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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황녀의 양장점(2) (84/155)


83화. 황녀의 양장점(2)
2023.05.26.


카이델 공자는 내 잇자국이 난 쿠키를 자기 입에 한 번에 털어 넣더니 다시 환하게 웃었다. 내가 턱이 빠질 듯한 얼굴로 자기를 보는 꼴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랬다. 저 인간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그걸 어떻게 즐기는지도 알았다.

재수 없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점이죠. 근무 중에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것 말이에요.”

“…….”

개소리가 참 반들반들하다. 생긴 것만큼이나.

그는 김이 오르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곧 차를 내올 거예요. 이건 이미 마셔 버려 양보해 줄 수가 없네요. 하지만 혹시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공자님, 여기서 뭐 하세요?”

“그레이언 전하의 옷을 찾으러 왔어요. 아가엘 사신의 재방문 소식은 들었습니까?”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은 하인에게 시키는 것 아닌가요?”

“제가 전하께 좀 헌신적이거든요. 그걸 이런 행운으로 보답받다니, 신께 감사드려야겠어요.”

멍멍. 멍멍멍.

“밀리오라 전하께서도 이번 파티에 신경을 쓰고 계시는군요. 그렇죠?”

“밀리오라 전하께서는 이번 협정에 대한 공을 과시할 생각은 절대, 조금도 없으세요. 단지 너무 속상해하고 계셔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모셔 온 거니 오해하지 마세요.”

“흠.”

그의 건성의 추임새는 황녀 전하의 입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게 했다.

파티에 너무 예쁘게 나타나서 눈길을 받아도 자기 공을 주장한다고 오해받을 거고, 적당히 하고 가도 결례를 저지른다고 욕먹을 거다.

하지만 그걸 굳이 카이델 공자가 일깨워 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 나타날 필요도!

“공자님의 계획은 알지만, 절 쫓아다니는 건 포기하세요. 소용없을 거예요.”

“…….”

카이델 공자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꼰 다리를 풀었다. 그의 이마에서 몇 개의 주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몰아붙였다.

“옷 찾으러 온 분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계세요? 안 바쁘신가 봐요?”

“바빠요. 바쁜데 당신을 만나려고 여기서 이렇게 옷을 기다리는 척하는 겁니다. 음, 대략 한 시간 반째요.”

“그…….”

나는 그가 무슨 대답을 하든 쏘아붙이려고 입술 근육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솔직하다 못해 뻔뻔한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말을 하며 천천히 내게로 상체를 기울여 왔고, 그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바짝 가까워지자 목이 타는 듯하며 머릿속이 비었다.

그의 꾹 다물린 입술은 엄청난 감정과 말을 담은 듯이 보였다.

그 안에 든 것이 모두 내 몫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부정적인 의미로 가슴이 터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녀님, 차를 준비해 드릴게요. 좋은 홍차가 들어왔는데 어떠……. 홍차로 준비하겠습니다!”

점원은 미묘한 자세로 있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 나가 버렸다.

나는 그녀를 붙잡을 듯 손을 뻗으려 했으나, 카이델 공자가 너무 가까워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맑은 날 벼락이나 때려 맞을!’

나는 방금 나간 점원을 붙잡아 앉혀 놓고 절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상기된 얼굴로는 의심에 확신만 줄 뿐이었다.

나는 결국 어찔한 기분에 소파 반대편 모서리로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다시 차를 마시며 소리 없이 이죽거렸다.

“과연 좋은 선택이에요. 이 맛의 감동을 당신과 나눌 수 있어서 기쁘군요. 시녀님.”

그의 몸의 거리와 말의 거리가 판이했다.

카이델 공자가 나를 시녀님이라고 거리를 두어 부른 것은 그가 야릇하게 내려 깐 말투 때문에 오히려 끈끈하게 들렸다.

“하아…….”

‘엄마, 나 얘 죽이고 지옥 가면 엄마 못 만나는 거지……?’

그는 퍽이나 우아하게 지껄였다.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이토록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길 줄이야. 당신도 천천히 인정해 주면 좋겠어요.”

“뭘요! 뭘 인정해요?”

“우리가 운명이란 것.”

“운…….”

나는 말문이 턱 막혀서 이를 꽉 물었다. 턱에 힘을 풀었다가는 옛날 실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운명? 개 콧구멍에 쑤셔 넣…….

나는 이를 박박 가는 기분으로 말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실 건가요? 우연인 척 쫓아다니고, 남들 앞에서 다정한 척하고요.”

“로아르 양, 저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진심으로 즐겁답니다.”

“전 아닌데요!”

“코울이라는 과일 먹어 봤어요?”

“지금 과일이…….”

“바다 건너에서 온 과일인데 껍데기와 냄새가 모두 흉측하죠. 처음 본 사람은 그 모양 때문에 이것이 과연 식용인가 의심하게 되지만, 일단 껍질을 열고 과육을 맛보면…….”

그는 나와 맞춘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몹시 매력적으로 빙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외모와 향기 모두 우수한 편이니 좀 더 마음을 열어 보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외, 외모가 우월하다고 스토커가 스토커가 아니게 되지는 않아요. 공자님!”

“스토…….”

카이델 공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는 입을 꾹 다물더니 테이블 위의 찻잔을 쏘아보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나는 겁이 덜컥 났다.

그가 평소에 저렇게 사람 좋게 웃고 다닌다고 착각하면 안 되는데. 그는 해적선도 깨부수는 제국의 새끼 사자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생아인데.

더욱이 그가 여자에게 찬양받는 것 말고 이런 취급을 당해 봤을 리가 없었다.

‘이거 봐, 그쪽이 너무 잘해 주니까 이렇게 실수하잖아!’

나는 오히려 그를 원망하며 소파에서 엉덩이를 슬금슬금 뺐다.

“화, 황녀 전하께서 옷을 다 갈아입어 보셨을 것 같으…….”

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어느 틈에 일어난 그가 내 소파 손잡이에 양팔을 짚어 나를 가두고 있었다.

“로아르 양.”

“네, 네. 공자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향기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볼수록 보는 이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잔뜩 깐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씀이 심하시군요.”

“조, 좀, 그렇죠? 그 부분은 사과드릴게요.”

“진심입니까?”

“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조금 무섭게 변했다.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팔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있었다.

나를 뒤덮듯 상체를 숙이고, 내 눈을 파먹을 듯 강렬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눈이 안 달려서 눈치도 없는 내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살려면 도망가야 해.’와 ‘지금 이 느낌은 뭐지?’가 내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나는 겨우 소리를 쥐어짜 냈다.

“공자님?”

“네.”

“가까워요.”

“…….”

“이 정도면 확실히, 부적절하게 가까워요.”

카이델 공자는 그제야 눈빛이 흔들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대체 얼마나 화가 났으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몹시 겁이 났지만, 지금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앞으로 제국의 미래에 큰 역할을 할 사람이다. 내 입장도 입장이지만, 그의 체면과 평판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것은 나부터 원치 않았다.

“카이델 공자님, 이런 방법은 공자님께 어울리지 않아요.”

“이런 방법?”

“기만이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속는 사람에게 피해가 없다고 다 장난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공자님께서는 지켜야 할 명예가 있는 분이잖아요.”

나는 눈치가 없는 걸까, 겁대가리가 없는 걸까.

차갑게 식어 버린 카이델 공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렇게 의문했다.

“솔직히 말해요?”

그의 질문은 신경질적이다 못해 공격적이었다. 나는 주춤 겁을 먹었다.

그는 다시 내 앞으로 천천히 와서야 입을 열었다. 그가 바짝 다가오자 그의 가슴이 내 시야를 다 가렸다.

“나도 기만이라고 생각했죠. 사람들의 자극적인 관심만 자극하는 눈속임.”

그가 내게로 상체를 숙여 왔다. 키 차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단 시작하고 나니, 지금까지 모르던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저는 놀랍게도 그걸 즐기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까도, 당신에게 이대로 끝까지 다가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기서 멈추라고 자신을 말려야 할 정도였죠.”

‘공자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은 겨우 침을 꼴깍 삼키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솔직해서 어쩌자는 건가. 자기 욕망을 조금도 가리지 않고 덜컥 드러내면은.

이런 건 뻔뻔함도 아니다. 이 인간은 제정신을 공해에 흘리고 온 게 분명했다.

“나는 당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로아르 양. 당신의 작은 입술이 사나운 욕지거리를 뱉고 싶어서 망설이며 달싹거리는 걸 볼 때는 흥분될…… 정도죠.”

그는 자신이 지껄이는 말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잠깐 주저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늘따라 더 짙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광기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별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 거예요. 저는 지금 제 기분에 몹시 솔직해지고 있거든요. ……그건 기분 좋은 일이군요. 로아르, 양.”

설핏 웃은 그가 나직이 덧붙였다.

“이제야 제 기사들이 어째서 쉬는 시간에 여자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당신이…… 내 안의 뭔가를 깨운 것 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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