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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기묘한 스캔들(1) (77/155)


76화. 기묘한 스캔들(1)
2023.05.19.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를 달래야 하는 순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알면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도 늘 계산에 의해 행동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타가르의 고고한 오만함만큼이나, 카이델의 고집과 자존심도 비대했다.

“그리 생각하시다니 유감입니다. 전하. 전하께서 오를 전하 정도는 가볍게 제압하시리라는 저의 믿음이 전하의 불신을 얻는 이유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

그레이언은 로카르드의 멱살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로카르드를 쏘아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말해. 너, 로리샤 로아르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마당에 묻어 놓은 술.”

“……뭐라고?”

“시간이 충분히 지나기만 한다면 다른 무엇과도 다른 향취를 낼 술이요. 날개를 달아 주기만 하면, 로리샤 로아르는 전하와 제가 상상도 못 할 일을 해낼지도 모릅니다. 정무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가 철광석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셨지 않습니까.”

“그녀는…….”

“네. 사생아죠. 하지만 전하께서는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세 번째 사자를 판박이처럼 빼닮은 딸은 적녀가 아니라 그녀입니다. 그 신중한 분이 자신의 치부인 사생아를 황궁에 들여보냈을 땐, 이기는 도박이라고 믿은 겁니다.”

“로이만 실장이 말하길 네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녀는 죽었을 거라더군.”

“그러면 제 행동을 이해하시겠군요.”

“웃기지 마. 로카르드. 네 행동은 계집에게 반한 사내의 그것일 뿐이야.”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을 빤히 보며 거만한 실소를 흘렸다.

“저 로카르드 카이델입니다. 전하.”

허영 가득한 대꾸에, 이번에는 그레이언이 헛웃음을 지었다.

“시종의 메달은 어째서 양보했지? 밀리오라의 티 파티에는 왜 가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그녀에게 빚을 지우는 중입니다. 언젠가는 그녀를 제 사람으로 쓸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그레이언은 로카르드의 코앞까지 다가와 말했다.

“나에겐 네가 있어. 나는 로카르드 카이델이 둘이나 필요 없단 말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를 형님이나 밀리오라가 그들의 로카르드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야.”

로카르드의 시선이 한층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그토록 인정해 주실 줄 몰랐습니다.”

“그래. 너를 이만큼 홀려 놓은 걸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로카르드. 이건 모두 네 책임이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레이언은 눈가를 기묘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녀를 유혹해. 공개적으로. 네가 경연 도중에 그녀를 안고 달려왔다는 사실은 곧 소문이 날 테니 어렵지 않겠지.”

로카르드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전하?”

“의심 많은 밀리오라가 그 꼴을 보고도 그녀를 곁에 둘 리 없지. 그러면 밀리오라는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거야.”

“……비열한 방법이군요.”

“자비롭지.”

죽이지도, 파멸시키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다 경연 자체가 부정당하면요?”

“이미 그럴 시점은 넘어섰다고 봐야 해. 이제부터는 형님과 나의 싸움이다. 밀리오라 따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어.”

그레이언의 눈은 잔인한 투지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전쟁이 그라는 인간의 내면에 다져 놓은 결기였다.

그러나 로카르드의 대꾸는 가볍고도 단호했다.

“싫습니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던 그레이언은 놀라 천천히 입을 벌렸다.

로카르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옅은 미소가 밴 얼굴이 참으로 태연했다.

“지금 전하의 명령은 그녀의 인생 전체를 시궁창에 처박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러지 않고도 전하를 황태자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전하.”

그레이언은 로카르드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지독한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이면, 로카르드는 딱 저런 얼굴로 병영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다음 날 더블릿이 피에 푹 젖도록 전장을 휘젓고 다녔다.

그래서 그는 로카르드가 저렇게 번뜩이는 눈으로 부드럽게 웃을 때면 옅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충성과 가문의 이득이라는 속박이 없다면, 로카르드는 바로 저 얼굴로 그의 목을 조를 수도 있는 자였다. 그레이언은 그렇게 믿었다.

결국 그는 이를 갈 듯 나직이 말했다.

“경연이 끝나면 그녀를 내 시녀로 들이겠어. 황태자의 시녀란 사생아로서 오를 수 없는 지위지.”

그러나 로카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발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작위를 주세요.”

“로카르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그레이언에게, 로카르드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지껄였다.

“부디 그 사생아에게 작위를 하나 내려 주세요. 그녀가 평생 유유자적하며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미쳤어?”

“그리하시면 제가 그녀를 유혹해 보겠습니다. ‘이’ 얼굴로요.”

로카르드는 자기 턱을 엄지와 검지 사이로 받치고 매력적으로 웃었다.

“어디 한번 타가르 제국의 바람둥이가 되어 볼게요.”

“하…….”

그레이언은 진심으로 로카르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새끼 사자는 지금 진지했다.

다행히 그녀는 로아르가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준남작 위 하나쯤 쥐여 주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로카르드의 발목에 더 단단한 족쇄를 채워 놓을 수 있다면, 이것은 거절해서는 안 되는 거래였다.

“약속하지.”

그레이언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카르드는 허리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절대 제게 넘어오지 않을 겁니다.”

“뭐가 어째?”

“하지만 그녀는 밀리오라 전하의 신뢰를 잃게 될 겁니다. 제국 사교계에는 가십이 흘러넘칠 거고요. 그건 약속드리죠.”

“이 미친놈이!”

“오랜만에 듣네요. 그럼 이 미친놈은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잠자리에서 떠올려야 할 연인이 생겼거든요.”

로카르드는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가 버렸다.

로카르드의 유들거리는 웃음을 보고 나니, 그레이언은 혹시나 자신이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 것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그녀에게 시녀 자리를 약속하고, 작위를 약속하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앞으로 밀리오라라는 변수 없이 경연을 진행할 수 있다면, 그리고 로카르드의 불만을 잠재우고 다시 자신에게 집중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쩌면 진실은, 그레이언 또한 로리샤를 버리기보다는 자신의 권속으로 두는 편을 원했을지도 몰랐다.

10. 기묘한 스캔들

휘니드는 자기 의자에 앉은 로카르드를 흘끔 돌아보았다.

로카르드는 오만상을 쓴 채 팔짱을 끼고 잠든 로리샤를 뜯어 먹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잠든 환자에게 악몽을 꾸게 할 것처럼 흉흉했다.

휘니드는 다른 자가 그랬다면 즉시 쫓아냈을 테지만, 카이델 공자와 그녀와의 친분 탓에 일단 견뎌 보고 있었다.

로리샤는 아침에 의식을 되찾았다가 잠들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이제 깨면 방으로 돌아가서 치료받을 수 있었다.

로리샤의 상태에 대한 불안이 걷히자, 로카르드의 머릿속은 갑자기 한꺼번에 복잡해졌다.

그는 자신에게 강요하듯 속으로 몇 번이나 말해 보았다.

‘내게는 아픈 연인이 있어. 이럴 때야말로 정성을 다해야 해.’

‘진즉에 연애해 볼 걸 그랬어. 연습 없이 실전이라니. 아버님은 매사 연습에 또 연습을 강조하셨는데…….’

‘여자로서의 로리샤 로아르는 뭘 좋아하지? 그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로카르드는 갑갑한 가운데 툰바르전에 함께 참전했던 자신의 가신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별명이 ‘사랑꾼’인 자였다.

그는 제 입으로 나오는 모든 문장을 자기 약혼녀의 애칭으로 끝맺는 재주가 있었는데, 듣고 있자면 귀에 피가 날 것 같았다.

주변의 많은 자들이 그를 잘 때 죽여 버리고 싶어 했지만, 아무튼 로카르드는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그자밖에 없었다.

로카르드는 그 사실에 참담함을 느꼈다.

‘애칭……. 그게 도움이 될까? 로리샤니까 로리? 나의 로? 아니, ‘샤’가 더 낫나? 리샤?’

“지금 뭐 하세요?”

휘니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로카르드는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뭐, 제가 뭘……. 실장님?”

“지금 뭐 하셨냐고요.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서 뻐끔뻐끔하시면서요.”

“하…… 하. 제가 그랬을 리가요. 실장님도 참. 하하하…….”

하지만 휘니드는 그를 진심으로 동정하며 침울하게 말했다.

“전하들께서 경연에 목숨을 거신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공자님도 스트레스가 크신 거죠?”

로카르드는 ‘입술을 뻐끔뻐끔’에서 이미 가벼운 쇼크를 받은 상태였다.

카이델가의 후계자는 절대 어디 가서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뻐끔거리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휘니드를 비난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해 괴롭게 머리를 감쌌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로카르드 카이델.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는 작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고 잠이 든 로리샤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황족의 손에 죽을 뻔했으면서도 참으로 편안하게도 잠들어 있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이마를 괴었다.

그는 이제부터 연극을 시작해야 했다. 눈이 맑은 로리샤 로아르는 그의 의도를 멸시할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그의 연인이라고 믿게 해야 했다.

그렇게 그녀의 신뢰를 떨어트리고 시녀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는 거다. 세상 파렴치한이나 할법한 짓이었다.

하지만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를 위해서?’

로카르드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남을 속여야 한다고 자신까지 속이는 건 한심한 짓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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