤가 나를 곁눈질하더니 말했다.
“카이델 공자님한테 춤 못 춘다고 했어? 아까 너랑 이야기하면서 엄청 마음이 상하신 것 같던데……. 나는 공자님의 그런 표정 처음 봐.”
그 말에 나는 이만 침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골이 지끈거렸다.
차라리 매를 맞지, 카이델 공자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건 정말 진 빠졌다.
“나는 춤을 못 추니까.”
“그거 엄청난 무례야. 애초에 귀족들은 춤을 마스터하기 전까지 사교계에 나갈 수 없다고.”
“응.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나는 줄곧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미샤가 지금 그의 음모를 알게 된다면……. 그건 악몽이었다.
미샤는 화려한 플로어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황족의 시종들끼리는 친분을 쌓을 수밖에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