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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그녀를 출궁시켜야겠어 (73/155)


72화. 그녀를 출궁시켜야겠어
2023.05.15.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인상을 쓰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해결되는 것은 없어 그녀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런데 로리샤 로아르는 뜻밖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로카르드는 그녀가 약 기운에 취해 평소와 다른 상태라는 걸 깨닫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녀의 진짜 속마음을, 그녀가 사생아라는 사실에서 오는 자괴감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 진짜 욕망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음험한 욕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 욕망은 또한 로카르드 카이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여자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하는 일은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로리샤가 전에 없이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은근한 미소를 띤 채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과 싸웠다.

그 과정에서 던진 소소한 잡담 속에서 그녀의 인생 목표를 알게 된 것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로리샤 로아르. 엄청난 여자 같으니.

그는 그녀가 황후의 매질을 어떻게 견뎠는지 황궁 하인을 통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저렇게 상대를 가리지 않고 덤비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서야 그렇게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녀는 마치 날 때부터 그렇게 해 온 사람 같았다.

그런데 스스로 그 사실을 자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물려받고 싶은 것보다 거절하고 싶은 것이 더 많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쟁취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곱씹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 맹목성이 주는 위태로움, 생명력과 같은 매력이 그로 하여금 그녀를 주시하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로카르드는 자신이 오늘 로리샤에 대해 더 많이 이해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영민한 로카르드는 그 지식이 계속해서 자신의 발목을 잡을 뿐임을 알았다. 오늘만 해도 그는 감히 황후를 속이지 않았던가.

“아직이요.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로카르드가 쓰게 중얼거리자 그레이언이 눈을 일그러트렸다. 로카르드가 잘 모르겠다고 말하다니, 무엇인지 몰라도 지독한 난제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로카르드는 제 주군의 얼굴이 어두워진 걸 깨닫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었다.

“네. 오늘은 그녀가 이겼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일 대 일. 동점일 뿐입니다.”

그레이언도 첫 번째 경연의 진짜 승자가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표면적인 승리도 원했다. 제국민과 귀족들에게 그의 우세를 증명해 줄, 눈에 보이는 결과 말이다.

그런데 계속 이래서는 두 황자가 다 덜떨어져 보일 뿐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녀를 공해에 던지고 올 걸 그랬어.”

그 말에 로카르드의 눈빛이 예민해지자 그레이언은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 애만 끼면 네가 물러지잖아. 그녀가 아니었다면 누가 네 뒤통수를 쳤겠어.”

“오늘 일은 밀리오라 전하께서 충동적으로 저지르신 일입니다. 그녀 탓이 아니에요.”

“그녀 탓이지! 주인이 미쳐 날뛰는 건 시종의 책임이야.”

로카르드는 반박하는 대신 먼 산을 보듯 중얼거렸다.

“제브론에서 그녀를 내치지 말걸, 후회가 크신 것 압니다.”

“하!”

그레이언은 의자 팔걸이를 탁 치고 로카르드를 쏘아보았다. 로카르드의 빙긋거리는 웃음은 재수 없었지만,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로카르드가 그녀를 편들 때마다, 그레이언은 그가 자신의 옹졸함과 편협함을 지적하는 것 같아 심기가 상했다.

실은 그레이언도 지금이라도 로리샤를 납치해다 황궁 밖으로 빼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산속 같은 데 처박아 두었다가, 자신이 황태자가 되면 데리고 와서 써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망상이었다. 그녀가 가치 있는 인재라 해도, 그녀는 사생아다.

로카르드는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 사생아라는 출생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어깨는 홀가분하기만 하다. 주인과 운명을 함께해 지키고 책임질 가문이 없으니, 그녀는 자신의 인생의 보람 따위나 탐하며 충성에 게으르지 않은가.

그러니 그는 그녀를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기 곁에서 죽어 주리라 믿을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작은 손해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레이언에게 로리샤는 눈엣가시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로카르드는 제 주군을 다독이듯 말했다.

“철광석을 활용한 이득은 잃었다고 해도, 오를 전하 또한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를 전하는 평정을 잃으셨죠. 그분은 마음이 조급해져 곧 실수를 저지르실 겁니다.”

“…….”

그레이언은 로카르드의 얼굴을 뚫어질 듯 살폈고, 로카르드는 남자도 진정시키는 고운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철광석 협상을 끝내시면 세 번째 경연 문제를 내시겠죠. 첫 번째는 마음, 두 번째는 지식을 활용해야 하는 문제였으니 다음엔 체력이 필요한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레이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거라면 내가 유리하지.”

“네. 다음 문제에서 전하보다 더 유리한 분은 안 계십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레이언은 그제야 안도하여 미소를 지었다.

“로카르드. 로리샤 말이야.”

그레이언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른 걸 깨달았을 때, 로카르드는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세 번째 경연이 시작되기 전에 그녀를 출궁시켜야겠어. 나는 죽였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네놈이 또 날뛸 테니.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법을 생각해 봐.”

로카르드는 제 주군의 얼굴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그레이언에게 반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가르의 불안을 건드린 자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오를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는 오늘 정리되었지만, 그레이언에게는 아직 남은 것이다.

“…….”

로카르드는 그의 앞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가 떠나자 그레이언은 한층 더 예민해졌다. 로카르드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로리샤 로아르를 정말로 죽이기 원하는지 확신이 없어서 생기는 불쾌감.

저 영리한 로카르드 놈도 그것을 알기에 대답이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레이언의 심기를 무엇보다 거스르는 건 로리샤라기보다, 처음부터 로카르드가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로카르드가 로리샤의 깨끗한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는 동안, 자신은 그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의 황제로서의 자질 부족을 방증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의구심이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그레이언은 가장 비천한 자부터 고귀한 자까지, 그를 받들어야 마땅할 자들이 자신을 휘두르는 기분이 불쾌하여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일단 내 눈앞에서 꺼져, 로아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결정 내릴 때까지.”

그가 이만 잠자리에 들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하인이 들어와 편지를 전했다. 1황자궁에 심은 세작의 편지였다.

편지는 오를이 칼린 앙카르트에게 선물을 보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형님의 발 빠른 움직임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난 여자들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상황도 우스웠다.

그는 생각했다.

‘칼린 앙카르트, 독이 든 사과 같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 * *

다음 날. 내 다리는 황궁 기둥만큼 부어올랐다. 로이만 실장님이 챙겨 준 진통제와 치료제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진통제 양을 줄이겠다는 말도 물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찌해야 할지 모를 상황은 또 있었다.

론드 경은 내 방을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열어 놓고 그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팔 굽혀 펴기를 하거나 했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운동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가 그동안의 정으로 병문안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가 내일도, 모레도 이렇게 내 방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를 지켜 주는 것인지 감시하는 것인지.

‘부담스러워 미치겠어.’

내가 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 그는 기사의 예리한 감으로 나를 획 돌아보곤 했다. 그러면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야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로아르 양. 황녀 전하의 명이시니까.”

“예?”

나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황녀 전하가 자기 호위 기사를 왜 내게 보낸단 말인가…….

“호, 혹시 누가 절 죽이려고 하나요?”

그러자 론드 경이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트렸다.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뭐 하러 그러겠소.”

“아. 네.”

그렇지. 이 비천한 사생아에게 무슨 손을 댈 가치가 있겠어. 그것도 황궁 안에서.

“전하께서 시녀님께 미안하신가 보오.”

“아……. 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침대 위로 늘어졌고, 론드 경은 다시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밀리오라 전하가 내게 미안한 마음에 론드 경을 보냈다니, 이건 퍽 적극적인 사과의 표시였다. 론드 경은 죄도 없이 나와 방에 갇히게 되었지만 말이다.

황녀 전하가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황자 전하들은 밀리오라 전하가 아닌 나를 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는 황녀 전하가 신중해지는 걸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론드 경이 팔 굽혀 펴기를 하며 물었다.

“황녀 전하는 다녀가셨소?”

“아니요. 의사를 보내 주셨는 걸요.”

“그렇군.”

그의 대꾸는 못마땅하게 들렸다.

의사를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니, 론드 경은 황녀 전하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멋쩍게 말을 걸었다.

“몸은 어떠세요? 운동을 여전히 많이 하시네요.”

“이건 게을러질까 봐 하는 운동이요. 이대로만 회복되면 내년에는 기사단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로아르 양 덕분에.”

“반가운 말씀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으로 반가운 소식인데, 크게 맞장구가 쳐지지 않았다. 론드 경이 없는 황녀궁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 에리아가 문을 두드렸다.

“시녀님. 본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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