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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당신의 옷차람이 부적절하지 않습니까 (88/155)


87화. 당신의 옷차람이 부적절하지 않습니까
2023.05.30.


미샤가 미쳤나 보다.

나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아 입을 연 채 굳어 있었다. 미샤는 그사이 사라졌다.

나는 미샤 때문에 눅눅해진 옷을 갈아입으려다 피로감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설마, 미샤가 나를 칭찬한 거야?’

나는 무심히 내 뺨을 꼬집어 보았다. 그런데 짜증이 날 정도로 아팠다.

헛헛하게 웃으며 심호흡을 하고 보니 어쩐지 방이 예전보다 살짝 작아진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 내가 더 큰 세상을 알아 버려서인지도 몰랐다.

그 철없던 미샤도 고생 속에 자라고,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황족들이 운명을 걸고 다투는 그런 진짜 세상 말이다.

* * *

나는 다음 날 오전까지 늦잠을 잤다. 이렇게 푹 잘 줄은 나도 몰랐다.

황궁에서는 남의 눈이 많아 저절로 발딱발딱 일어났는데, 내가 그동안 긴장을 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테리아가 침대로 가져다준 식사를 하며 그녀와 수다를 떨었다. 테리아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궁 안의 일을 몹시 궁금해했다.

그렇게 재미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테리아가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떴다.

“테리아, 왜……. 컥!”

“아가, 아가씨?”

“나가, 나가. 테리아,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고! 괜찮으니까. 아니, 안 괜찮지만, 아무튼!”

“정말이세요? 사람을 불러야…….”

“테리아, 제발! 절대 말하지 마, 알았지?”

테리아는 그 와중에도 직업의식을 발휘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쭈뼛거리며 그 질문을 한 건, 아마 눈이 홀려서였을 거다.

“네, 네! 그럼 차는…….”

그사이 내 방 발코니로 뛰어내린 카이델 공자는 옷을 툭툭 털어 정리하며 대답했다.

“차는 편한 걸로 부탁하지. 고마워.”

“네. 마침 어제 들여온 게 있어서……. 그럼…….”

테리아가 제 치마를 밟아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며 나간 후에도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단지 내 앞의 트레이를 꽉 붙잡을 뿐이다. 그것으로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었지만, 그중에 폭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어서였다.

카이델 공자도 힘이 꽉 들어간 내 눈과 팔을 차례로 보더니 슬쩍 소파 뒤로 물러섰다.

“아침 식사가 늦군요. 로아르 양.”

“오늘은 로아르예요?”

“거리감을 주고 싶어서요. 지금 로아르 양의 옷차림이 부적절하지 않습니까.”

그는 심지어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시선을 피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순수한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요? 지금 제가 부적절해요?”

“가운을 입어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뭐에 도움이 된다는 거죠?”

내가 빽 소리치자 그가 시선을 피하며 괜히 헛기침을 하는 게 아닌가.

“지금 시각과 장소를 고려할 땐 당신 몸매를 덜 보고 싶습니다. 이 정도면 합리적인 요구 아닙니까?”

“합리?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게 지금 여자 방에 쳐들어와서 할 소린가. 게다가 내 잠옷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원피스였다.

내 목소리가 찍찍 갈라지자 그가 나를 나무라듯 말했다.

“목소리를 좀 낮춰요.”

그는 소파에 앉더니 다리를 꼬고 내가 아직 읽지도 않은 신문을 펼쳐 들었다.

누가 보면 평화로운 부부의 휴일 아침인 줄 알겠다.

‘이, 별…….’

나 또한 숨을 고르며 하던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아마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배를 완전히 채우지 않으면 지금부터 카이델 공자와 싸울 때 드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카이델 공자는 그런 나를 중간중간 흘끔거렸다. 그리고 이따금 문을 바라보았다. 테리아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살마 배가 고파서? 식전이라?

그러게 왜 식전 댓바람에 여자 방 창문을 타고 넘어서는…….

불 뿜는 독수리, 카이델가의 위대한 후계자께서.

잠시 후 테리아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 씨?”

카이델 공자는 테리아가 들어와 탁자에 쟁반을 놓자 반가운 듯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간식을 조금…… 곁들였습니다.”

간식이라니!

테리아는 카이델 공자의 얼굴에 홀려 배시시 웃으며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내가 그걸 보고 뭘 하겠나. 헛웃음을 칠 수밖에.

테리아가 우리의 눈치를 번갈아 보며 돌아간 후,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소파에서 차와 과자를 몹시 만족스럽게 즐겼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태연한지.

나는 식사를 다 마친 다음, 스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배가 채워지니 흥분을 추스르기도 훨씬 쉬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끔찍한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후이기도 했다.

나는 식사 트레이를 옆으로 치워 놓고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카이델 공자님.”

“좋은 아침이에요. 로리샤 양.”

“로리샤요?”

“지금은 당신이 훨씬 평온해 보여서 안심이 되거든요. 그러면 리샤라고 불러도 되나요?”

“아니요.”

“제 선생이 여성들은 애칭을 좋아한다던데, 틀린 모양이군요.”

“그 선생, 그냥 죽이세요.”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그러긴 힘들어요. 교관이라서.”

“아아. 카이델가의 가신이군요. 그 선생이.”

“네.”

“그가 저에 대해서 또 뭐라던가요?”

“그는 당신을 모릅니다. 기사들이 여자 문제에는 의외로 입이 싸서……. 흐흠, 아무튼 백작님께는 우리 관계에 대해 당신이 먼저 설명하고 싶을 듯하여 발코니로 들어왔습니다.”

설명? 설명? 하…….

“참 배려가 깊으세요. 공자님은.”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사소한 데에서 더 감동한다고 들었거든요.”

“그 선생이요?”

카이델 공자는 살짝 의심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 부분은 맞는 거지요?”

나는 남자가 여자 방의 발코니를 타 넘는 게 배려인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몹시 차분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해 두죠.”

그러자 그는 혼자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흠……. 검술 교관으로 일생을 마쳐야 할 자로군요. 검술 말고 다른 가르침은 형편없어요.”

“제자가 형편없는 건 아닐까요?”

“…….”

칭찬만 듣고 곱게 자란 애들은 저게 문제다. 조금만 뭐라고 해도 예민해지는 것.

카이델 공자는 내 말에 눈썹을 살짝 기울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불쌍하고 억울한,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그건 강아지에 대한 모욕이야.’

바로 이런 결론이 ‘합리’적인 거다. 저자가 지껄이는 게 아니라.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양장점에서의 일 들었습니다.”

나는 살짝 찌푸리고 대답했다.

“먼저 실수한 건 공자님의 동기 생도였어요.”

그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내 오해가 유쾌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걱정한 겁니다. 저는 앙카르트 양과 그다지 친분이 없어요.”

“전 괜찮아요.”

“저는 황녀 전하를 걱정했습니다만.”

이 자식이 아침부터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나는 순간 욱했으나 그의 표정을 보니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도 꾹 참고 말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는 의연하게 넘기셨어요.”

“전에 없던 일이군요.”

“……?”

“밀리오라 전하께서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것 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지어져 얼른 표정을 정리했다.

사실은 나도 그래서 기뻤다. 그녀가 나를 위해 싸워 주고, 자신을 위해 싸워서.

그래서 그녀가 자신이 용기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서.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바꿨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시고요?”

“…….”

“황궁의 제 방 창이 잠겨 있었던 모양이죠?”

“맞아요.”

내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흐흐 웃었다.

“하지만 단지 양장점 사건에 대해 더 듣고 싶어서 당신을 찾아오기로 한 건 아니었어요. 최근에 저는 당신을 부쩍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귀찮은 일이더군요.”

“…….”

“아, 이 말은 그가 가르쳐 준 게 아닙니다. 솔직한 표현이 여성을 기쁘게 한다기에 노력해 본 거예요.”

“아아.”

“……별로입니까?”

“아카데미는 성적 등급을 어떻게 매기나요?”

“대부분 ‘수우미양가’입니다.”

“그러면 ‘가’를 드리죠.”

“하…….”

카이델 공자는 깊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굳혔다.

“평생 처음 받는 성적이군요! 당신은 내게 ‘첫 기억’을 남겼어요. 그러고 보면 당신은 언제나 내게 강렬한 기억을 남기는 편이죠. 그것이 당신의 매력입니다. 로리샤 양.”

야이, 씨…….

나는 순간 툰바르 산맥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내 자아 한쪽에서는 그동안 고였던 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고, 내 이성은 그 사이에 돋아난 작은 바위일 뿐이었다.

“공자님, 지금……!”

그런데 그가 근엄하게 내 말을 잘랐다.

“가운, 부탁해요. 계속 그대로 있으면 내 유혹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겠습니다.”

“헉.”

“여성의 몸이라는 게, 일단 한번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까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을 빼앗아 가더군요. 대단히 흥미로운 일입니다.”

카이델 공자는 무슨 과학적인 발견을 이야기하듯, 나를 외면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채로 재빨리 가운에 팔을 끼고 앞섶을 꽉 당겨 끈을 여몄다.

아침을 막 먹은 후라 허리가 졸려 잠깐 토할 것 같았다. 내 머릿속은 더 혼미해졌다.

“공자, 공자님, 지금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은데…….”

“그러게요. 지금 당신의 모습이 오늘 밤 제 꿈에 나온다면 퍽 곤란하겠어요. 당신은 당분간 제 숙면을 방해할 겁니다.”

“…….”

“이런 변수가 있으리라곤 생각 못 했는데, 아, 절대 불평하는 건 아니에요.”

“변수…… 요.”

내가 기가 차 중얼거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과자를 오도독 씹어 먹었다.

나는 뒤늦게 떠오른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뱉었다.

“여, 여성의 몸이요?”

그는 살짝 당황하더니 말했다.

“표현이 부적절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새롭게 배워야 할 게 정말 많군요. 나는 그동안 반쪽짜리 세상에서만 살아왔던 거예요, 세상에! ‘당신의 몸’. 그렇게 말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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