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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혹시 전하 곁을 떠날 생각이시오? (80/155)


79화. 혹시 전하 곁을 떠날 생각이시오?
2023.05.22.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써서 그를 그만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랬다가 그가 또 걷어 내면 그 민망함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불 귀퉁이를 곁눈질하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혀를 쯧 차며 이불을 당겨 내 배까지 덮어 주었다.

그는 내게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이 큰 부상에서 회복 중인 건 알지만 조금은 더 집중해 줬으면 좋겠어요. 로리샤 양.”

“…….”

“이것 봐요. 로리샤 양이라고 부르니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건 이 정도입니다. 당신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2황자궁으로 하녀를 보내세요. 이런!”

그가 놀라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어깨를 움찔했다.

“방학이 끝나 기숙사로 돌아가면 연락이 오래 걸리겠군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황궁에서 등교하는 걸로 조정해 볼게요.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세상에 남은 인간이 나 하나뿐이라는 듯 내 눈을 들여다보며 지껄이고 있었다.

그는 왜 저렇게까지 생겼을까.

목소리는 왜 미성인지.

나는 뇌가 녹아내리고, 귀에서 피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개학하면 몹시 바쁠 겁니다. 그러니 방학의 여유를 더욱 소중히 즐기겠어요. 시내를 벗어나면 작은 호수가 있는 걸 압니까? 당신을 내 앞에 말에 태우고 거기…….”

나는 배에 힘을 바짝 준 다음, 있는 힘껏 고함쳤다.

“에리아아!”

“네에, 시녀님! 무슨 일이세요? 괜찮으세요?”

에리아는 놀라 뛰어 들어왔고, 카이델 공자도 그녀만큼이나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까부터 노리던 이불 모서리를 획 잡아채 뒤집어쓰고 누웠다. 이불 전체가 붕 떠오를 정도였다.

그러자 에리아가 몹시 당황하여 말했다.

“시, 시녀님이 몸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카이델 공자님.”

“그렇군. 몹시 아쉽지만 오늘은 일어나지. 에리아라 했나?”

“네! 카이델 공자님.”

“우리 로리샤 양을 잘 부탁해. 내일 그녀가 먹을 약은 내가 약제실에서 타 올 테니 걱정 말고.”

“네…… 에?”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에리아를 무시하고 돌아갔다.

에리아가 ‘시녀니임.’ 하고 조그맣게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미친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우리 로리샤 양’?’

나는 이불 속에서 격하게 꿈틀거리는 와중에도 에리아가 궁금해서 미치려 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마지못해 돌아가는 발걸음도.

* * *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나는 카이델 공자가 돌아간 직후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잠이 들었다.

깨어서 이불을 걷었을 땐 창밖으로 해가 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저 창은 열려 있겠지……. 카이델 공자가 열어 놓으라고 한 대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가락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아까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물밀듯 몰려 들어왔다.

‘공자님,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그러니까, 그, 여자로…….’

‘그걸 아직 몰랐던 겁니까?’

“어억…….”

나는 저도 모르게 밭은 숨을 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카이델 공자가 미쳤다.

폐하의 의중도 알 수 없고, 내가 살아난 데 대한 오를 전하 반응도, 다음 경연의 흐름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카이델 공자가 미쳤다.

아니, 로카르드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내 허탈한 심정을 대변하듯, 창밖으로 멀리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내가 죽을 뻔한 걸 보고 내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뭔 개소리야. 내가 죽을 뻔한 게 이번만이냐고.

이상하고,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아까는 잠에서 깨자마자 그가 몰아닥쳐 정신이 없었는데, 한숨 자고 나니 머릿속이 훨씬 명확해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들이대나? 카이델가의 구애는 그런 식인가?

아니다. 아닐 거다.

그가 나의 죽음에 관해서 말했을 때, 나는 그것이 진심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발만 물러나서 보면 그의 행동은 전체적으로 어긋나 있었다.

그가 다양한 광기의 소질을 가졌다고 치더라도, 이런 종류의 광기가 존재한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를 유혹해? 왜? 뭐 하러?’

그때 내 머리에 몇 가지 생각이 스쳤다.

“헉…….”

그때 내가 서 있었다면, 나는 분명 눈앞이 아득해서 엎어졌을 거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 침대 안에 곱게 누워 있었다.

나는 어찔한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이를 벅벅 갈았다.

“로카르드. 카이델. 내 가만두나 봐라.”

그때 에리아가 론드 경의 방문을 알렸다.

그는 방에 들어오며 반색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중 가장 강렬한 감정 표현이었다.

“시녀님, 무사하여 다행이오. 걱정했어요.”

“걱정하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그런데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려 섰다.

“죄송하다니, 내가 시녀님을 지켰어야 하는데…….”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경은 전하를 지키셔야죠. 저도 그래야 하고요. 만약에 그때 저를 신경 쓰다가 전하가 위험에 노출되셨다면 어쩌시려고요?”

나는 의도한 것보다 더 흥분해서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론드 경은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시녀님.”

나는 오를 전하에 대해서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을 섞어 물었다.

“그때 갑자기 말이 날뛰는 바람에……. 그 뒤로 기억이 없어요. 당시 상황을 좀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여우가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을 알고 나는 황녀 전하를 이끌어 자리를 피했소. 시녀님이 승마에 능숙하기에 당연히 뒤따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비명이 들리기에 황녀 전하를 안전한 곳에 숨겨 드리고 시녀님께 돌아갔소.”

“그랬더니요?”

“카이델 공자께서 정신을 잃은 시녀님을 안고 말에 태워 떠나고 있었어요. 돌연한 이탈에 그레이언 전하께서 화가 나 고함을 치셨소.”

“…….”

“그분이 그러지 않았다면 시녀님이 죽었을 거라더군요.”

“경도 들으셨군요.”

나는 기가 죽어 시선을 떨궜다.

론드 경의 말대로라면 그레이언 전하는 카이델 공자가 사냥터를 이탈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나를 구한 건 카이델 공자의 선택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순수한 선의였을까?

나는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몹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이델 공자님의 행동을요…….”

그러자 론드 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무겁게 말했다.

“나는 그분에게 호감이랄 것은 없습니다만, 그가 사람을 살리는 데 집착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비난 같은 칭찬, 혹은 인정이었다. 그가 차라리 욕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혼란스러운 가운데 슬슬 부아가 났다.

그러니까 로카르드 카이델은 퍽 괜찮은 사람인데, 어쩐지 나를 기만하려 들고 있다. 나한테만 나쁜 놈이 되려는 중이라는 거다.

“그를 편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는 경합 중에 주군을 내팽개치고 당신을 구했어요. 기사인 자에게 그것은 시녀님의 생각보다 훨씬 큰일입니다.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게 좋을 겁니다.”

카이델 공자를 원수같이 여기는 론드 경도 이미 그에게 홀딱 넘어갔다. 나 빼고 모두 그 음험한 미남자에게 속고 있었다!

땅이 꺼지라고 한숨이 나왔다.

“하아…….”

“로아르 양, 괜찮으시오?”

“네? 네. 그럼요. 그럼요. 의사가 잘 안정하기만 하면 곧 회복할 거래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오만.”

그야 전혀 안 괜찮으니까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서요.”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해요.”

“경은 사냥 후유증은 없으세요?”

그러자 그가 웃으며 끄덕였다. 건강을 되찾은 것을 확인하여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도 그 사실이 반가웠지만, 동시에 론드 경이 우리 곁을 떠나려나 싶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기사단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는 황녀 전하를 제대로 지켜 드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소.”

어머나.

뜻밖의 대답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머쓱하게 말했다.

“시녀님이 사고를 당한 걸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그러게요. 저도 그래요.’

“시녀님 혹시, 전하 곁을 떠날 생각이시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아니요! 설마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내게는 지금 닥친 것과 같은 종류의 문제를 상의할 남자가 없다. 백작님에게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로이만 실장님은 평생 여자 손목도 못 잡아 봤을 것 같고.

남은 건 론드 경뿐인데, 내 눈앞의 이 거대한 남자는 자기 마음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황녀 전하를 아끼고 있었다.

하기는 같은 남자라고 해서 카이델 공자처럼 두뇌 회전이 현란한 자의 속을 그가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고개만 붕붕 저었다.

“앞으로의 경연 예측이 어려워서 그래요. 생각이 많아져서요.”

“그럴 만도 하지요. 혹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말씀하시오. 예전 기량을 되찾아 가니, 이제는 나를 의지해도 됩니다.”

론드 경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나는 이미 그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묻지 않은 말도 먼저 하고 말이다.

그동안 그의 과묵함과 단절감이 그의 자격지심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지만, 어쨌건 그는 이제 자신감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내 사고가 여러 사람을 변화시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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