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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로리샤의 꿈은 (72/155)


71화. 로리샤의 꿈은
2023.05.14.


그의 목소리는 뚱했다.

이런 우라질. 하필 그때 쿠션을 던져서는!

“아니, 아니요. 죄송해요. 창을 닫으려는 거였는데…….”

방으로 들어온 카이델 공자는 애써 표정을 정리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딴에는 내게 불쾌한 티를 안 내려고 그러는 것 같았는데, 그럴수록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오늘 나를 구해 준 게 그인데 이렇게 푸대접하다니, 나를 얼마나 배은망덕하게 여기겠는가.

“하아.”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맞아서 쌓인 피로에 그를 기다리느라 쌓인 피로, 그리고 이 당혹스러운 상황 때문에 생긴 피로…….

내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자 그가 미간을 아름답게 찌푸리며 다가와 섰다.

아름다운 찌푸림이라니, 저 사람은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괜찮아요?”

“살아는 있어요.”

나는 뚱하게 대답했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자님 덕분에 살았어요. 또요. ……황후 폐하는 아까 정말로 끝장을 보려는 분 같았거든요.”

내가 머뭇거리며 중얼거리자 카이델 공자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럴까 봐 부득이하게 나선 거니 다른 뜻으로 곡해는 말기 바랍니다.”

‘대체 나중에 저한테 뭘 받아 내려고 이렇게까지 해 주세요?’라고 말하려던 나는, ‘부득이’라는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는 내 ‘아무튼’이 썩 성에 안 차는 표정이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내 인사를 받았다.

저럴 때 보면 행동거지가 참으로 점잖은데, 평소에는 어째서 하나같이 속 모를 짓만 하는지.

그는 그제야 내 침대를 훑어보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턱 아래까지 당겨 덮었다. 그러자 그도 조금 민망한지 괜히 시선을 피했다.

“쿠션, 갖다줄까요?”

“아, 네. 부탁드려요.”

그는 쿠션을 가지고 와서 내게 내밀려고 하다가, 그냥 자기가 껴안고 내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나 그거 받아도 아무 데도 안 던질 건데.

“폐하께서 아가엘 사신과 두 차례 독대를 마치셨습니다. 아마 거래가 성사될 듯해요.”

“아…….”

카이델 공자가 나를 빤히 보는 시선에, 나는 얼굴에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괜히 천장을 보았다 벽을 보았다 했다.

“이번 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도 되겠죠?”

“보신 대로인데요…….”

“로아르 양.”

나는 그의 나무라는 듯한 말투에 술술 불고 말았다.

“황녀님께는 반대하라고 일러 드렸는데……. 아가엘은 적국이고 군과 내수를 모두 감안하자는 대답으로요.”

“…….”

“그런데 경연이 시작되기 직전에 오를 전하께서 밀리오라 전하께 귓속말을 하셨어요. 밀리오라 전하는 충격을 받으신 듯했고요.”

“오를 전하께서 황녀 전하의 자존심을 긁으셨군요.”

“그러신 것 같아요. 그래서 욱! 하고…….”

나는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평소 같으면 뭐라든 대꾸했을 카이델 공자가 조용했다. 흘끔 눈치를 보니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몹시 싫어하는 듯도 하고 어이없어하는 듯도 한 표정이었다.

“타가르의 성정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로아르 양.”

“네. 회초리를 한 사십 대쯤 맞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나는 한껏 어색하게 웃었고, 그는 미간을 더 구겼다.

참 때를 못 가리고 잘생긴 얼굴이다.

내가 기가 죽어 시선을 돌리자 그가 얼굴을 확 펴더니 농담처럼 말했다.

“그레이언 전하와 둘이 식사했다면서요?”

내가 커다란 한숨을 쉬자 그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는 하루가 멀다고 죽음의 위기를 겪네요. 이래서야 여기서 살아 나갈지…….”

“황궁에서 나가면 뭘 하게요?”

나는 쓸쓸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비밀이에요.”

“약재상은 아닐 거고. 그 비밀, 나도 알고 싶은데.”

평소라면 그의 도발에 발끈했을지도 모르는데, 오늘은 기운이 없어 웃음만 나왔다.

“행선지는 알려 드릴게요. 빚 받으러 오셔야죠.”

그는 긴 다리를 쭉 펴더니 발목을 꼬았다. 마치 자기 방에서 휴식하는 듯 경계를 내려놓은 몸짓이었다.

생명의 은인이긴 하지만 우리가 친구는 아닌데, 자기만 편안하게 구는 모습에 괜히 심술이 났다.

그가 물었다.

“황궁에 들어온 것, 후회하지 않아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요.”

“내 빚을 조금만 쪼개서 받죠.”

“와. 치사하시네요.”

“제가 좀 그래요.”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저도 그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가 피식 웃었다.

저 웃음에 담긴 여유와,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그가 가진 강인함 같은 게 나는 언제나 부러웠다.

“그런데 제가 버티는 이유는 결국 하나더라고요. 노후 준비를 위해서.”

내가 입을 열자 카이델 공자는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내가 ‘노후’라고 말하자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하긴 댁이 뭘 알겠어. 이미 손자까지 써먹을 명예와 재산이 가득 쌓여 있는 사람이.

“……노후?”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혼자 살며 할 만한 직업은 수녀와 가정 교사뿐이거든요. 저는 신과는 친하지 못해서 후자를 택했고요. 시녀 출신 가정 교사는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잖아요? 그 정도면 사생아라는 제 약점도 상쇄할 수 있을 테니…….”

“아하.”

나는 그제야 내가 비밀이라고 해 놓고 다 불어 버린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내 입은 계속 나불거리고 있었다.

“저는 줄리아 선생님처럼 되는 게 꿈이에요.”

“줄리아 선생님이요?”

“절 사람 만들어 놓으신 분인데……. 그분도 독신이에요. 실력은 또 얼마나 좋은데요. 그분은 정말 ‘멋진 여자’라고요.”

내가 강하게 끄덕이며 단언하자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그걸 보고 갑자기 민망해져서 얼굴이 다 달아올랐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주절거리는지…….

생각해 보니까 로이만 실장님이 진통제를 좀 강하게 조제했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거기엔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이런 젠장!

“결혼은 왜 안 하게요?”

“명망 있는 귀족의 사생아. 그런 애의 인생은 뻔하잖아요. 고작해야 돈 많은 귀족의 후처나……. 사생아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범죄예요, 공자님.”

“…….”

나는 카이델 공자가 작은 반박이라도 할 줄 알았다. 제국의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라면, 일개 사생아한테 그 정도 혼처면 감사해야 하지 않냐고 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는 침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실장님은 도대체 약을 얼마나 세게 지은 거냐고!

카이델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꽤 괜찮은 직업을 선택했군요.”

“……아.”

나는 붕대를 친친 감아 움직일 수 없는 다리 쪽을 내려다보며 머쓱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다리가 나으면 쫓겨나지 않겠어요?”

나는 애써 밝게 말했지만 카이델 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당신을 시녀로 받아들인 건 오를 전하와 황후 폐하십니다. 지금 와서 그 결정을 물리지는 않으실 거예요. 당신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요.”

“좋아해야 할지 겁을 내야 할지…….”

“적당히 겁을 내는 게 좋아요.”

“지금도 엄청 겁나는데, 이거보다 더요?”

“당신은 좀 더 내도 돼요. 그래야 보통 사람과 비슷해질 테니.”

“…….”

내게 겁대가리가 없다는 말인지, 내가 뚱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은 내가 닫고 갈 테니 일어나지 말아요.”

저것도 농담이라고.

그가 헛소리를 하니까 나도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공자님은 카이델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쩌실 뻔했어요? 창 타 넘는 솜씨만 보면 도둑이 되었어도 이름을 날리셨을 거예요.”

그러자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시킨 대로 와락 겁을 먹었다.

‘말이 너무 심했나?’

그러나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창을 열고 나갔다. 마치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레이언 전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게 다 그분 때문인데!”

나는 창문이 찰칵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괜히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다음엔 꼭 진통제를 줄여 달라고 하자…….’

* * *

로리샤의 병문안을 마친 로카르드는 곧장 그레이언에게 향했다. 그레이언은 그를 보자마자 날카롭게 질책했다.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사생아에게 진 주제에! 2연패다, 로카르드.”

로카르드는 이마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게요. 2연패네요.”

그 태연한 반응에 그레이언은 더 화났다. 저놈의 여유. 평소에는 존경스러울 정도인 여유였지만 이럴 때는 사람의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할 뿐이었다.

로카르드가 그의 맞은편에 늘어져 앉자 그레이언이 이를 갈 듯 말했다.

“아가엘 사신과 협상안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폐하께서 로아르 백작에게 검토를 지시하셨어.”

그레이언은 로카르드를 빤히 노려보다가 말했다.

“혹시 세 번째 사자가 그녀에게 언질을 준 걸까? 이 경연을 뒤흔들라고?”

“설마 로아르 백작님이 밀리오라 전하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말했지만 생각해 보니 어이없는 소리라, 그레이언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등받이 깊숙이 기댔다.

“너, 이 중요한 시기에 날 놔두고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산책을 좀 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요.”

“그래서, 생각은 정리했나?”

로카르드는 자문해 보았다.

‘나는 무엇을 정리했나?’

이번 사태에 그의 역할은 더 없었다. 특히 철광석 사용 권한을 미끼로 쓰려던 그의 계획이 로리샤로 인해 무산된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화가 나지 않는지.

그는 다시 한번 로리샤의 창을 타 넘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안위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자신의문도 해결해야만 했다.

로카르드는 만신창이가 된 로리샤를 보자 분노와 낯선 감정이 동시에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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