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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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2023.05.31.
나는 이제 자포자기해서 백작님이건 누구건 부르고 싶었다. 그냥 내 방에 벼락이 떨어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저 자식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런 기괴한 말만 지껄이면서 저 고민스러운 표정은 뭔지!
“저는 빨리 배우는 편이니 당분간만 양해 부탁해요. 당신도 카이델저에 가 보면 이해할 겁니다. 거긴 군대와 비슷하거든요. 제가 자란 환경이 그랬어요.”
카이델 공자는 마치 ‘인제 보니 내 환경이 불행했군.’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나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거기 왜 가나요?’
나는 겨우 힘을 그러모아 말했다.
“카이델 공자님?”
“네. 로아르 양.”
“앞으로 제 앞에서 ‘몸’이라는 단어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자 그는 나를 의아한 얼굴로 잠시 응시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로아르 양은 그래도 됩니다.”
아침을 꾸역꾸역 먹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안 그랬다면 나는 이 순간 화를 참는 데 모든 힘을 소진하고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불렀다.
“공자님.”
“원한다면 내 몸에 대해서 말해도 돼요. 그러면 공평하겠죠. 사실……, 당신이 선택할 어휘가 궁금하기도 해요.”
“그만!”
내가 말을 자르자 그는 풀 죽은 얼굴이 되었다.
아마도 그는 평생 지금처럼 한꺼번에 대량으로 뭔가를 틀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칼 찬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집안에서 자라 여자들의 찬양만 받으며 살았으니 제가 얼마나 미쳤는지 지적받을 기회가 없었나 보다.
“알았어요. 혼자서만 생각할게요. 당신이 그것까지 막을 권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나를 돌아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 방금 무슨 생각 했어……?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말했다.
“이제 돌아가시죠. 게다가 이 집엔 미샤도 있어요. 공자님에게 반한 아카데미 동기요!”
카이델 공자는 입으로 가져가던 찻잔이 살짝 출렁일 정도로 몸을 움찔했다. 내 지적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대체 누가 저 인간을 제국의 수재라고 말했나.
내가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으로 헛헛하게 웃고 있는데,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미샤 로아르 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제는 그 편지의 진실을 밝혀도 되지 않습니까? 미샤 양과 삼자대면 어때요? 관계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기 위해서는 솔직함이 가장 중요하다더군요.”
관계의 계단이라니.
누군지 몰라도 그 선생이란 작자의 주둥이를 비틀어 버려야 한다.
“나가요.”
나는 몹시 차분하게 말했고, 그는 내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내 손에서 달달 떨리고 있는 포크를 보고는 웃음을 지웠다.
그는 점잖게 일어나더니 말했다.
“차 잘 마셨어요, 로아르 양. 다음에는 제가 초대하는 영광을 주세요.”
내 입가는 파르르 떨렸지만, 그런대로 웃는 척을 할 수 있었다.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공자님.”
“로아르 양. 아무리 당신의 부탁이라도 안 되는 게 있답니다. 훗.”
그는 매력적으로 웃었지만, 내 펄펄 끓는 살기에 작게 한숨을 쉬고 발코니 너머로 사라졌다.
마치 작별의 키스를 못 해서 아쉽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첫 번째 사자님은 아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그 교관을 참수해야 한다.
카이델가와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 * *
나는 백작저에서 조금도 쉬지 못한 채 황궁으로 돌아왔다.
미샤와 일종의 화해를 이룬 것은 뜻밖이었으며 사실 살짝 충격적인 일이었다. 미샤가 나를 그런 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니.
싫은 건 아니지만, 그 애와 그런 식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나니 이제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그걸 곱씹을 시간도 없었다.
나는 문득 세상에 존재하는 광기의 양은 일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카이델 공자가 그걸 독차지해서 미샤가 정신을 차린…….
“아아, 나야말로 정신 차리자.”
나는 오늘 저녁 열리는 파티를 위해 황녀 전하의 단장을 도우러 갔다.
아가엘 사신들은 무사히 도착했고, 행정관들은 그들이 데려온 제련공들이 실제로 능력 있는 자들이라는 걸 확인했다고 했다.
제국에는 이 년이나 아마타족의 땅을 두고 대리전을 치른 아가엘과 급격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백작님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이제 경연이 조건도 제한도 없는 경쟁이 되었다면, 나는 과연 황녀 전하를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지.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구태여 내가 나서서 무엇을 잘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황녀 전하가 당당한 황족으로 보이게 하면서도 최대한 방어적으로 지낼 방법. 그것이 내가 고민해야 하는 일이었다.
저녁 무렵 단장이 끝난 후, 밀리오라 전하는 눈이 부셨다. 나도 백작 부인이 마련해 준 드레스를 차려입고 그녀를 수행했다.
그녀는 사신 환영연이 열릴 대연회장으로 가며 나직이 물었다.
“로리샤, 나는 오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사신이 제일 먼저 자신을 받아들여 준 전하께 친근함을 표시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인사를 받으시고 다른 질문이 나오거든 담당 행정관과 이야기하라고 돌리세요.”
“제철소 건설은 기술적인 문제니까?”
“바로 그거예요, 전하. 전하는 그를 환영한다는 티만 내 주시면 돼요.”
“그 정도로는 오라버니들의 심기가 상하지는 않겠지? 자칫하면 또 네가…….”
“물론 괜찮을 거예요, 전하. 걱정 마세요.”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황녀 전하가 심호흡하며 대연회장에 들어서는 걸 보며, 어쩐지 다 큰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이번 드레스는 훌륭해서, 귀족들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드레스에 대한 찬사를 빼놓지 않았다.
밀리오라 전하는 ‘내가 언제는 안 예뻤나?’ 하는 듯한 시큰둥한 태도로 인사를 받았는데, 그게 은근히 멋있어 보였다.
비록 그녀가 속으로는 좋아서 날뛰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들도 한껏 꾸민 차림으로 나타났고, 주요 귀족들의 얼굴도 착착 모습을 드러냈다.
칼린 앙카르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새침하게 모르는 척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엘 사신 옐로이가 밀리오라 전하에게 춤을 청했고, 그녀는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우아한 태도로 플로어로 나갔다.
나는 구석진 데 앉아 그녀의 춤을 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누구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었을 거다. 로리샤.’
백작님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은 건지…….
춤추는 밀리오라 전하는 천진하게 즐거워 보였고, 내가 자리한 공간은 사치스러움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예전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속한 곳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세상이 사생아라는 이유로 나를 배척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세상을 싫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세상에서 멸시당하는 사생아라는 사실은 달라진 적이 없지만, 이제는 내가 그것에 예전만큼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부채를 부드럽게 부치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하아. 아직은 힘들지도.”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움직이기에 보니 카이델 공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꿈을 꾸느라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지각하신 건지.
그는 입구 쪽의 아는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눈으로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획 꺾은 다음 부채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플로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별로 좋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에 부채를 슬쩍 내려보니, 그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회장을 채운 영애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끌고서 말이다.
나는 부채 뒤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젠장, 또 시작이네.”
솔직히 말해서 오늘 그는 반짝반짝 빛났다. 그의 짙은 감청색 제복은 매우 뛰어났다.
남자 옷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의 제복은 몸에 딱 맞고 몹시 잘 어울렸다.
그가 여성의 몸 운운하기에 나도 한번 봤더니, 로카르드 카이델이란 남성의 몸은 참 유별나게 구성이 좋았다. 쭉 뻗은 키며 탄탄한 가슴이며 비율 다.
파탄 난 성격과 불량한 양심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내가 그를 흠 잡을 다른 말을 찾는 사이,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키는 쓸데없이 커서, 앉은 채로 눈을 똑바로 보아 주려면 내가 턱을 쳐들어야 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든다.
매끄럽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마저 한 올 한 올 잘난 척하는 놈. 내게 집중한 저 보라색 눈동자는 또 얼마나 열정 가득한지.
저렇게 빛나는 눈이 저렇게 완벽한 얼굴에 자리 잡은 걸 설명하는 말은 하나뿐이다.
불공평. 신은 불공평하다.
하지만 오늘은 지난번 백작저에서처럼 속절없이 당할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나는 눈을 휘어 접어 웃으며 속삭였다.
“꺼져 주시겠어요?”
“로아르 양…….”
이 새끼, 상처받은 얼굴 하는 것 좀 봐라.
지난 며칠간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제 속을 곧이곧대로 꺼내 놓던 자가, 어쩐지 오늘 수줍은 척을 했다.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숨기려 부채를 똑바로 세웠다.
그때 그의 뒤로부터 훅 끼쳐 오는 열기. 그것은 아닌 척 우리를 주시하는 영애들의 질투의 불길이었다.
하. 이거지.
이 자식은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나를 저 불길로 태워 죽이려는 거다.
나의 무례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중한 얼굴로 한 발 더 다가왔다.
마치 당신이 주는 것이면 마음의 상처마저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를 아끼는 여자들에게는 분노를 금할 수 없는 연출이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 파티는 제국의 고급 사교계에 속한 인물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 저들의 눈에 오해를 만들면 소문은 삽시간이라는 뜻이다.
카이델 공자는 거기 기대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었다.
‘거기 딱 서!’ 하듯 눈을 치떴더니 그가 나를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가련한 얼굴로 나를 제국 영애들의 공적으로 만들다니.
그가 저 압도적인 표정으로 제국을 다 홀려 놓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림도 없다.
그나저나 저런 눈빛은 대체 어디서 살 수 있는 거지? 제길.
내가 순간 집중력을 잃자 그가 훅 치고 들어왔다.
“로아르 양. 춤을 청하려 했습니다만, 제가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먼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군요. 잠시 대화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청력도 안 좋으신 분이 무슨 대화를 원하시는 걸까요?”
꺼지라는 말 못 들었어요?
그러자 그가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저 빛나는 자존감과 자신감이 얼마나 거슬리는지, 저 인간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로아르 양, 어째서 제게 기회를…….”
나는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지금 그가 무슨 연극을 벌이려는지 아는 이상, 절대 이대로 순순히 끌려갈 수 없었다.
나는 사납게 웃으며 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공자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이 악마 같으니!”
카이델 공자는 충격을 받은 듯 ‘오’ 하는 입 모양을 하면서도 입꼬리를 살짝 들썩거리고 있었다.
지금 이 자식은 엄청나게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를 빠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엄마, 나는 못된 애가 맞아. 어릴 때는 마을 애들이 못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내가 못돼서 걔들이 나한테 돌 던진 거였나 봐.
나는 고민했다. 이럴 땐 입만 댄 이 술잔의 술을 끼얹어 주어야 하나, 아니면 그의 요청에 응하는 척, 발코니로 데려가 정강이를 까 주어야 하나.
하지만 둘 다 곤란했다. 감히 제국의 첫 번째 사자 카이델 공작의 적자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간 내 부친 로아르 백작에게도 후폭풍이 미칠 터다. 서열상 백작님이 딸리니까.
그렇다고 함께 발코니로 갔다간 내가 저놈에게 반했다고 공증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여자가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을 생각이 없다.
이 자식도 그걸 알고 이러는 것이다. 내게 차여 살갗이 까진 정강이를 쓱쓱 문지르며 웃겠지.
나는 내게 내리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훑어본 다음, 낮고 빠르게 말했다.
“그만하고 돌아가세요. 지금 피해자는 공자님이시니까,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그러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남녀 간의 감정에 있어서는 더 큰 감정을 품은 사람이 진 거라더군요. 그러니 로아르 양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네.”
또 그 선생 놈인가. 내 언젠가 그놈의 검을 분질러 놓고 말겠다.
“우리가 서로 다른 주인을 모시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로아르 양. ……제가 무릎이라도 꿇으면 마음을 열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