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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창문을 요만큼만 열어 둘게 (71/155)


70화. 창문을 요만큼만 열어 둘게
2023.05.13.


“로리샤는 제게 아가엘에 철광석 수출을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멋대로 대답했어요!”

“이 간악한 것이!”

“황후 폐하…….”

“어디서 연극을 하는 게야. 네가 철광석에 대해 무엇을 알아서 그런 걸 떠들었단 말이야? 저 비천한 것이 네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니 네가 그것을 넙죽 받아먹은 것이지. 너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니까!”

내 꼴도 내 꼴인데, 나는 곁에서 호흡을 고르는 밀리오라 전하가 지독하게 불쌍했다. 나는 황후 폐하처럼 극단적으로 자식 하나만 편애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황녀 전하는 오늘만큼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황후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로리샤가 일러 준 말인 건 사실이지만, 폐하께는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저 천한 계집애는 황제께서 반기실 계획을 알고도 숨기려 했단 말이냐? 이 무슨 무도한 일인지!”

“그것이 아니라……!”

황녀 전하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냥 입을 다무세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해 보았지만 그녀에게 들릴 리 없었다. 그녀가 엄청난 용기를 냈다는 점은 대견했지만, 나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 그냥 나 혼자 맞게 놓아두지 뭐 하러 와서 또 모진 소리나 듣고…….

우리를 내려다보던 황후 폐하는 입가에 실소를 띤 채 차갑게 말했다.

“밀리오라, 보거라. 네 어리석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시작해.”

시녀는 내 앞으로 오더니 엄하게 말했다.

“치마를 더 걷으세요.”

황후 폐하는 나를 밀리오라 전하 앞에서 때려 죽이려는 게 틀림없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다니.

내가 비틀거리며 치마를 걷자, 피에 젖은 속치마가 종아리에서 떨어지며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내 종아리를 본 밀리오라 전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시녀는 새 회초리를 공중에 한 번 휙 휘둘러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어 과시하더니 그것을 하늘로 높이 쳐들었다.

그때 밖에서 하인이 들어와 알렸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밀리오라 황녀 전하를 부르셨습니다.”

“어째서!”

“아가엘 사신이 참석하는 티타임에 참석하라는 명이십니다.”

그러자 황후 폐하의 얼굴이 굳었다.

“쓸모도 없는 것이 갈수록 영악해지기만 하다니!”

황녀 전하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열심히 눈빛을 쏘아 댔다.

‘달아날 구멍이 생겼을 때 가라고요!’

그러자 황녀 전하는 홀린 듯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후 폐하. 아가엘 사신에게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로리샤가 필요합니다. 저는 거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하……. 요망한 것. 그래. 어디 네 운이 얼마나 가나 보자.”

황후 폐하가 벌떡 일어나 나가자 시녀도 분한 듯이 회초리를 던지고 따라 나갔다.

“뭐 해, 이 멍청아!”

황녀 전하가 나를 윽박지르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멍하니 고개를 드니 그녀의 도자기 같은 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예……. 전하.”

나는 끙끙거리며 스툴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내가 넘어질까 봐 겁을 내며 나를 부축하고 싶은 듯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나를 만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황족들은 신분이 낮은 자들을 함부로 만지는 법이 없었으니, 그 행동에도 용기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누구를 만지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다니, 황족이란 참 귀찮은 게 아닌가.

나는 쓰러지더라도 여기서 쓰러지고 싶지 않아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기다리던 론드 경이 내 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뒤따라 달려 나온 황녀 전하는 론드 경에게 화를 냈다.

“뭐 해! 로리샤가 죽잖아! 론드 경, 어서.”

그러자 론드 경은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나는 엉겁결에 으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끙끙거리며 말했다.

“경, 안 돼요. 허리……!”

그러자 론드 경이 나를 째려보며 혀를 찼다. 나는 겁을 먹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가 왜 론드 경 허리를 걱정해?”

황녀 전하는 혼자서 씩씩거리며 우리를 앞서갔다.

그 말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보니 그에게서 느껴지는 근력이 장난 아니었다.

그 정도면 나 정도는 들고 휘두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사실 걸으라고 해도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황녀 전하가 걷다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래 가지고 황제궁으로 어떻게 가……. 흐흐흑.”

론드 경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들어가시자마자 다시 하인이 와서 폐하와 사신의 티타임이 취소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흐흑. 잘됐네. 천만다행이야. 나 지금 울어서 얼굴 흉하단 말이야.”

듣자 하니 어딘지 이상했다. 무슨 국빈이 참여하는 티타임이 이렇게 쉽게 취소되고, 이렇게 소식이 빠르게 전달되고…….

내가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론드 경은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오늘 어린 사자께서 바쁘셨소.”

이건 카이델 공자의 ‘음모’였다. 그는 내가 맞아 죽을까 봐 감히 황후 폐하에게 거짓말을 한 거다.

안도감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 새끼가 나중에 얼마나 뽕을 뽑아 먹으려고 나를 이렇게 매번 구해 주는지…….

그러지 않아도 아파 죽겠는데, 짜증도 치솟는데, 그렇다고 그를 원망할 수도 없어서 더 싫었다.

아까 황후 폐하의 살기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녀는 오를 황자 전하의 화풀이를 위해서라면 나 하나쯤 눈도 깜짝하지 않고 송장으로 실어 내보낼 심산인 것이 분명했다.

카이델 공자도 그걸 아니까 이런 무리한 짓을 한 거겠지.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밉다. 돌아 버리게 얄미워.’

* * *

나는 또다시 황궁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영광을 얻었다. 그가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자 로이만 실장님이 찾아왔다.

그가 내방까지 방문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무심결에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가 으으윽 소리를 냈다.

“실장님!”

“로아르 양. 로아르 양의 이름으로 약 주문이 들어왔길래 내가 직접 왔어요.”

“그러실 필요 없는데……. 죄송해요.”

“죄송이라니요. 환부를 볼까요?”

그는 이불을 걷은 다음 입을 쩍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피부가 허락하는 한계까지 퉁퉁 부은 시커먼 내 다리. 응급처치로 감은 붕대에는 그새 핏물이 배어 있었다.

그건 내가 봐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에 빠진 지 사흘쯤 된 시체가 이런 꼴일지.

그는 굳은 얼굴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환부에 약물에 갠 약초를 치덕치덕 얹고 붕대를 감자 화한 기운이 전해지며 통증이 가라앉았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피부 손상이 커서 흉이 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되지 않게 최대한 애써 볼게요.”

“이거 무라에 풀이죠? 구하기 힘든 건데…….”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요.”

“감사해요. 헤헤.”

내가 너무 작위적으로 웃어서 그러는지, 실장님은 나를 못마땅한 듯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절대 안정입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해요. 실장님.”

“그럼 쉬어요.”

실장님은 나를 세상 안쓰러운 얼굴로 보며 돌아갔다.

그다음엔 에리아가 다가와 이불을 덮어 주며 물었다.

“약제실장님은 어떻게 아세요? 황궁 안에서도 거의 바깥출입을 안 하시는 분인데. 저분 사실…….”

“사실?”

에리아는 내게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연구실에서 이상한 걸 만든다는 소문이 있으시거든요.”

어쩌나. 우리 실장님은 연금술사답게 사람들의 오해를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분은 진짜로 거기서 이상한 걸 만든다. 비밀 병기 같은 것.

그러니 오해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짐짓 놀란 듯 물었다.

“이상한 것?”

“작은 인간이나 그런……. 세상에, 그런 걸 입에 담았다가는 큰일이 날 거예요!”

“그럼, 그럼.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볼 때 에리아는 휘니드 로이만 약제실장님이 뭘 만든다는 건지 전혀 몰랐다. 몰라서 더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에리아?”

“네, 시녀님?”

“나갈 때 창문을 조금만 열어 두겠어? 요만큼이면 돼.”

“주무실 때는 어떻게 닫으시게요? 못 움직이시잖아요.”

나는 재빨리 눈알을 굴리다가 그녀가 침대 위에 갖다둔 쿠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던지면 문이 딱 닫힐 거야.”

“어머, 그러네요.”

그러긴 뭘 그래! 이 아픈 몸으로 어떻게 쿠션을 저기까지 던져?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웃고 있었다.

내 머리와 감정이 얼마나 끔찍하게 어긋난 상태인지도 모르고, 에리아는 창을 빼꼼히 열어 두고 돌아갔다.

나는 서늘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님. 나는 황후 폐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감기로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하늘에 맹세코 그가 내 방 창을 넘어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냥 그가 올 것 같다는 예감에 진 것뿐이다.

그러나 창으로 들어온 새 공기가 만들어 내는 온도 차이를 느낄수록 조바심이 났다.

‘대체 언제 올 거냐고…….’

이러면 꼭 내가 그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에이씨!”

나는 쿠션을 집어서 온 힘을 다해 창으로 집어 던졌다. 그런데 창에 맞은 쿠션이 그대로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닌가!

경악한 내게, 쿠션을 붙잡은 카이델 공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자기에게 쿠션을 던졌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카이……. 공자님.”

“돌아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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