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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기묘한 스캔들(3) (79/155)


78화. 기묘한 스캔들(3)
2023.05.21.


오늘 그는 평소 볼 수 없었던 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딘지 기이하고 고약한 기운 가운데, 그 사고에 대한 분노만은 생생한 진심처럼 느껴졌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나직이 단언했다.

“당신은 아직 죽어선 안 됩니다.”

“…….”

“아주 오랫동안, 지금처럼 강인하게 살아남아야 해요.”

건강에 대한 기원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강요처럼 들릴 수도 있는 건지.

“로리샤 양.”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강렬한 빛을 숨긴 그의 눈빛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하긴 뭐 그렇게 대단한 이름이라고,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사람에게 이름도 내어주지 못한다고 버틴다면 내가 나쁜 거다.

이 정도 상황이면 그가 나를 말랑말랑콩떡이라고 불러도 그러라고 놓아두어야 할 판인데.

이 방 안의 공기에 슬슬 숨 막혔다. 그래서 화제를 바꾸려 했다.

“저기,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요. 앞으로 경연에서 좀 더…….”

그는 얼굴을 순식간에 차분하고 온화하게 바꾸더니 내 말을 잘랐다.

“로리샤 양. 앞으로 당신은 더는 실수해서는 안 돼요. 당신에게 다음번이란 없을 테니까.”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제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아시는 건가요?”

“봤어요.”

순간 긴장이 풀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늘어졌다.

이제부터 그와의 대화는 수월해지겠지만, 나는 어쩐지 더 혼란스러웠다. 평소처럼 생각이 물 흐르듯 연결되지 않았다.

역시 머리를 다쳐서인가.

나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는 황녀 전하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어요.”

“나만 믿어요.”

“……공자님?”

과거를 되짚어 보면, 나는 카이델 공자와 대화에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처럼 척 하면 착 하고 알아듣는 상대를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얄밉고 재수 없다는 부분은 별개로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렇지 않았다. 마치 불빛이 깜빡이듯이, 내가 알던 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깜빡깜빡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걸까…….

나는 스스로를 걱정하며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밀리오라 전하와 그레이언 전하는 경쟁자이신데 공자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건 성립하기 어려운 말이지 않겠어요. 저는 단지 간단한 조언을 부탁드리려는 거예요.”

“난 아닌데.”

카이델 공자는 상체를 들어 등받이 깊이 기댔다.

그의 살짝 일그러진 눈썹에는 짜증과 당혹이 동시에 걸려 있었다. 얼핏 보면 살짝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오늘 그의 말이 자주 짧다. 또 질척거린다.

게다가 저 접착제 같은 시선은 뭐지……?

나는 당황해서 대꾸했다.

“이해, 이해해요. 상황이 이러니 공자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저와 거리를 벌리셔야죠. 제가 생각이 짧아 실례했어요, 카이델 공자님.”

“로카르드.”

“네?”

“이름에는 이름. 실례는 그 부분이군요.”

‘음……. 나는 그때 황궁 사냥터에서 죽었는지도 몰라.’

여기는 지옥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가 나를 향해 ‘그런 신호’를 보내는 상황이 얼어붙은 지옥 말고 또 어디서 일어나겠는가.

그때 그가 말했다.

“로리샤 양. 나는 많은 죽음을 봤습니다. 내 나이의 남자 중에 나와 내 전우들만큼 많은 죽음을 본 자는 없을 겁니다.”

나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죽음은 사람에게 흔적을 남겨요. 매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죽음은 단연코 더.”

“공자님…….”

“어제 당신도 내게 그런 흔적을 남길 뻔했죠. 나는 거기 화가 나고 조금은 혼란스러운 상태예요. 당신과 마주한 지금, 그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겠군요.”

나는 그의 강렬한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으로 말을 잃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는 정말로 내 죽음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딘지 충분하지 않은 설명이었다.

오늘 내 머리는 평소보다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느낌만으로 감히 말하자면, 나는 마치 그가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친 기분이 되었다는 것부터가, 이게 미친 생각이라는 증거였다.

나는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된 걸 깨닫고 다시 한번 혼란을 느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설핏 웃었는데, 고개를 살짝 돌려 턱선이 한껏 노출된 상태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의 웃음은 가공할 것이었다.

‘설마, 지금 자기한테 반하라고 저러는 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사고 능력을 신뢰할 수 없었기에, 더 버티기를 포기하고 지껄였다.

“공자님,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그러니까, 그, 여자로…….”

뱉고 나니 숨은 쉴 것 같았지만 내 속은 말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꽉 감고 입을 앙다물었다. 그의 폭소를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귓바퀴에도 근육이 있었다면 귀도 딱 닫았을 테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방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

나는 결국 눈을 질끈 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살짝 격앙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그걸 아직 몰랐던 겁니까?”

나는 내가 방금 뭘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멍청히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웃음을 터트릴 차례인 모양이었다. 제국 제일의 인기남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가 나를 유혹하는 중이었다니.

그를 욕심 내는 영애들을 한 줄로 세우면 여기서 나 살던 툰바르산 아랫마을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런 남자가 나를?

나는 결국 웃지 못했고, 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떠도는 눈동자를 어쩌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의 덜컹거리는 감정의 기복, 그럼에도 모든 걸 정해 놓은 듯이 밀어붙이는 태도, 모든 것이 서로 어긋나 삐걱거렸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여자에게 구애하는 것 처음이시죠?”

“그러는 로리샤 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 말고 남자 또 있어요?”

“예? 남자라니, 아니, ‘나 말고’라니…….”

이건 나한테 딴 놈이 없으면 당연히 자기가 내 남자라는 화법이잖아!

“대답해요.”

“없, 없긴 한데…….”

나는 내가 왜 대답을 하고 앉았는지 허망하여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도 방금 말이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를 외면한 채 서로 다른 벽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드러누우며 이불을 느릿하게 당겨 머리 위까지 덮었다.

‘엄마……. 여긴 어딜까? 엄마는 알아?’

“엄마야!”

갑자기 내 이불이 확 걷히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카이델 공자는 몹시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사람이 중요한 말을 하면 좀 진지하게 들어요!”

“제가, 안 진지해 보이세요?”

“당황하게 한 건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다시 어떤 사고에 말려들기 전에 말하려면 지금뿐이지 않습니까.”

하기는, 나는 제국의 1황자에게 노려지는 몸이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들은 빨리빨리 와야 할 거다.

“그, 그 부분에는 딱히 반론하기 힘드네요.”

“좋아요. 그럼 다음 부분에도 동의해 봐요. 저는 앞으로 당신을 애칭으로 부를 겁니다. 몇 가지 안이 있지만, 중요한 건 당신 의견이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요.”

“저기, 지금 뭐…….”

“그리고 앞으로 창문은 잠그지 말아요. 기껏 벽을 타고 올라왔는데 창이 잠겨 있으면 기분이…… 꽤 더럽습니다. 당신을 비난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요.”

하! 그새 또 내 방에 몰래 들어오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저렇게 진지하고 진실한 표정으로 저딴 소리를 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가끔은 당신이 나를 만나러 나와 줘도 좋겠습니다. 몰래 숨어드는 것도 잦으면 들킬 위험이 커지니…….”

나는 멍한 상태에서 그가 도마뱀처럼 벽을 타는 꼴을 상상하고 말았다.

완벽한 이미지의 제국 대표 미남이 그런 꼴을 황궁 하인들에게 들킨다면……. 암, 그건 사람으로서 못 할 짓이다.

그는 나를 망상의 낭떠러지로 밀어 놓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내 애칭도 정하고 싶으면 좋을 대로 해요. 하지만 되도록 사람들 앞에서는 안 썼으면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그런 면에서는 좀 보수적인 사람이더군요.”

음. 그걸 ‘아무리 생각’해 봤구나.

“공자님…….”

“물론 둘이 있을 때는 마음대로 불러요. 욕을 해도 상관없어요. 사실 그때 배에서 당신이 갈바인의 욕을 듣고 얼마나 감탄하는지 봤습니다. 취향이라면 존중하죠.”

내가 줄리아 선생님 이후 처음으로 선생으로 모시고 싶었던 그 선원의 이름이 갈바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공자님은 지금 중요한 게 그거라고 생각하시는지?

무엇보다, 어째서 저런 인간이 제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는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작 그런 데 가겠다고 인생을 걸고 치열하게 공부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미샤도 거기 가더니 애가 확 달라졌다. 아카데미는 수상쩍은 곳이 틀림없었다.

이건 백작님과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분은 아카데미 운영에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황궁에 들어온 후 두들겨 맞고 다치면서도 휴가를 낸 적이 없었다. 잠시 휴가를 얻어서 별장에 가 있고 싶었다.

모리아가 만들어 주는 소갈비 요리를 먹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 경연은 언제 시작되는 거지?

나는 나불거리기를 멈추지 않는 카이델 공자의 살짝 얇은 입술이 퍽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참 구석구석 여자들이 좋아하게 생기긴 했다. 이렇게 사람 괴롭히는 데 도가 튼 인간이.

그나저나, 욕이 취향이냐고? 진담이야?

“로리샤 양?”

“응? 네? 왜요?”

“방금 제 말 들었습니까?”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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