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황녀의 양장점(4) (86/155)


85화. 황녀의 양장점(4)
2023.05.28.


칼린은 아차 싶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성질 같아서는 파랗게 질릴 때까지 밟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경연 중인 상황에 황족 모독죄를 걸어 소란을 만드는 것은 황녀 전하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어떻게 할래요? 지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래요, 아니면 당신의 언행을 정식으로 보고할까요?”

나는 목소리를 음산하게 낮추어 말했다.

“당신이 동기 생도를 어떻게 이용해 먹는지까지 포함해서.”

“미샤가 어떤 앤지…….”

“앞으로 그 입에 ‘미샤’라는 이름은 담지 않은 게 좋을 거예요. 어디 한번 무게를 달아 봐요. 미샤와 황족 모독죄, 어느 게 더 무거울지.”

칼린은 호흡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드레스를 황녀 전하께 갖다드리러 갈 거예요.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도 당신이 여기 있다면 그때는…….”

“밀……. 아앗!”

순식간의 일이었다. 밀리오라 전하가 속치마 차림으로 시착실에서 튀어나오더니, 칼린에게 돌진해 뺨을 후려쳤다.

전하의 긴 은발이 찰랑이며 공중으로 흩날릴 정도의 강도였다.

칼린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뺨을 감싸 쥐고 얼어붙었다.

하지만 밀리오라 전하는 성에 차지 않아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왜, 사생아 처음 봐? 앙카르트 자작가에는 지금까지 사생아가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야?”

사생아가 없는 집안은 없다. 그런 완벽한 세상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그게 아니오라…….”

“그거 정말 고결한 일이네. 제국의 모든 사내는 앙카르트가 남자들을 본받아야겠어! 그토록 고결한 입이라 나에 대해서도 목숨 무서운 줄 모르고 지껄인 게지?”

칼린 앙카르트의 잘 말아 올렸던 머리는 흘러내려 산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은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 하얬다. 굳이 사과를 받을 필요도 없는 몰골이었다.

황녀 전하는 몸을 획 돌리더니 내게도 소리쳤다.

“그러게, 아프면 쉬라고 했지? 왜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거랑 마주치고 그래? 나까지 기분 나빠지게!”

“죄, 죄송…….”

내가 얼떨결에 사과하기도 전에, 황녀 전하는 내 팔에 들린 드레스를 보더니 한쪽 입가를 쭉 끌어 올려 웃었다.

“내 시녀가 기왕 지켜 낸 옷이니 입어나 보자. 뭐 해?”

“네, 전하.”

우리는 칼린 앙카르트를 내버려 두고 시착실로 갔다.

앞장선 그녀의 여린 몸이 그때만은 어찌나 당당해 보이던지.

시착실 문을 닫자 지배인과 아까의 점원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점원이 지배인에게 상황을 알리다가 전하까지 알게 된 것 같았다.

“불미스러운 일로 전하의 심기를 상하게 해 드렸습니다! 부디 용서하세요, 황녀 전하.”

하지만 황녀 전하는 새침하게 말할 뿐이었다.

“지배인이 뭐가. 지배인도 저런 애들 때문에 곤란한 것 아냐? 옷이나 입혀 줘. 나 이거 입고 파티에 갈까 봐.”

“예, 전하!”

불벼락을 피한 지배인은 얼굴이 환해져서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나는 앉아서 그녀가 드레스를 입는 걸 바라보았다.

칼린 앙카르트의 성격이 원래 그렇게 집요하고 끈질긴지는 내 알 바 아니었지만, 그 싯푸른 드레스는 과연 욕심낼 만했다.

그 옷은 마치 황녀 전하의 길고 찰랑거리는 은발을 돋보이게 하려 만들어진 옷 같았다.

밀리오라 전하의 미모도 미모지만, 나는 방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나서 주다니…….’

사실 나는 밀리오라 전하를 철없고 버릇없는 황족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그녀의 행동은 적잖이 감동적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카이델 공자를 떠올렸다.

‘공자님, 여자를 반하게 하는 행동은 이런 거라고요!’

“어우!”

왜 그 인간을 떠올리고 난린지, 나는 내 행동에 놀라 머리를 마구 저었다.

그때 밀리오라 전하가 드레스를 다 입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어떠니?”

“세상에, 아름다우세요!”

“흥. 맨날 하는 소리.”

“맨날 아름다우신 걸 어떡해요! 그런데 오늘은 특히 더 잘 어울리세요. 지배인님의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그걸 알아보시는 시녀님의 안목도 마찬가지랍니다.”

자칫 큰 위기가 될 뻔한 사건을 무사히 넘겨서인지, 지배인은 덩달아 기분 좋아했다.

우리가 가게를 나올 때 칼린 앙카르트와 하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배인은 앞으로 앙카르트가의 손님은 받지 않기로 했다고 내게 속삭여 주었다. 전하께도 전해 달라고 말이다.

나는 마차에 오른 후 슬쩍 입을 열었다.

“전하, 아까…….”

“뭐, 아까 일? 됐어. 내가 내 시녀를 지키지, 누가 하겠어? 그 앙카르트 계집애가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드러내니 기고만장해진 게지. 한미한 지방 자작가 주제에 어디서! 한번은 기를 꺾어 줬어야 할 일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당연히 그녀에게 감사를 전하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밀리오라 전하가 알아서 잘난 척을 하자 살짝 놀려 먹고 싶어졌다.

내가 그게 아니라고 하자 황녀 전하의 얼굴은 단번에 일그러졌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렇죠. 제가 전하의 드레스를 지키려 싸운 것처럼 전하도 저를 보호해 주셔야죠. 아까 팔을 붕 하고 날리시는데 제가 어찌나 시원한지! 정말 잘하셨어요, 전하!”

“하……. 이게 아주……!”

“제 말씀은, 아까 대기실에서 카이델 공자를 만났다고요.”

“응? 지배인은 작은 오라버니가 왔다는 말 안 하던데?”

“공자님 혼자 오신 것 같던데요? 사정은 모르겠고, 그냥 마주쳤다고 그 말씀 드리려고요. 그레이언 전하도 이번 파티에 신경 쓰고 계신가 봐요.”

“흐음, 그래?”

황녀 전하는 그렇게 말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카이델 공자와의 만남에 대해 먼저 말한 건 나중을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황녀 전하가 내가 자기 뒤에서 그를 몰래 만나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나는 뚱해진 그녀에게 은근히 다가가 말했다.

“아까 절 감싸 주셔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밀리오라 전하는 내 말에 어깨를 움찔하면서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 전하가 꼭 론드 경처럼 든든했지 뭐예요! 정말 감사드려요, 전하.”

“흥. 당연한 걸 가지고. 넌 날 평소에 뭐로 본 거니?”

“어머, 그러네요. 제가 잘못했어요, 전하. 전하는 원래부터 용감한 분이신걸요.”

나는 그녀의 뺨에 살짝 홍조가 어리는 걸 보았다. 어쩐지 그녀가 자신을 조금 예뻐하는 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 * *

네 번째 경연 문제는 아마도 이번 사신의 방문이 끝나면 공개될 모양이었다. 파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았으니 나는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미샤의 방문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백작님이 보고 싶었다.

내가 백작저로 돌아갔을 때, 내 방은 예전과 다름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테리아 덕이었다.

“로리샤.”

백작님은 내가 인사하러 가기 전에 내 방으로 찾아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당황했지만, 백작님이 나를 그리워했고 걱정했다고 느껴져 싫지는 않았다.

백작님은 나를 놓아주고 토라진 듯 말했다.

“안부 편지 한번 보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니?”

“백작님은 황궁 사정을 다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사실 좋은 소식이 별로 없었잖아요.”

백작님은 침음을 흘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녀장의 매질부터 시작해 내 황궁 생활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가. 백작님도 그걸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거다.

“저, 그래도 그럭저럭해 내고 있어요…….”

“그럭저럭?”

백작님의 목소리가 삐죽 올라가서, 나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누구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었을 거다. 로리샤.”

“……!”

나는 속으로 살포시 욕을 중얼거렸다. 눈물이 핑 돌아서였다.

지금까지 딱히 백작님의 응원이나 인정을 기대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왜 그렇게 내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지…….

내가 결국 돌아서서 눈물을 찍어 내자 백작님은 당황하여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씩 웃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경연이 당분간 중단된 것 같아요. 세 번째 경연은 결과발표도 안 하시고……. 백작님은 들으신 것 없으세요?”

“로리샤. 집에 왔으면 머릿속을 비우거라. 일과 휴식을 구분하는 건 몹시 중요해.”

집.

나는 그 말에 심장이 털컥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일이 예측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또 언제 출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경연이 끝나고 황궁을 나오면, 살 집을 찾아볼까 해요. 황궁에서 받는 급여가 적은 편이 아니더라고요. 시내에 작은 방을 하나 얻은 다음에 가정 교사 자리를 찾아보려고요.”

“…….”

백작님은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렸지만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네 결정이니?”

“아니요. 제 꿈이에요.”

“……야속한 녀석.”

나는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백작님에게 들은 가장 험한 말이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나도 당혹스러웠다.

어른이 혼자 사는 일에 울고 그러는 거 아닌데, 나는 아직 어른이 덜 된 모양이었다.

백작님은 한참 묵묵히 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생각에는 경연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아가엘 사신이 돌아가고 철 생산이 궤도에 오르면 결과발표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저는 어쩐지 폐하께서 시간을 끄신다는 느낌이에요.”

“로리샤. 경연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

“세 번째 경연은 끝나지 않았어.”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님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1685275458252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