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황녀의 양장점(1)
(83/155)
82화. 황녀의 양장점(1)
(83/155)
82화. 황녀의 양장점(1)
2023.05.25.
로리샤가 준 충격은 그의 내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남자에게 구애를 받는 게 처음이라더니 이 능수능란함을 보라.
로카르드는 결국 한숨을 쉬며 휘니드의 낡은 의자 등받이에 뒷머리를 얻었다.
그는 이제 로리샤를 미워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만큼 더 인정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을 이토록 긴 시간 점유한 여자는 로리샤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카르드는 자신의 태만함을 자책했다. 로리샤가 그의 목표를 알아 버렸으니, 그녀를 스캔들로 끌어들이기는 더 힘겨워질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녀는 앞으로 밀리오라 황녀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로리샤라는 말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가 그리는 미래는 찾아올 수 없었다.
휘니드는 연신 한숨을 내뱉는 로카르드를 보다 못해 불쑥 물었다.
“세 번째 경연 결과는 나왔나요?”
“아니요.”
“이번에는 폐하의 의중을 알기가 어렵군요.”
“…….”
“로아르 양과 다투기라도 하셨어요?”
로카르드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획 돌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죠?”
“네?”
“어째서 제가 로아르 양 때문에 고심할 거라고 생각하셨냐고요.”
“그거야……. 에이, 뭘 그런 걸 물으세요? 하하.”
하하?
카이델 공자는 휘니드의 묘한 태도를 납득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 최대한 평온하게 물었다.
“꼭 알고 싶은데요. 실장님.”
그러자 휘니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경연 중에 목숨을 걸고 구해 오시고, 꽃도 바치시고, 그녀가 누웠던 자리를 의식하며 한숨만 쉬시고…….”
로카르드는 입꼬리를 바들거리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그레이언의 계획은 퍽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로카르드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주변이 알아서 움직여 주고 있지 않은가.
로카르드는 그런 생각에 이가 악물렸다.
휘니드는 그것도 모르고 떠들었다.
“여자들은 몸이 아프면 예민해지곤 해요. 그럴 때일수록 더 잘해 줘야죠. 로아르 양이 겉으로는 모르는 척해도 속으로는 감동할 거예요.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한답니다.”
휘니드는 아까 로리샤가 날카롭다는 로카르드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남의 연애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는 오해도 하고 있었다.
휘니드 로이만은 연애가 하고 싶으면 몰래 여자를 연성하려 들 자였다. 그런데 지금 누구한테 조언을…….
하지만 로카르드는 휘니드의 부조리한 언행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연애란 결론이 아니다. 유혹으로 시작하여 하나 된 열정으로 끝나는 모든 절차,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부르는 말이었다.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시작일 뿐이야.”
로카르드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2황자궁으로 돌아갔다.
* * *
나는 자리를 털고 몸을 단장했다. 이제는 카이델 공자를 피해 방에 숨어 있는 것이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공격을 피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나는 바로 황녀 전하의 응접실로 갔다. 에리아의 말로는 그녀가 나를 찾아오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니 안심시켜 주어야 했다.
그러나 나를 본 밀리오라 전하는 잔뜩 못마땅하게 말했다.
“너처럼 빈둥거리는 애는 보다보다 처음 본다!”
“죄송해요, 전하.”
“죄송해? 이게 말로 때울 일이니? 누가 네 멋대로 죽을 뻔하래?”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쏘아붙이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자꾸 입가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좀 솔직하게 굴면 안 되는 걸까나.
“하…… 하. 그러게요.”
“카이델 공자에게는 인사했니? 병문안까지 와 줬다며. 그가 은근히 얼마나 비싸게 구는데. 내가 불러도 잘 안 와.”
“그…….”
나는 그제야 그에게 제대로 된 감사를 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내 발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상황은, 아니 ‘우리 상황’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황녀 전하는 그런 내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하기는, 그가 네가 함부로 말 걸 상대는 아니지.”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저도 모르게 힘을 꽉 주고 대답했다.
우리가 서로 함부로 말 걸 수 없는 사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자 밀리오라 전하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폈다.
“너 정말 괜찮은 것 맞아?”
“종종 머리가 멍하긴 한데,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거래요.”
“쓸데라곤 머리밖에 없는 애가 머리를 다치다니.”
내가 별 볼 일 없는 애라는 건 알지만, 너무 대놓고 말하니 기분이 살짝 상했다.
“상태가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가만히 누워 있어. 괜히 돌아다녀서 건강 악화시키지 말고.”
“네. 전하. 그런데 황제궁에서 경연 결과에 대해서는 말씀하셨나요?”
“아니. 아직도 말이 없어. 그레이언 오라버니도 알아본 모양인데, 폐하는 여전히 말씀이 없으셔. 다행이지 뭐야, 네가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어차피 지난번 경연의 승자는 그레이언 전하이실 테니까, 중요한 건 네 번째 경연 문제예요.”
“그렇지?”
그녀는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듯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어차피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 아니냐고 말이다.
“그나저나 곧 파티가 열릴 거야.”
“파티요?”
“아가엘 사신이 제련공들을 데리고 오고 있대. 그 환영 파티야. 그러고 보면 폐하도 참 너그러우셔.”
“진행이 정말 빠르네요.”
하지만 황녀 전하는 대답 대신 나를 민망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너, 나를 원망하니?”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을…….”
“그래도 내가 폐하께 대놓고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철광석 문제가 이렇게 빨리 해결되었겠어? 그러니까 나는 타가르로서 결과적으로 제국의 이익을 도모한 거야. 안 그래?”
“한편으로는 그 말씀이 맞네요.”
“다른 편으로는?”
나는 다친 내 머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렇고요.”
그러자 황녀 전하가 발끈했다.
“역시 원망하네! 흥! 못됐어.”
“그게 아니라…….”
나는 이것이 황녀 전하를 자중하게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반쯤 모험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론드 경의 목숨일지도 모르죠.”
“헉! 너……!”
황녀 전하는 충격을 받아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그 격렬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아차, 론드 경은 건드리지 말걸.
하지만 물러서기에도 뒤늦은 탓에 나는 짐짓 정색하고 말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중하게 처신해 주셔야 해요. 전하. 저희를 생각해서라도요.”
“이제부터……?”
“네. 경연이 언제 끝난다는 말씀은 없었으니까요.”
“알았다니까.”
밀리오라 전하는 새침하게 벽을 흘겨보며 표정을 숨겼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나나 론드경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도자기 인형 같은 옆얼굴이 그렇게 외로워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황녀 전하, 외출하게 마차를 잡을까요?”
“응?”
“파티잖아요. 전하를 예쁘게 꾸며 줄 새 드레스를 맞추셔야죠.”
기죽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던 그녀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 * *
황녀 전하가 애용하는 양장점은 수도 번화에서 살짝 벗어난 거리에 있었다.
허름한 건물에 걸린 작은 나무 간판은 족히 백 년은 되어 보여서, 외관만 보면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냥 지나치고 말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실력 있는 재단사가 대를 이어 운영하며 수십 년째 황족과 고급 귀족들을 휘어잡고 있는 양장점이었다.
“여긴 예약이 필수야.”
밀리오라 전하는 문으로 들어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예약을 하지 않아 당황하자 그녀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거기 나까지 해당될 리가 없잖아.”
과연 그곳 사용인들은 그녀를 보고 일제히 머리를 숙였고, 풍채 좋은 지배인은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도 아름다우신 타가르의 작은 태양 밀리오라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찾으십니까?”
“격식과 위엄이 있으면서 나를 가장 돋보이게 해 줄 드레스.”
나는 속으로 입을 쩍 벌렸다. 과연 저런 설명만으로 원하는 드레스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황녀 전하가 사람 말에 트집을 잡지 않고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모습도 신기했다.
우리를 쇼룸으로 안내한 지배인은 벽면 옷장에 드리워진 두꺼운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수십 벌의 드레스가 그녀의 걸음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격식과 위엄이라 하면 이쪽부터 살펴보시지요, 황녀 전하. 타가르의 고귀한 은발에 어울리는 드레스로는 이것과 이것, 그리고 이것을 추천드립니다.”
나는 황녀 전하가 전에 내 드레스 고르는 안목을 무시한 이유를 완전히 납득했다.
이 옷장의 드레스들은 놀랍게 멋졌고, 지배인이 짚어 준 드레스 세 벌은 처음부터 황녀 전하를 위해 만든 것처럼 그녀와 잘 어울렸다.
그중 한 번에 고르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예쁜 옷을 찾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다 예뻐서였다.
황녀 전하는 만족한 기색으로 첫 번째 드레스와 함께 시착실에 들어갔다. 내가 그 앞 소파에 앉으려 하자 그녀가 발끈했다.
“너는 대기실에 가서 쉬어. 아픈 애가 뭘 일일이 나서?”
“네. 전하.”
나는 어색하게 대답하고는 대기실로 갔다. 황녀 전하는 겨우 시내에 나왔다고 내가 무리해서 어떻게 될까 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내가 손님의 동반인을 위한 대기실로 들어가 일인용 소파에 앉았을 때, 누군가 쿠키를 내 입술 앞에 내밀었다.
“어머, 감사해요.”
무심결에 쿠키를 입으로 받아 오도독 씹은 나는, 가루가 흘러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고장 난 듯 목을 삐걱거리며 옆으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빙긋 웃었다.
“우연이네요.”
“…….”
아아, 카이델 공자님. 나는 당신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욕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