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로카르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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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로카르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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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로카르드의 선택
2023.05.18.
순간 긴장했던 나는 혼자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황녀 전하의 얼굴을 보고 싶어 결국 그들 쪽으로 돌아섰다.
황녀 전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마치 소풍에 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론드 경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오를 전하는 건강이 안 좋으시다던데 사냥은 괜찮으신 건가요?”
“때에 따라 다르나 가두 행진 정도는 가능하시다고 들었소. 아마 지금 땀을 빼는 건 르네 자작과 호위일 거요.”
“그렇군요.”
“시녀님은 괜찮겠소?”
“뭐가요?”
“오늘 경연은 참패가 아니오.”
“아휴, 농담하지 마세요. 경.”
그러자 론드 경이 낮게 웃더니 말했다.
“이만 우리도 자리를 옮깁시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보니 여우를 이쪽으로 몰고 있는 것 같소.”
나는 얼른 밀리오라 전하에게 돌아가 그의 말을 전했다. 우리가 다시 말에 올랐을 때, 말들이 움찔했다.
숲에서 여우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우리 사이를 쏜살같이 가로질러 달아났다.
“제길!”
나는 론드 경이 뒤이어 험악한 욕설을 내뱉는 걸 듣고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밀리오라 전하에게 소리쳤다.
“전하, 저를 따르십시오!”
론드 경은 즉시 밀리오라 전하를 말에 태워 주고 출발했다. 나도 후방을 확인한 다음 말을 출발시켰다.
앞장선 론드 경이 방향을 크게 꺾었을 때, 여우가 나타났던 수풀에서 카이델 공자가 튀어나왔다. 그의 뒤에는 그레이언 전하가 바짝 따르고 있었다.
카이델 공자는 상체를 숙여 질주하며 그레이언 전하가 여우를 잡을 수 있도록 길을 터 주고 있었다.
그 뒤로 르네 자작이 추격했고, 뒤이어 팔콘 경과 오를 전하의 호위 기사가 뒤얽히듯 달려 나왔다. 그들은 서로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사이 저만치 멀어진 론드 경과 밀리오라 전하를 따라잡으려 박차를 가했다.
그때 내 옆에서 나를 노리듯 말 한 마리가 튀어 왔다. 오를 전하였다.
내 말은 놀라 펄쩍 뛰듯 앞발을 들었다.
“아악!”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말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웃는 오를 전하의 얼굴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로카르드는 그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직감했다.
“전하!”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에게 신호한 다음 속도를 살짝 늦추었다가 말 머리를 크게 꺾었다.
그에게 바짝 따라붙었던 르네 자작은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가 툰바르에서도 종종 써먹던 기술이었다.
내동댕이쳐진 르네 자작이 일어나 분해하는 걸 보며, 로카르드는 그대로 길을 되돌아갔다.
들판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로리샤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숲으로 사라지는 오를의 말 엉덩이를 보았다.
“제길. 제기랄!”
로카르드는 말에서 뛰어내려 로리샤를 흔들었다.
“로리샤 양, 정신 차려요! 눈을 뜨란 말입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말에 올랐다.
곧 그레이언이 안장 뒤에 죽은 여우를 싣고 나타났다.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왔다가 로리샤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로카르드?”
“저는 돌아갑니다. 전하. 르네 자작은 말을 잃었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미쳤어? 로카르드! 로카르드!”
그러나 로카르드는 이미 숲 입구로 달리고 있었다. 그레이언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진짜 분노를 느꼈다.
* * *
로카르드는 휘니드가 치료 중인 로리샤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어이없어했다.
경연 도중에 주군을 버리고 오다니.
로리샤를 휘니드에게 맡기고 사냥터로 다시 돌아갔을 땐 그레이언이 팔콘과 여우 두 마리를 더 잡은 후였다.
그렇게 그의 말 엉덩이에는 여우 세 마리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보기 꽤 섬뜩했지만, 그레이언의 표정만큼 섬뜩하지는 않았다.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이 자신의 행동을 배신으로 여기고 있는 걸 알았다. 그러나 로카르드는 크게 자책하지 않았다.
그가 르네를 제거했고, 호위 기사도 남아 있었으니 그레이언은 오를만 상대하면 되었다. 그리고 오를은 약한 상대였다.
그는 그 정도 위기도 돌파하지 못하는 자를 주군으로 삼아 평생 아이 다루듯 보호하며 지낼 생각은 없었다.
로카르드는 뒤늦게 로리샤의 실종을 알아차린 론드와 밀리오라를 만나 상황을 알렸다. 그것이 오를의 소행임은 언급하지 않았다.
오를은 여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황궁 사냥터의 짐승 밀도로 보아 오늘 여우를 더 잡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오늘 사냥을 파하기로 했다. 황제궁 시종은 경연의 승리를 선언할 권한이 없으므로 각자가 사냥한 여우의 숫자만 기록하여 돌아갔다.
로리샤는 로카르드가 처음에 옮긴 긴 의자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휘니드가 그녀를 옮기는 게 위험하다고 거기 두라고 했기 때문이다.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의 분노를 달래야 했고, 오를이 사냥터에서 그녀를 공격한 이유도 계산해야 했다. 하지만 분노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타가르의 이름을 받은 자가, 남의 눈을 피해 무방비의 여자를 습격하는 짓이라니.
비열하고 치졸하다고 비난하기에는 피가 너무 고귀하다. 그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였다.
그리하여 그는 입술만 씹으며 분을 삼켰다.
그의 눈앞에서는 휘니드가 분주히 움직이며 무엇을 끓이고 갈고 저어 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리샤는 미동이 없었다.
로카르드는 문득 로리샤의 눈 감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나 되짚어 보았다. 기억이 없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훨씬 소녀 같았다. 평소의 다소 거친 똘망똘망함 말고, 차분하고 소심한 아이의 모습이 거기 잠자고 있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뺨은 부드럽고 따뜻해 보여 이런 여자가 오를 같은 자의 적의를 받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하게 했다.
1황자 오를이 로리샤를 공격한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았다. 연이어 이 경연을 어지럽힌 죄에 대한 체벌이며, 동시에 밀리오라 황녀에게 보내는 엄포였다.
너 같은 막내와 놀고 있을 여유는 없으니, 우리 형제의 싸움터에서 꺼지라고.
황후의 대리 복수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또렷했다.
‘나는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아.’
로카르드는 이제부터 진짜 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차가운 긴장감이 몰려왔다.
휘니드는 창밖으로 밀리오라와 론드가 바쁘게 후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공자님, 황녀 전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잘 부탁해요. 실장님.”
“물론이죠.”
로카르드가 조용히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오라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연구실에 밴 약초와 약물 냄새에 코를 찡그리며 로리샤에게 다가갔다.
“주, 죽은 거야?”
그러자 론드가 한껏 눈썹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했다.
“죽은 자는 치료하지 않습니다. 전하.”
“아. 그래. 그렇지…….”
론드는 그녀를 더 나무라지 않았다. 밀리오라가 아무 말이나 하는 건 잔뜩 겁먹어서였다.
“실장, 내 시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는 중입니다. 황녀 전하.”
“그건 알겠고, 내 시녀는 어떻게 되는 거냐니까?”
“…….”
그녀의 음성이 찢어지자 휘니드가 당혹했다. 론드는 나직이 말했다.
“약제실장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하. 이만 돌아가시죠.”
“하지만 내 시녀인데?”
“전하.”
‘로리샤라는 이름이 있는데.’
휘니드는 못마땅하여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가, 황녀의 눈에 눈물이 쏟아질 듯 고이는 걸 보고 고개를 돌렸다.
황녀를 내보낸 론드가 휘니드에게 돌아왔다. 휘니드는 그의 덩치를 보며 자기 연구실이 좁은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시녀님은…….”
“위독합니다. 하지만 그녀라면 버텨 낼 거예요.”
론드는 자기도 안다는 듯 끄덕이고 돌아갔다.
그는 그다음 날부터는 휘니드의 연구실 아래 후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다.
* * *
로카르드가 2황자궁으로 돌아가자 그레이언은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
그레이언은 무슨 말을 뱉을지를 고르지 못해 달싹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로카르드는 피로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세 번째 경연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전하.”
“감히…….”
그레이언은 이을 말을 찾는 대신 일어나 로카르드의 멱살을 감아쥐었다.
“사생아 계집애 때문에 날 버리고 떠나? 네가 속으로는 나를 우습게 여기는 줄은 알았다만. 그러나 나는 타가르다. 나는 너를 언제든 죽여 버릴 수 있어!”
그레이언의 분노는 생각보다 컸다. 로카르드는 그와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죽이는 데 능하시다면 그 나머지가 제 일이겠군요.”
“뭐라……?”
“살리는 것 말입니다. 다 죽여 버리면 장차 누구를 다스리려고 하십니까?”
로카르드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분노가 섞여 있었으나 비아냥이 없어 그레이언의 폐부에 더 깊이 들어가 박혔다.
그랬다. 그레이언은 늘 복수심에 차 있었다.
누구를 죽일까. 누구를 거두고 누구를 죽여야 자신이 더 안전해질까.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늘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로카르드의 말은 옳았지만 지금 저것은 궤변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오를 형님과 나를 둘이 남겨 놓고 가 버리다니. 너는 나를 배신했다. 로카르드 카이델.”
“그녀를 공격한 건 오를 전하이십니다.”
“뭐……?”
“그녀가 죽었다면 이 경연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절반이나 일궈 놓은 승리가 무효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경연을 처음부터 다시 치를 땐 전쟁 영웅이라는 기억은 잊힌 후일 겁니다.”
“이제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믿지 못하겠어. 로카르드. 너는 그냥 그 계집애에게 반한 것뿐이야. 도저히 이해는 안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