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창문 잠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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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창문 잠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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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창문 잠가 줘
2023.05.23.
앉아서도 누워서도, 밥 먹을 때도 잠들기 직전에도, 나는 카이델 공자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이대로만 말하면 백이면 백 내가 그에게 퐁당 빠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내 머릿속에 가득한 건 그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의구심이었다. 굳이 열정이라고 부를 게 있다면, 빨리 그를 만나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는 열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자신을 억눌렀다.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카이델 공자는 그동안 나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 대부분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시종 메달 사건이나 사냥터에서 나를 구출한 일은 이미 황궁 내에 소문이 파다할 터였다.
심지어 론드 경도 그의 행동을 치하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를 찾아간다면, 그걸로 상황은 끝난다.
‘로카르드랑 로리샤는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그 노래는 툰바르산 아랫마을 꼬맹이들의 저주스러운 목소리로 내 머릿속에 무한 반복 되었다.
아니다. 그건 지나치게 순진한 예측이다.
나는 고개를 팍팍 저었다.
지금 황궁에 퍼진 소문은 카이델 공자가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내용일 것이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결국 머리가…….
그 로카르드 카이델이 사생아 로리샤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나라면 단연코 카이델 공자의 정신 건강을 의심하는 쪽을 선택하겠다.
“끄윽……. 아니야. 가십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나는 즉시 파국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틀었다.
카이델 공자가 보통 인기인가.
사람들은, 특히나 여자들은 제국의 새끼 사자가 미쳐 버렸다는 쪽보다는 야망에 찬 사생아 악녀가 그를 유혹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이 컸다.
얼마나 자극적이고 맛깔나냐고.
나는 창밖 하늘을 바라보며, 촉촉하고 아련한 눈으로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카이델 공자님…….”
‘내가 죽든지 네가 죽든지……. 우린 한 하늘을 지고 살 운명은 아닌가 봐요.’
그 생각은 나를 더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는 내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려 주었고, 자잘한 도움은 기억하기도 벅찼다.
그런 사람이 돈을 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가짜 스캔들 좀 냈다고 뭘 죽기 살기로 따지느냔 말이다.
그가 희대의 유혹녀라고 이름을 붙여 주면, ‘아, 그럴까요?’ 하면서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하고 넙죽 엎드려야지. 그게 사람이지.
“…….”
‘그 인간은 이러려고 그동안 나한테 잘해 줬나?’
그런 생각까지 떠오르자 미칠 것 같았다.
그가 정말로 보고 싶었다. 2황자궁이든 아카데미든 찾아가서 문을 쾅쾅 두들기면서 너 나오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지금은 가만히, 누구의 이목도 끌어서는 안 된다.
나는 돌아 버릴 것 같아 소리 내어 자신을 나무랐다.
“참아, 로리샤. 참으라고. 이럴 땐 몸을 낮추는 거야. 무슨 소문이든 잊힐 때까지 딱 엎드려서 버티는 거야. 너 할 수 있잖아. 그렇지, 로리샤?”
씨X. 왜 눈물이 고이지?
* * *
“시녀님,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으응……. 이상하게 영 기운이 없네. 으슬으슬한 것도 같고, 또 괜찮아졌다가 또 나른하고…….”
“어디 좀 볼게요.”
에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와 자기 이마에 동시에 손바닥을 짚어서 체온을 비교했다. 그리고 갸우뚱거렸다.
“열은 없으신데……. 주방에 말해서 맛난 걸 좀 챙겨와 볼게요.”
“응……. 고마워……. 그때 케이크 맛있더라.”
“그 딸기케이크요? 가져올게요.”
“넉넉하게 가져와. 나눠 먹게…….”
내가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자 그녀가 눈치를 보았다.
“왜에?”
“황녀 전하께서 시녀님을 기다리시는 눈치시더라고요.”
“흐흑.”
내가 갑자기 훌쩍거리자 에리아가 두 손을 마구 저었다.
“아니요! 빨리 일어나시라는 게 아니라 반대예요. 전하께서는 시녀님의 회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아마 시녀님께 너무 미안해서 못 찾아오시는 것 같더라고요.”
“흐흑. 다 내 잘못이야.”
“시, 시녀님. 쉬세요.”
에리아는 겁을 먹고 얼른 나가려 했다. 나는 얼떨결에 버럭 소리쳤다.
“창문!”
“네?”
“창문 잠가 줘, 에리아. 커튼도 쳐 줘!”
“대낮인데요?”
“부탁이야. 아, 눈부셔.”
“정말이세요?”
“응. 정말. 진짜.”
나는 카이델 공자가 내 방에 들어올까 봐 이런 지랄까지 떨어야 했다.
에리아는 이제는 심각한 얼굴로 커튼을 쳐 주고 나갔다. 나는 캄캄한 방 안에서 코를 훌쩍이며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겼다.
대낮에 유령 나오겠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나는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바깥출입을 안 할 생각이었다.
낙마 사고라는 좋은 핑계가 있었으니 그걸 최대한 활용할 계획이었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캄캄한 방 안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있으니 아까보다 더 갑갑하고 우울해졌다.
‘시녀 일 관두고 나갈까? 꼭 귀족가 가정 교사가 될 필요는 없잖아. 부잣집 정도로 눈높이를 낮추면…….’
‘그가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면서 이러는 것, 배은망덕한 건가? 하지만 지금 나쁜 건 카이델 공자 쪽인걸.’
‘카이델 공자님은 어디서 어디까지 진심인 거지……?’
나는 눈물도 안 나오는데 코로 훌쩍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확, 빛이 비쳐 들어서 놀라서 깨어났다.
“우리 로리샤 양은 잠꾸러기군요. 대낮에 커튼을 치고 낮잠을 자다니.”
“악!”
“…….”
“아악!”
“저기…….”
“크흡.”
나는 카이델 공자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에도 또 비명을 질렀다.
세 번째는 겨우 참았지만, 자다 깨서 저런 음모에 가까운 미남을 보는 건 건강과 정서에 매우 해로웠다.
“‘우리’, ‘우리 로리샤’ 양이요?”
카이델 공자는 잠시 미묘한 표정으로 공중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저는 여성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좋은 선생을 갖고 있습니다. 자주 가르침을 청하고 있어요.”
“어떤 미…….”
카이델 공자는 내가 ‘어떤 미친놈이 그래요?’라고 말하려고 했던 걸 고스란히 들어 버린 표정이었다. 정말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다.
“다정한 호칭이 부담스럽다면 안 할게요. 그럼 다른 걸 찾아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우리’에 관해서.”
그는 다정하게 말하며 눈을 휘어 접어 웃었다.
파티에서 저 웃음 한 번에 여자들의 부채질 속도가 일제히 초고속으로 바뀌던 광경을 목격한 나로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이었다.
그 웃음을 왜 나한테 던지는데요?
나는 그를 그렇게 목을 빼고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그가 눈앞에서 저러고 있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와 나를 차례로 가리키며 겨우 말했다.
“이거, 이거요.”
그러자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 손동작을 따라 했다.
“이거?”
“그……. 지난번 말씀하신 거요? 제가 공자님에게 여성이 아니잖아요. 애정 표현이라니, 저는 인류애 이상은 사양할 생각인데, 정확하게 어느 쪽이세요?”
“…….”
카이델 공자는 창으로 가 잠금 고리를 힘주어 열어젖히며 내 쪽을 흘끔 보았다. 그게 단단히 잠겨 있는 게 몹시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다.
그는 창을 활짝 열어 바람이 들어오게 해 둔 다음 내 침대 곁에 앉았다.
공기가 한참 만에 바뀌어 그런지, 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정원의 꽃향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창 너비만큼만 열린 커튼으로 들어온 빛은 하필 그에게만 드리워 있었다.
“로리샤 양의 상태가 괜찮으면 함께 산책을 청할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이걸로 대신하죠.”
“아직, 아직 제 대답에 질문은, 아니, 제 질문에 대답을 안 하셨……. 으으.”
나는 내가 이렇게 버벅거리는 게 더 울화가 치밀었다. 이 로리샤 로아르는 일곱 살 이후 누구에게도 말발로 진 적이 없었단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욕으로 진 적이 없다고 해야 하지만, 아무튼.
게다가 카이델 공자는 이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니 도리어 내가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낮고 느긋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질문, 답을 원해요?”
“네. 원해요! ‘우리 로리샤’는 답을 원해요, 공자님!”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내가 자기 기름진 표현을 따라 했을 때, 카이델 공자는 내면에서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느라 턱을 움찔거렸다.
“하! 그럼 그렇지!”
그 순간을 포착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감당도 못 하면서, 어디서 수작이야!
나는 침대 끝으로 다가가 앉아 그를 향해 상체를 디밀었다.
“이 연극, 뭘 위한 거죠? 그것만 답해 주시면 돼요. 애칭이니 뭐니 하는 발상이 누구 대가,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묻지도 않을게요. 약속해요!”
“…….”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공자님? ‘귀염둥이 로리샤’는 대답을 원한다고요! 제국 최고의 명문 카이델가의 후계자께서 이런 일을 벌이시는 이유를요.”
카이델 공자는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그의 목젖이 크게 움직이는 걸 잠깐 홀린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뭐 하러 목까지 잘생긴 건지!
“대답 안 하시면 앞으로 잠기는 건 저 창문만이 아닐 거예요. 공자님!”
“그건 말 못 해요.”
“말씀하세요.”
“내게서는 대답을 못 들을 거예요.”
“그럼 어떤 대답을 하실 수 있죠?”
“글쎄.”
“공자님은 제가 황궁에서 쫓겨나기를 원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