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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황녀의 양장점(3) (85/155)


84화. 황녀의 양장점(3)
2023.05.27.


그가 내 성을 발음할 때, 나는 잠깐 숨을 참았다. 거칠게 낮아진 그의 미성은 내 몸 안 어디를 간지럽히듯 야했다.

아아, 인제 보니 미친 건 내 쪽이다. 세상 누구도 아닌 로카르드 카이델을 두고 이런 이상한 기분을 느끼다니, 광기도 옮는 걸까.

나는 목을 한껏 옆으로 돌린 채 침을 꿀꺽 삼키고 겨우 말했다.

“말씀이 너, 너무 솔직하신 것 아닌가요?”

“내 결정은 합리적이었어요. 당신을 완전히 속이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었을 테지만, 유혹은, 이렇게 즐겁고도 도전적이니까.”

“…….”

그는 자신의 광기를 ‘합리’로 합리화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 나도 미칠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 그를 마주 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아, 거 미친 소리 하지 마세요.”

내 욕에 대한 기대로 흥분이 될 정도라면서? 그러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카이델 공자는 내 돌연한 말에 놀라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 입술에 붙박여 있었다.

나는 그가 침을 삼키며 목젖이 크게 움직이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그 합리화에 이게 저를 위한 일이라는 확신까지 들어 있다면, 공자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러자 그가 한 팔을 뻗어 내 어깨 너머 벽을 짚었다. 그의 품에 갇히자 내 사고가 정지했다.

“제가 지금 안 부끄러운 것 같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저렇게 거칠고 당당한 말투로 부끄럽다고 주장하면…….

나는 고개를 한껏 꺾어 눈을 피했지만, 내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가까웠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미쳐 있었다.

“지, 지금 무슨 생각…….”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 맞아요.”

“아우, 진짜!”

나는 그를 밀치고 대기실에서 달아났다.

흘끔 돌아보니 문이 닫히기 직전에 그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는 게 보였다.

* * *

나는 마치 동화 속 괴물의 숲에서 달아나듯이 시착실로 향했다. 심장은 쿵쿵 뛰고, 얼굴은 달아오르고,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똑똑한 사람이 미치면 걷잡을 수 없는 거다. 아깝다. 제국은 아까운 사람을 하나 잃었다!

그런데 시착실로 이어지는 쇼룸에서 갈색 머리의 귀족 영애와 점원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점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건 정말 곤란한 말씀이랍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 드레스는 먼저 오신 손님께서 입어 보시기로 되어 있어요.”

그들이 서로 가져가려고 다투는 드레스는 아까 황녀 전하가 점찍은 것이었다. 저 영애께서는 감히 황녀 전하의 드레스를 채어 가려 하고 있었다.

점원이 황족의 출입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어 ‘먼저 오신 손님’이라고만 하니 당사자는 몰랐겠지만 말이다.

‘허허.’

나는 제발 점원이 이기기를 바라며 더 다가가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귀족 영식 진상에 이어 귀족 영애 진상까지 상대하다가는 나도 자제력을 잃을 것 같아 끼어들기 싫었다.

그녀가 점원을 구슬리는 말투는 차분하고 나긋나긋했지만 티 나게 위압적이었다.

“시착도 하지 않고 바로 가져갈게. 지배인에게 원하는 만큼 웃돈은 붙이라고 해. 자네에게도 팁을 두둑이 줄게.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은 없을 거야. 안 그래?”

누군지 몰라도 돈이 넘쳐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잘못 짚었다.

점원은 몹시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먼저 오신 손님의 선택을 듣자마자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 옷을 어디서 입을지 알아? 나는 타가르를 알현하기로 되어 있어. 먼저 온 손님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그 손님이 나만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해. 안 그래?”

‘댁이 그 타가르의 옷을 가로채려 하는 중인데요.’

나는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때 영애의 하녀가 그 드레스를 옷장에서 빼내려 했다. 점원은 그것을 몸으로 막아선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며 황녀 전하와 지배인이 있는 시착실을 곁눈질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점원이 울거나 드레스를 빼앗기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아. 하는 수 없지.’

나는 그리 다가가 점원에게 말했다.

“다음은 이 드레스 맞죠? 제가 가져갈게요.”

내가 나타나자 점원은 구세주라도 본 듯한 얼굴로 드레스를 얼른 내게 건넸다. 반면 갈색 머리 영애는 얼굴을 굳혔다.

내가 시착실로 몸을 돌렸을 때 무엇이 내 팔을 꽉 붙잡았다.

나는 욕이 튀어나올까 봐 입을 꽉 다물었다.

‘제기랄. 오늘 일진이 왜 이따위지?’

나는 누구 덕분에 이미 기분이 엉망이었다. 싸움은 아예 시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황녀 전하의 주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과감한 영애께서 먼저 내 팔을 잡았다. 나도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었다.

내 황녀 전하가 옷이나 뺏기고 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

나는 얼굴을 펴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내 팔을 붙잡은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그렇게 사나울 수가 없었다.

“나는 칼린 앙카르트예요. 당신은요?”

“저는 로리샤 로아르예요.”

“……황녀 전하의 시녀님?”

“그러면 이 옷이 누가 입으실 옷인지 아시겠군요.”

나는 알았으면 그 손 놓으라는 눈짓을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여유로워진 그녀의 눈빛, 태도는 칼린 앙카르트가 쉽게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앙카르트?’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이 귀에 익었다.

라일리 경매에서 천만 골드짜리 보석을 샀다는 부호 자작가, 그리고…… 미샤.

‘하. 너였니? 미샤를 시녀로 부린다는 아카데미의 깡패가?’

나는 오랜만에 입술에 피가 도는 감각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조져 줘야 하나, 머릿속이 순식간에 깨끗해지며 기분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한쪽 구석에서 이성이 미쳤냐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지금 황녀 전하의 시녀 신분으로 이 가게에 있었다. 그런 내가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언어의 피바다를 일으킨다면 그건 황녀 전하의 신의를 버리는 행동이었다.

‘아우우……! 내가 진짜!’

나는 이를 꽉 물고 일단 이 드레스부터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먼저 시녀의 의무를 다한 다음, 황녀 전하는 혼자 돌아가시게 하는 거다.

그다음에 얘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칼린 앙카르트는 마치 나와 절친한 친구라도 되고 싶다는 태도로 나불거렸다.

“사람들이 당신 이야기를 많이 해요. 사생아로서 황족의 곁을 지키는 영광을 얻었다고. 경연에서도 이미 좋은 결과를 얻으셨다죠? 정말 대단해요!”

정말 웃겼다. 면전에서 웃는 얼굴로 좋은 말에 섞어 사생아라고 말하면, 그게 무례하지 않게 되나?

저걸 칭찬이라고 했다면, 그녀는 사생아에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예의가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도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이 손 놓으시죠. 칼린 앙카르트 양.”

내 싸늘한 말에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기는커녕 더 다가와 나를 압박하듯이 말했다.

“저는 그 드레스가 필요해요. 로리샤 양.”

“황녀 전하께서 다른 드레스를 선택하신다면 당신에게 차례가 올지도 모르겠군요. 어머, 안 되겠다. 전하께서 포기하신다면 제가 사야겠어요. 참 예쁜 드레스죠?”

나는 비열하게 웃었고, 칼린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물론 나는 이 드레스를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칼린은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황녀 전하는 제국에서 손꼽는 미모를 갖고 계세요. 그야말로 무엇을 입어도 아름다우시죠. 하지만 보세요. 저의 이 갈색 곱슬머리와 주근깨 가득한 마른 얼굴을 감당하려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답니다.”

“겸손은 미덕이죠. 당신에게 미덕을 ‘하나’ 발견해서 기뻐요, 앙카르트 양. 그럼 고민이 잘 해결되시기를 바라요.”

내 빈정거림에 칼린의 얼굴은 싸늘하게 차가워졌다.

나는 욕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도 그녀에게 못되게 굴 수 있어서 묵은 체증이 조금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만 시착실로 가려 돌아섰을 때, 칼린이 후다닥 달려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자기가 잡아채 가져온 다른 드레스를 내 팔에 안기려 했다. 점원은 겁을 먹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칼린은 빠르게 말했다.

“황녀 전하는 아까 고른 드레스가 뭔지 기억하지도 못하실 거예요. 드레스가 이렇게 많은걸요? 그러니 이걸 대신 가져가서 드리도록 해요. 이 도움은 절대 잊지 않겠어요. 저는 미샤와도 친하답니다. 아카데미 동기 생도거든요.”

하. 제가 먼저 미샤를 언급하다니.

그런데 호칭이 좀 이상했다. 미샤는 제가 세상 꼭대기에 사는 줄 아는 애였다. 내가 아는 한 양친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자신을 ‘미샤 양’이 아닌 ‘미샤’라고 부르게 두지 않았다.

아무튼 감히 황족을 바보 취급하면서 옷을 가로채려는 칼린의 배포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아니면 광기든지.

‘오늘 또라이들이 줄을 서네.’

칼린은 방금 황녀 전하를 업신여겼다. 나는 이따가 황녀 전하와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미샤도 칼린 앙카르트 양이 아카데미 밖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는 걸 알아요?”

“뭐……. 뭐라고요?”

“먼저 온 사람이 옷을 가진다. 당신은 그 간단한 규칙 어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나는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에서 이런 상식을 안 가르칠 리 없는데?”

“하! 당신, 지금 감히 나를 모욕…….”

“당신은 지금 감히 황족을 능멸했어요. 그분의 시녀 앞에서 그분을 바보 취급하다니, 내가 사생아라는 생각에 집안 하녀에게 하던 대로 거침없이 말한 것일 테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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