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황자녀의 원형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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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황자녀의 원형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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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황자녀의 원형경기장
2023.05.17.
“어디 가?”
“사냥복을 주문하러요. 황녀 전하께서 그날 사냥의 여신처럼 보이게 만들어 드려야죠.”
“어머? 너 철들었니?”
밀리오라 전하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나더러 어서 나가라고 손을 저었다.
그리고 나는 ‘철’이라는 글자도 듣기 싫었다.
* * *
세 번째 경연 당일, 나도 새로 맞춘 사냥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내 사냥복은 밀리오라 전하의 선물이었는데, 가격을 알고서는 입기 싫어졌다. 하지만 그 엄청난 가격이 그녀의 죄책감의 크기라고 생각하자 조금 참을 만해졌다.
론드 경은 오늘 경갑옷 차림으로 우리를 따랐는데, 말에 오른 모습이 장난 아니게 우람했다.
저런 기세로 전쟁터를 누비던 사람이 그동안 운신이 힘들었으니,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겠나 싶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것이, 나는 황녀 전하가 그를 감탄한 듯 흘끔거리는 걸 보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론드 경이 자기 곁으로 말을 붙였을 때 새침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제가 바로 곁에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달리십시오, 전하.”
“그래. 그러도록 해. 꼭.”
나는 그렇게 말하는 황녀 전하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 들었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안타까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 둘을 바라보며 오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툰바르산에서 작은 짐승을 곧잘 사냥했었고 승마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황족의 사냥과는 천만년 거리가 멀었다. 오늘 이곳에서 머리를 쓸 일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론드 경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황궁 사냥터에 도착했을 때, 애써 끌어 올린 사기도 사라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꼭 다물었다.
거기 있는 것은 황자녀들의 무리뿐이었다. 황제 폐하도 안 계셨고, 경연의 시작을 알릴 황제궁 시종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우리뿐이야, 로리샤. 여기엔 오라버니들과 우리뿐이라고!”
밀리오라 전하의 목소리에 담긴 공포는 나에게도 전염되고 있었다.
‘우리뿐’. 그 말은 오늘 이곳에서 황자 전하들이 칼부림을 해도 막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저 시종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선대의 형제 상잔의 역사를 떠올리며 손끝이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황제 폐하의 의도는 뭐지?’
나는 론드 경이 검이 걸린 허리춤을 한번 더듬는 걸 보며 그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 멀리 카이델 공자나 그레이언 전하의 표정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무력에 있어서라면 이중 최강이었지만, 폐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 시선은 그런 분위기에서 홀로 벗어난 듯 보이는 사람에게 저절로 가 닿았다.
오를 전하는 남자 중 가장 화려한 사냥복을 입고 우아한 자태로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표정에는 여유가 흘렀다.
그도 2황자 전하와 우리 무리를 차례로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이 꼭 물건을 바라보는 듯해 불쾌감이 밀려왔다.
나는 지난번 오를 전하가 밀리오라 전하를 도발했던 것을 기억하며 바짝 긴장했다.
그사이 론드 경은 말을 옮겨 오를 전하의 시선에서 밀리오라 전하를 가리고 섰다. 나는 그가 오를 전하의 시선을 빤히 맞받는 것을 보고 진땀이 다 났다.
하지만 론드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그는 오를 전하가 조금도 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봤어요, 론드 경!’
나는 그를 동경하듯 바라보다가 내게 닿는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카이델 공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오늘은 뭐요?’
나는 토라진 듯 고개를 팩 돌렸는데, 그러고 나서야 그의 시선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 자신감 덩어리 같은 남자도 지금 긴장했다, 내가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젠장.
밀리오라 전하가 말했다.
“폐하도 안 계시는데 우리끼리 뭘 어쩌라는 거지? 시녀, 네가 말해 봐.”
“전하,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됐어? 지금 폐하께서 우리를…….”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었는지도 몰라.
나는 그녀가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채워서 들었다.
짐승 사냥인지, 형제 사냥인지.
그때 오를 전하의 무리가 그레이언 전하와 우리 중간으로 들어왔다.
오를 전하는 꽤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오늘 폐하께서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보시려 하는 듯하다. 안 그런가, 그레이언?”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사냥에 참여하라 하셨으니 사냥에 나가는 것이 옳겠지요.”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밀리오라 전하는 황자 전하들 사이에서 기죽어 보이지 않으려 애쓰려고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가 물었다.
“그러면 형님께서는 오늘 무엇을 잡기를 제안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오를 전하는 황녀 전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정해 보려무나, 밀리오라. 오늘 가장 불리한 것은 너이니 말이다.”
“하지만 제게는 론드 경이 있는걸요?”
황녀 전하는 당당하게 대답했고, 오를 전하는 두 번 묻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정하지. 여우로 하자. 우리에게 익숙한 사냥이 아니냐. 어떠냐, 그레이언.”
“그러시지요. 그럼 저는 저쪽에서 출발하겠습니다.”
그레이언 전하는 즉시 말 머리를 돌려 동편 숲으로 출발했다. 카이델 공자는 그를 따라 출발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짧은 말이 담긴 시선이었다.
‘조심해요.’
하지만 나는 겁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론드 경이 앞장서 말했다.
“제가 길을 잡겠습니다. 따르시지요!”
황녀 전하와 나도 그를 따라 남쪽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오를 전하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야 멈추었다.
황녀 전하는 숲 끝 공터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런 데 여우가 있어?”
“아니요.”
“…….”
밀리오라 전하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바라보자, 론드 경이 말했다.
“저는 전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 온 겁니다. 여우를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니.”
“이렇게 흩어져 사냥이 시작되면 짐승들은 몸을 숨깁니다. 오늘은 몰이꾼도 없으니 황자 전하들도 숲을 몸소 뒤지셔야 하고요. 우리는 그동안 여기서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듯 숲을 바라보다가 곧 대답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우리는 말을 몰아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갔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숲을 지나는 바람과 지저귀는 새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다.
론드 경은 잠시 망설이더니 커다란 몸을 땅으로 굽혀 풀을 뜯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손끝이 꼼지락대는 걸 잠시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을 내밀자 밀리오라 전하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매듭이야?”
론드 경은 대답이 없었고, 황녀 전하는 ‘어머, 어머.’ 속삭이며 그걸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평민 아이들은 당연하게 만들 줄 아는 풀 매듭이 그녀에게는 몹시 신기한 모양이었다.
론드 경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더니 이번에는 꽃을 따서 주물럭거렸다. 그는 곧 꽤 괜찮은 꽃팔찌를 만들어서 황녀 전하에게 내밀었다.
“어머…….”
그걸 받아 든 황녀 전하는 미간을 미묘하게 일그러트렸다.
내가 보니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꽃팔찌를 모르는 것이다.
“어머, 정말 예쁜 꽃팔찌네요! 제가 묶어 드릴게요.”
내가 그걸 팔목에 묶어 주자 황녀 전하는 환하게 웃더니 신기한 듯 이리저리 돌리며 한참 쳐다보았다.
론드 경은 보초를 서듯 우리를 등지고 서서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밀리오라 전하는 론드 경과 함께 있으면 보통 사람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잠시 내버려 두고 근처를 걸었다. 오랜만에 들풀을 살피고 약초를 찾아보았다.
저 멀리서는 두 황자 전하의 말 무리가 달리는 소리와 고함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나는 그 소리에 불안해져서 론드 경을 돌아보았는데, 그때 그는 황녀 전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황녀 전하는 그가 다가오자 새침하게 물었다.
“왜?”
“……왜 그러셨나 하고요.”
“뭐가? 똑바로 말해.”
하지만 론드 경은 답이 없었다. 나니까 그러려니 하지, 솔직히 저런 말투를 듣고도 상처받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 같았다.
“경연에서 말입니다.”
“…….”
이번에는 밀리오라 전하가 입을 닫았다. 사실은 나도 궁금했기에 귀가 쫑긋 섰다.
“오를 오라버니가…….”
론드 경도 나도, 인내심을 발휘하여 기다렸다.
그녀는 몹시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오를 오라버니가 자기가 황제가 되면 제일 먼저 나를 도살업자에게 시집보내겠대. 너는 단 한 번도 타가르였던 적이 없다면서.”
“이 X새끼가…….”
나는 헉 하고 놀랐다가 얼른 쪼그려 앉아 풀을 살피는 척했다. 론드 경의 굵은 몸에서 나오는 욕설은 퍽 타격감이 컸다.
그리고 한편으로 놀라웠다. 론드 경은 황녀 전하 앞에서 황족을 서슴없이 욕한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 않는다.
“오를 오라버니에게 망신을 줘야겠다는 것 말고 아무것도 눈에 안 보였어. ……로리샤 생각은 조금도 안 했어. 나 못됐지?”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론드 경이 무엇에 긍정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성을 잃은 걸 이해한다는 건지, 그녀가 못됐다는 건지.
하지만 그 말투에 담긴 감정에는 비판도 비난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황녀 전하가 론드 경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황녀 전하는 몹시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인정을 요구하는 아이 같은 태도였다.
“경은……, 내가 더 잘난 황녀가 되는 게 싫어?”
“뭐 하러 말입니까.”
론드 경,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답하면……!
“이미 충분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