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나 칼린 앙카르트를 만났어 (87/155)


86화. 나 칼린 앙카르트를 만났어
2023.05.29.


“지금 너는 제약 없는 경쟁 중에 있다. 내가 그분의 의중을 확언할 수는 없지만 폐하께서는 모두를 지켜보고 계실 거다.”

“……‘사냥에 참여하라’고요?”

백작님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졌다.

“포식자가 승리할지,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자가 승리할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폐하는 장래 제국의 주인이 될 자질을 문제 몇 개로 가릴 수 있다고 믿는 분이 아니다.”

“폐하는 황가의 평화를 추구하시는 줄 알았는데…….”

나는 가벼운 소름을 느꼈다. 하지만 백작님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에 담긴 의구심을 굳이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참 만에 대답할 수 있었다.

“권력이란 참 무섭네요.”

“소중한 배움을 얻었구나.”

백작님은 그렇게 답했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내 익숙한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문제조차 없는 답을 찾아야 한다니…….’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경연은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나는 황궁을 나올 수나 있는 건지…….

백작님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령 ‘웬 미친놈이 하나 쫓아다니는데, 그 새끼를 어떻게 하면 곱게 떼 놓죠?’ 하는 질문 같은 것도.

미샤라면 백작님에게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텐데,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겨우 그렇게 물었다.

“백작님, 저 잘할 수 있을까요?”

“로리샤. 문제에 부닥쳤을 때 너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너 자신뿐이다. 너는 자신을 동지로 삼아야 한다.”

“……자신을 믿으라고요?”

백작님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방에서 나갔다.

자신을 믿으라니.

내가 사생아라는 것. 욕쟁이라는 것. 그리고 실현 가능성이 아슬아슬한 장래 희망을 가졌다는 것.

그 정도 말고 내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자신에 대한 믿음, 자기 확신 같은 사치는 로카르드 카이델 같은 남자나 누릴 수 있는 거다. 사람에 대한 믿음도.

나는 내가 오랜만에 백작님과 만났음에도 그를 내심 경계했음을 깨달았다.

나를 질책하면 어쩌나, 내 속을 다 드러내면 비웃지나 않을까, 어쩌고저쩌고…….

확신으로 따지면, 나는 나 자신에게보다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인간을 더 자주 확신했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가 진심을 말할 때와 계산된 행동을 할 때를 퍽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최근에 보이기 시작한 광기를 그 자신은 선의로 믿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과 그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누구도, 나조차도 믿지 않는 모양이니까.

엄마가 그렇게 날 떠나가지 않았다면, 내가 엄마를 믿었듯 세상을 계속 믿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나는 백작님을 믿지 못해 도망친 엄마를 닮아서 그냥 아무도 믿을 줄 모르는 걸까…….

“네 얼굴을 여기서 다시 볼 줄이야. 나한테 시녀 메달을 자랑이라도 하러 왔어?”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미샤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움찔 몸을 물렸다.

미샤는 나를 쏘아보며 팔짱을 꼈다. 지난번 황궁의 티 파티 일로 여전히 감정이 안 풀린 것이다.

‘내가 백작저에 오기는 왔네.’

예전의 미샤는 맹해서 귀여운 데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얼굴은 예민하고 사나웠다.

그것이 그 갈색 머리 계집애 때문이었다니.

칼린 앙카르트를 겪어 보니, 과연 미샤가 상대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미샤의 증오를 느끼며 내가 양장점에서 뭐 하러 욱했나 싶어져 웃음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미샤가 괴롭힘당하는 건 고소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내게 약점이 잡힌 칼린 앙카르트는 이제 미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미샤가 아카데미에 계속 잘 다녀서 좋은 가문에 시집간다면 백작님도 근심이 줄어들겠지.

‘효도했다 쳐야지, 어째.’

나는 새침하게 말했다.

“백작님이 날 걱정하신다기에 잠시 다니러 온 거니까, 오해하지 마.”

“널 안 보고 사니까 내가 살 것 같았는데. 네가 사라질 때까지 아카데미 기숙사에라도 돌아가 있어야 할까 봐.”

아우, 저게 진짜!

미샤는 네가 시녀라는 걸 뻐기려고 왔으니 나도 네가 그렇게 원하던 아카데미 생도라는 걸 뻐기겠다, 하는 중이었다.

나도 빈정 상해서 말했다.

“그래? 고마워. 기숙사에 가면 친구들도 있고 좋지, 뭐. 안 그래?”

“…….”

미샤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미샤의 반응에서 그녀가 ‘기숙사 친구’라는 말에 누구를 가장 먼저 떠올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나 칼린 앙카르트를 만났어.”

“뭐……?”

미샤의 눈은 겁에 질렸다.

미샤를 쥐고 흔들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막상 그 모습을 보니 썩 그렇지도 않았다.

“걔, 나한테 약점 단단히 잡혔으니까 혹시 앞으로도 까불면 나한테 이른다고 해.”

미샤는 새하얗게 질려 숨도 멈춘 것처럼 보였다.

대체 그년이 무슨 짓을 했길래 미샤의 반응이 저 정도인지, 칼린의 머리를 쥐어뜯어 놓았어야 하나,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미샤는 갈라지는 소리로 겨우 뱉었다.

“너……!”

“네가 무슨 약점이 잡혀서 그랬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나가서 백작님 망신시키고 다니지 말란 말이야. 나하고 너는 입장이 다르잖아?”

적녀가 나가서 똑바로 처신해야지.

“…….”

미샤는 입술을 깨물고 바르르 떨더니 소파에 털썩 앉았다. 흡사 그 애의 몸이 무너지는 듯해서 나는 흠칫 놀랐다.

“괜…… 찮아?”

“정말이야? 크흡. 정말, 내 얘기 안 했어? 몰라?”

“미샤 로아르. 너는 내가 미워서 못 살겠다는 모양이지만, 나는 너한테 그 정도로 관심 없어.”

“흑.”

“아카데미 생도는 황가에 대한 충성과 품위 유지 의무가 있지?”

미샤는 목뼈가 걱정될 정도로 격하게 끄덕였다.

과연, 아카데미 생도라면 황족 모독죄에 가중치가 붙는다.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한 다음 뻐기듯 말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앙카르트가가 뒤집히고 칼린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 말할게. 됐니?”

“로……, 로리샤아! 끄으윽.”

미샤는 내 무릎에 엎어져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두 팔을 번쩍 든 채 숨을 몰아쉬었다.

‘웃기는 계집애. 이런다고 내가 저를 용서할 줄 알고!’

하지만 나는 이미 미샤의 등을 툭툭 두들겨 주고 있었다. 칼린 계집애가 미샤의 마음을 얼마나 짓밟아 놓았는지 몸으로 전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내 허벅지는 얼마 안 가 미샤의 눈물 때문에 축축해졌다. 찝찝해서 이만 미샤를 떼어 내려고 어깨 옷자락을 살짝 당겼더니, 그 계집애는 그제야 비척거리며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미샤는 그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샤에게 미리 주의를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에 돌아가서 괜히 걔 건드리고 그러지 마. 서로 모르는 척하고 공부만 해.”

“응응. 그럴게. 나 공부 열심히 할 거야. 카이델 공자님께 직접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힘낼 거야.”

“컥…….”

거기서 그 인간이 왜 나오는지!

로카르드 카이델. 정말 안 끼는 데가 없다. 흡사 나한테 로카르드 카이델 유령이 붙은 것 같다.

미샤는 내 질린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열심히 눈물을 닦고 머리카락을 정리한 다음 말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왜 그렇게 해 준 거야?”

나는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 미샤에게 빚을 만들어 둘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뭐 하러.

미샤가 칼린 앙카르트에게서 벗어나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나도 미샤에게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미샤. 세상 모든 일이 너와 관련된 건 아니야.”

“…….”

“나는 오늘 우연히 칼린 앙카르트를 만났고, 우연히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을 뿐이야. 나는 그걸 단지 선의로 알려 주는 거고.”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리고 말았다.

“네가 아무리 싫더라도 우리는 같은 아버지의 딸이니까. ……내가 원한 적 없었어도.”

뭐 하러 이런 말을 했을까. 나는 멈칫 입을 다물고 눈을 피했다.

그렇지만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든 좋든 우리는 자매라고. 그러니 날 좀 그만 미워하라고.

미샤는 말이 없었다. 울음도 그치고, 가쁜 숨도 그치고, 조용히 일어나 문으로 갔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칼린 앙카르트는 우수해. 자기 실력에다 집안의 부까지 받쳐 주니 장래엔 어디든 진출할 거야. 제국 학술원이든 행정관이든. 네가 황궁에 있는 한 언젠가 그녀와 마주치게 될 거야. 그러니 네가 잡은 그 약점이 언제까지나 유효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

“앙카르트가는 돈으로 작위를 샀다는 소문이 있어. 확인해 본 사람은 없지만, 그들이 고급 사교계에서 따돌림당하는 건 다들 그걸 믿기 때문이야.”

“……미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외모에 열등감이 있어. 혹시 싸우게 되면 그걸 이용해. 그녀의 부친이 이번 철 제련 사업을 노리고 있다는 것 같은데, 더 자세히는 나도 몰라.”

나는 처음으로 듣는 미샤의 어른스러운 말투에 대꾸를 잊고 말았다.

미샤도 그동안 자란 모양이라고, 이제는 그 유치한 말투를 들을 수 없는 건가 생각하니 조금 섭섭할 정도였다.

나는 먹먹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황궁에 있지 않을 거야. 미샤.”

“아니, 내가 보기에 넌 그럴 거야.”

“…….”

“넌 칼린보다 우수하니까. 너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강한 사람이니까. 사람들이 그걸 몰라볼 리가 없어. 칼린 같은 저열한 계집애에게 절대 지지 말라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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