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기묘한 스캔들(2)
(78/155)
77화. 기묘한 스캔들(2)
(78/155)
77화. 기묘한 스캔들(2)
2023.05.20.
이런 농간은 그녀가 다시는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를 믿지 못하게 만들 위험마저 있었다.
그런 위험 부담을 진 채 시작하려는 이 연극이 과연 그와 그녀의 이익에 부합하는 게 확실한지, 그는 내심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몇 시간 째 잠든 그녀를 들여다보며 그녀를 유혹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로카르드는 불명확한 감정과 충동이 자신의 이성보다 한발 앞서가는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다.
‘무슨 연극이……. 과연 연극이 맞기는 하는지.’
그는 자기 안에 문득 떠오른 생각에 놀라 몸을 폈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휘니드가 카이델 공자가 정말 이상해졌다고 걱정하고 있을 때, 로카르드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손에 막 꺾은 장미꽃 다발을 들고 있었다.
로카르드는 그걸 휘니드의 실험용 플라스크에 꽂아 로리샤의 머리맡에 놓고서 돌아갔다.
입을 쩍 벌리고 선 휘니드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 * *
로이만 실장님의 말로는 내가 죽을 뻔했다고 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쳤는데, 이삼일 안에 깨어나지 못하면 가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틀 만에 깨어났으니 얼마나 대견하냐고 나를 아이 취급하기까지 했다.
“너무 감사드려요, 실장님.”
“감사할 사람은 따로 있지요. 로아르 양.”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내 침대 협탁에 놓인 꽃병을 바라보았다. 거기 꽂힌 장미는 황궁 정원에서 꺾은 게 분명했다.
“어쩌면 좋아. 론드 경께 꼭 감사 인사드릴게요.”
“어……. 어……. 그…….”
실장님도 론드 경이 생색내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로이만 실장님이 고장 난 모습을 처음 보고 웃으며 말했다.
“목숨을 구해 주신 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요. 론드 경을 민망하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게, 로아르 양을 구해 준 사람은 론드 경이 아닙니다. 저는 이만!”
실장님은 다급히 돌아가 버렸다.
“실장님? 실장님!”
나는 어이없이 꽃병을 바라보았다. 꽃의 색상과 구도를 잡은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걸 보니 론드 경이 채집(?)해 온 꽃을 에리아가 정리해 꽂아 준 것 같았다.
꽃병을 보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 파란 많은 사생아 인생에, 그래도 나를 대가 없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론드 경도, 로이만 실장님도. 굳이 언급해야 한다면 카이델 공자도.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감에,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꽃을 감상했다.
‘엄마, 나 아직 안 죽었어. 엄마 딸은 아직 씩씩하다고.’
하지만 황궁 숲에서의 오를 전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히 나를 의도적으로 공격했다. 숲에 숨어 체력을 아끼다가, 여우 대신 나를 사냥한 것이다.
황위를 이을지도 모르는 자가 그런 비열한 짓이나 하다니.
차라리 범인이 누군지 몰랐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를 전하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꺼져.’
그에게는 내 목숨이 중요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나에게라기보다 두 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밀리오라 전하에게는 더 이상 경연에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를, 그레이언 전하에게는 이제부터 둘이서 제대로 붙어 보자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눈치도 없이 살아나 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리 어렵기만 하지 않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어렵다는 말은 사실 행동하는 사람들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눕고 나니 와락,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꼭 당겨 덮자 온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지만, 신음을 흘릴 수도 없었다.
내가 느끼는 공포는 오를 전하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
그분은 세 번째 경연에서 과연 무엇을 원했던 걸까?
오를 전하의 돌발 행동이 없었다면, 그 사냥은 어떻게 끝났을까.
폐하는 형제들을 제 손으로 제거하고 제위에 올랐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똑같은 통과 의례를 원했다고 한다면, 나는 황가에 대한 모든 애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이 상황에서 쥐어짜 낼 수 있는 희망적인 가정은 이것이었다.
황제 폐하는 그 숲에 자기 자식들을 풀어놓고서 그들의 성정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황자녀들이 충분히 잔혹하고 포악하다면, 혹은 선대의 잔혹사를 도리어 전범으로 삼고 있었다면, 그들은 이 숲에서 하나만 살아서 나가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폐하는 남의 눈이 없는 통제된 상황에서 자식들의 인성을 확인하려는 모험을 감행했고, 지금은 그 사냥에서 죽은 것이 여우 세 마리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가 그 진실을 알 기회는 없겠지만.
나는 지금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황가의 서고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쯤엔 황제 폐하의 일기도 거기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나는 마음 깊이 괴로워하며 카이델 공자를 떠올렸다. 지금 상황에서 다음 경연에 관해 상의할 사람은 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늘 나를 구해 주는 눈엣가시 같은 인간 말이다.
조금 있으니 에리아가 의사와 함께 들어왔다. 의사는 내 팔다리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지, 사지의 감각은 멀쩡한지 확인하고 돌아갔다.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시녀님.”
나는 의사의 말에 완전히 안도했다. 이제는 약도 달게 느껴졌다.
‘론드 경은 안 오시나…….’
나는 은연중에 론드 경이 나를 구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론드 경이 아니라니, 약을 타러 간 에리아가 돌아오면 그것부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누가 방문을 두드리기에, 나는 반가워서 얼른 대답했다.
“들어와.”
그런데 방문을 연 사람은 에리아가 아니라 카이델 공자였다.
황녀궁에 드는 남성 방문객은 퍽 번잡한 절차를 거친다. 그도 그게 싫어서 창을 넘어오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그걸 감수하고 정식으로 방문하다니 뜻밖이었다.
“흠흠. 로아르 양.”
그는 주먹을 입에 대고 작위적으로 헛기침하더니, 등 뒤에서 꽃다발을 꺼냈다. 그리고 내 꽃병에서 꽃을 꺼내고 그걸로 바꿔 넣었다.
꽃의 배색이 기가 막힌…….
‘에리아가 다듬어 준 게 아니었어? 카이델 공자의 작품이라고?’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휩싸는 불길한 예감에, 피부가 바싹 건조해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여전히 내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카이델 공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너 지금 뭐 하세요……?’
“로리샤 양. 이젠 그렇게 부를게요.”
“……?”
말에서 떨어진 건 나인데 왜 미친 건 카이델 공자인지, 나는 의아해했다.
머리를 다친 탓인지, 내 기억은 느리게 떠올랐다.
‘아. 그레이언 전하가 미친놈 이랬었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짧게 저었다.
“싫어요. 공자님.”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딱 정지했다.
그는 잠시 후 눈을 깜빡이더니 내 침대 곁에 앉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몸을 살짝 돌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지독히 매력적으로.
“…….”
지금 내 표정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일지가 스치듯 자각되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웃음에 잠깐 숨을 멈췄던 게 사실이다. 심장이 쿵 하고 울리는 듯싶어서.
하지만 사람을 본능적인 반응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독이 든 케이크도 달콤하다며 먹는 것이 사람이니까 말이다.
카이델 공자의 탁월한 외모나 매력적인 아우라에 대해서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그가 그걸 내 앞에서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짙은 향기를 뿜는 싱싱한 장미와 그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카이델 공자님?”
대답 대신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입술을 느긋하게 움직여 말했다.
“말해요.”
그……. 목소리는 왜 진중해지셨는지…….
“괜찮으세요?”
나는 순간 카이델 공자의 눈가에 약하고 짧은 경련이 스쳤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잖아요. 당신은 괜찮습니까?”
“의사가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고 했어요. 제가 좀 쓸데없이 튼튼한 편이라서요.”
“쓸데없다니요. 그것은 축복입니다.”
“저기…….”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괜찮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는 다시 괜찮다고 말할 것이고, 우리 대화는 빙빙 돌 것이 뻔했다.
“오늘 좀 다르시네요.”
“다르니까요. 내 마음, 정신. 모두가.”
“어떻게, 다르신데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갑자기 내게로 상체를 숙여 왔다. 마치 은밀한 말을 전하려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어떤 것 같아요?”
이 자식이 진짜!
나는 짜증을 짓누르며 겨우 침착하게 물었다.
“혹시 공자님께서 절 구해 주셨나요? ……또요?”
하지만 내 ‘또요?’에 담긴 배은망덕한 불만은 숨겨지지 않았다.
카이델 공자는 마치 내 반응이 가슴이 아프다는 듯 눈썹을 살짝 기울였다가 끄덕였다.
“그래요.”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풀썩 드러누웠다. 그러고 나서야 그의 시선이 의식되어 이불을 슬금슬금 당겨 덮었다.
“숲에서 비명이 들렸을 때, 나는 즉시 그게 당신인 걸 알았어요. 그리고……, 당신은 죽을 뻔했어요.”
카이델 공자의 목소리는 무겁고 습했다. 죽을 뻔한 건 나인데, 내가 그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푹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폐를 끼쳤어요.”
“폐라고 했습니까?”
카이델 공자의 목소리가 삐죽 거칠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