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미샤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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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미샤의 계획
2023.05.16.
나는 살짝 움찔했다고 생각했는데 론드 경이 보기에는 험악한 표정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인상을 쓰더니 그 두꺼운 가슴을 위협적으로 내밀고 문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그와 맞닥뜨린 미샤는 놀라서 눈과 입을 다 크게 떴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다.
“론드 경, 괘, 괜찮아요.”
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미샤를 남에게 뭐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 점도 당황스러웠다.
이복동생? 그랬다간 미샤가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로아르가의 적녀? 그건 잘못하면 비아냥으로 들릴 거다.
미샤 쪽에서 나를 설명하기는 참 쉬운데 말이다.
‘우리 가문의 수치인 사생아야.’ 아니면, ‘우리 엄마를 평생 고통에 몰아넣은 계집애야.’
나는 겨우 말했다.
“미샤 로아르,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이신 론드 경이야.”
“론드 경.”
미샤는 그와 눈을 맞추지도 않고 머리를 까딱거리기만 했다.
‘황족의 호위 기사는 로아르가의 기사와 지위가 다르단 말이야!’
나는 당황하여 론드 경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는 얕게 코웃음 치고는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그는 로아르란 성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미샤는 론드 경을 무시한 채 그 예쁜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미샤가 내게 문병을 오다니…….
미샤는 내 복잡한 표정에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가 보내서 왔어. 네가 죽었을까 봐 걱정이 되신 모양이야.”
“설마. 내가 얼마나 질긴지 너도 잘 알잖아.”
“그렇지. 바퀴벌레보다 질기지.”
미샤는 무심결에 뱉었다가 론드 경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나도, 누군가 나를 지켜 준다는 사실도 불쾌한 듯했다.
나는 얼른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백작님께 그렇게 전해 드려.”
“난 아직 내 용무를 말하지 않았는데?”
“…….”
“걸을 수 있게 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명령이야.”
론드 경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나는 충격을 받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살면서 매를 처음 맞은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일로 돌아오라니.
황후 폐하의 격노가 아직도 식지 않은 걸까? 아니면 카이델 공자가 거짓말로 나를 빼돌린 것을 들킨 걸까?
머릿속에 한꺼번에 생각이 스쳤다.
그사이 미샤는 론드 경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걸 보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저 표정을 안다.
저건 미샤가 불안할 때 짓는 표정이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물었다.
“그러면 황녀 전하의 시녀는 누가 대신하고?”
“그런 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일을 이렇게 망쳐 놓은 네가 말이야.”
“……네가 하면 되겠구나, 그렇지? 이미 황녀 전하가 경연에서 두 번이나 이기셨으니 지금쯤 네가 끼어들어도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렇지?”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듣는 귀도 있는데 말조심하지 못해?”
미샤는 론드 경의 눈치를 보며 도끼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이거 네 생각이야? 아니면 백작 부인? 백작님도 네가 오늘 여기 온 것 아셔?”
“당연히……! 너 내 말 뭐로 들었어? 아버지가 보내서 왔다고 했잖아!”
“병문안하라고. 그렇지? 나더러 백작저로 돌아가라는 건 네 소원이고.”
“너 정말 아픈 모양이구나? 얼마나 맞았으면 헛소리를……!”
“미샤.”
“네까짓 게 황후 폐하의 분노를 사다니, 우리 가문에 미치는 피해는 어쩔 셈이야? 그러니 내가 나서야지!”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야, 내 인생은 네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미샤. 난 안 가.”
“……!”
미샤의 눈은 순간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게 알고 있어. 난 안 가. 너도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해 봐. 여기는 네가 원하는 곳이 아니야. 미샤.”
“네까짓 게……!”
미샤는 내게 뭐라고 폭언을 퍼부으려다 론드 경의 눈치를 보고는 몸을 획 돌려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방 안이 갑자기 고요하게 느껴졌다.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느낌이었다.
“괜찮소?”
론드 경의 묵직한 음성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아휴, 미샤랑은 늘 그러는걸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점점 달라지고 있는데, 미샤는 과거 속에서 나를 추격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든 미샤는 자기 엄마를 화가 나게 한 산촌 계집애를 미워할지도 몰랐다.
나는 아까 미샤에게 하려다 만 말을 곱씹었다.
‘나는 황궁을 나가면 백작저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미샤. 그러니 내가 갈 곳을 만들 때까지는 나는 황궁에서 나가지 않을 거야.’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면 황후 폐하의 미움이 무서워 나를 가정 교사로 쓰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 * *
황녀 전하가 나를 찾아온 건 론드 경이 돌아가려 일어났을 때였다. 창밖에서 비춰 든 석양이 론드 경과 마주 선 황녀 전하의 얼굴을 붉게 뒤덮었다.
그가 묵례하자 그녀는 그를 외면하며 새침하게 말했다.
“이만 나가 봐.”
좀 친절하게 말해도 될 텐데.
론드 경이 조용히 나가고, 황녀 전하는 내 침대 곁에 섰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매가 어찌나 사나운지, 괜히 긴장이 되었다.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론드 경이 제 곁을 든든하게 지켜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전하.”
“하. 거짓말은!”
“……제가요?”
“지금 속으로는 나한테 갖은 욕을 퍼붓고 있지 않아? 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앞에는 틀리고 뒤에는 맞네요.”
“하! 너, 정말…….”
나는 끄응 힘을 내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불을 확 걷어 불쌍하고 우스꽝스러운 내 다리를 보였다.
“지금은 이렇지만 의료원과 약제실에서 잘 돌봐 주고 계시니까 차차 나아질 거예요.”
“…….”
그녀는 내 꼴을 보고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눈빛이 동요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아가엘과 협상은 어떻게 되어 가나요?”
그녀는 내가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서야 새침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토라진 듯 말했다.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이런 것까지 신경 쓰며 살게 되었어.”
나는 ‘고생이 많으세요.’ 하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가엘 사신이 며칠을 버텼대. 철 제련 기술은 못 내어놓겠다고. 대신 석회석과 코…… 아무튼 그걸 공짜로 공급하겠다고.”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요야? 당연히 황제 폐하께서 이기셨지.”
아가엘은 지난 아마타전이 치러진 지난 2년간 아마타족의 철광석을 공급받지 못했다. 더는 버틸 재력이 없었던 것이다.
“툰바르산맥 접경에 제철소를 새로 만들 거래. 그 아래 이어지는 강을 이용하면 거기서 만든 철괴를 제국 전역으로 운반할 수 있대. 물론 일부는 아가엘에 떼어 줘야겠지만.”
“전쟁 때 닫혔던 산맥의 교역로가 다시 열리겠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제국의 철 공급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거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아가엘이 갖은 농간을 부렸지만 결과적으로 제국이 부강해지도록 돕기만 한 거야.”
나는 웃으며 물었다.
“티 파티에서는 자랑하셨어요? 경연에서 2연승 하셨잖아요.”
“이게 진짜. 내가 미쳤니? 다음에 끌려가서 매질당하는 건 나일 텐데? 당분간 티 파티는 취소야.”
아시니 다행입니다.
나는 대견하다고 웃었고, 황녀 전하는 잔뜩 삐친 얼굴로 일어났다.
“시녀는 원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거야. 이 정도 일로 생색낼 생각은 하지도 마.”
“생색이요? 제가 감히 어떻게요!”
나는 깜짝 놀란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과장되게 대답했다.
황녀 전하는 그것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몸을 획 돌렸다가 말했다.
“다음 경연에서는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나는 그녀의 기다란 은발이 찰랑거리며 멀어지는 걸 끝까지 바라보았다.
타가르의 은발은 늘 비인간적인 느낌을 주었다. 사람보다는 신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밀리오라 전하의 어설픈 사과를 듣고 나니 이제는 그 모습이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소녀처럼 보였다.
……말도 안 돼.
* * *
폐하께서 아가엘과의 협상을 마무리 짓고 협상서에 날인하기까지 한 달간 경연은 잠정 중단 상태였다.
그사이 나도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내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세 번째 경연 문제는 각자의 시종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황자녀들은 사냥에 참여하라.」
밀리오라 전하는 경연 문제가 적힌 스크롤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얼굴로 손톱으로 긁으며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거야? 사냥에 참여해서 여우를 잡으라는 건지 곰을 잡으라는 건지, 이렇게만 말하면 어떻게 알아?”
“…….”
“게다가 사냥이라니, 이건 아예 대놓고 둘째 오라버니에게 유리한 거잖아.”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어째서?”
“경연은 훌륭한 사냥꾼을 뽑기 위한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오를 전하의 건강 문제도 있는데 공정성을 의심받을 만한 내용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요.”
“뭐, 네가 그렇다면야.”
밀리오라 전하는 짜증이 잔뜩 난 채로도 내 말을 수긍해 주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살짝 웃기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날 이후 티 파티를 열지 않았다. 각오를 단단히 한 것이다.
“흥. 무슨 상관이야. 나는 잘못하면 되는 거잖아. 그냥 말 좀 달리다가 엉덩이가 아파서 더 못 타겠다고 하면 그만 아니야? 그 정도는 네 도움이 없어도 할 수 있다고.”
“그러면 전하의 성실성을 의심받으실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냥 오라버니들 뒤만 따라다니면 되는 거지, 그렇지?”
“당일 상황을 보아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못 할 자신 있어. 나한테 임기응변 같은 건 없거든?”
“…….”
나는 인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대화는 엉망이었다.
“말은 잘 타세요? 사냥은 즐기시고요?”
“사냥복이 마음에 들 때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