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밀리오라의 돌발 행동 (70/155)


69화. 밀리오라의 돌발 행동
2023.05.12.


오를 전하의 답은 예상대로였다. 르네 자작의 연륜이 묻은 듯한 고상한 어법의 요지는 그러했다.

‘풍부한 철광석 물량은 황제 폐하의 성취이므로, 그것을 내수로 돌려 제국을 부강케 해야 한다.’

그러자 황제 폐하가 질문했다.

“아가엘 사신의 요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그때 심장이 쿵 뛰는 기분이었다. 과연 아가엘 사신의 등장이 이 문제의 핵심이 된 것이다.

오를 전하는 대답했다.

“절대 불가합니다. 아마타족 다음으로 멸망시켜야 할 상대에게 황제 폐하의 철을 내어주다니요.”

아마타전 지휘관이었던 그레이언 전하의 대답도 큰 줄기는 다르지 않았다.

‘제국인들이 피 흘려 쟁취한 철광석은 오롯이 제국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다만 그는 그동안 손실된 병력의 보충을 우선시해야 함을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군벌 세력의 불만을 다독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황녀 전하는 자기 차례가 오자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그녀에게 외우게 한 답변은 두 황자 전하의 중간 입장이었다.

막 전쟁을 치른 제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아마타를 적대시하고, 군부와 내수를 공평하게 배려하라는 교과서적인 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폐하, 저는 오라버니들과 다른 주장을 하려고 합니다. 제국은 아가엘에 철을 수출해야 합니다.”

황제 폐하의 얼굴도 굳었고, 황후 폐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 의자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로아르 양!’

카이델 공자가 매서운 눈초리를 내게 맞추어 왔지만, 그 자리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나였다.

하지만 내 경악도 상관없이, 황녀 전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이번 전쟁으로 매장량이 풍부한 고순도의 철광석 광산을 소유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로 그것을 사용할 역량이 부족합니다. 군과 내수가 철 소비의 우선권을 두고 경쟁해야 할 정도로요. 물론 두 분 오라버님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내수도, 무기의 비축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황녀 전하는 침착하게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이럴 때 당당하고 침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황제 폐하는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밀리오라,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그러니 철의 생산량 자체를 늘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

“아가엘은 우리보다 더 나은 철의 제련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석회석과 코크스의 공급도 원활하고요. 그들에게 제련 기술과 재료를 제공받는 대신 생산된 철을 제한적으로 수출하면 됩니다. 그것은 철광석 수출보다는 제국에 훨씬 큰 이윤을 안겨 줄 거예요.”

밀리오라 전하는 내가 파티 때 해 준 이야기를 거의 빠트리지 않고 말해 버렸다.

그녀가 기억력이 좋고 영특하다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나는 황자 전하들의 매서운 시선을 옆얼굴로 느끼며 이대로 기절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밀리오라 전하, 이건 정말 같이 죽자는 얘기잖아요!’

황제 폐하의 가늘어진 시선이 그녀와 나를 차례로 스쳤을 땐,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잠시 후 말했다.

“밀리오라, 네가 사신과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너를 어리고 철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해였구나. 오늘 경연의 승자는 또다시 밀리오라다. 다음 경연 문제는 차후에 공지하겠다.”

황제 폐하는 그대로 일어나 나갔다.

그는 아가엘과의 거래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우선 처리하기 위해 다음 경연 문제 출제도 미룬 것이다.

황후 폐하의 분노한 시선이 또 한 번 황녀 전하와 나를 스쳤다. 그녀는 화가 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뒤이어 나가 버렸다.

그런 다음에는 오를 전하가 다가와 밀리오라 전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소름이 끼치는지, 론드 경을 불러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르네 자작이 오를 전하의 앞을 가만히 막아서며 전하, 하고 속삭였다.

“건방진 것!”

오를 전하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레이언 전하가 남아 있었다. 그도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아예 처음부터 나만 쏘아보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나라는 듯이!

이제는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내가 원망을 가득 담아 황녀 전하를 바라보자, 그녀는 몸을 획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론드 경은 나를 보았다가 황녀 전하를 뒤따라 나갔다.

나도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누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카이델 공자였다.

그는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몹시 심각하게 물었다.

“무슨 계획인 겁니까? 로아르 양.”

나는 너무 억울해서 반쯤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게 계획 같으세요?”

“…….”

그는 자신도 나만큼이나 당혹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굳혔다.

“이만 가 볼게요. 공자님.”

나는 황녀 전하와 론드 경을 따라잡으려 종종걸음으로 정무 홀을 나섰다.

그런데 나이 든 하녀 둘이 내 앞을 막아섰다.

“로아르 시녀님?”

“그런데요?”

“황후 폐하께서 부르시니 따르십시오.”

온몸에 머리털이 선다는 느낌.

나는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 밀리오라 전하와 론드 경의 뒷모습을 보다가 하녀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 뇌리에 남아 있는 가장 선명한 폭력의 기억은 툰바르산 아랫마을, 촌장 아들놈의 돌팔매질이다.

어릴 적에 백작저로 온 뒤로 백작 부인 때문에 매질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이제 어지간한 매질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황후궁에 도착했을 때, 황후 폐하는 말이 없었다. 나를 가증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은 밀리오라 전하를 보던 그것과 같았다.

‘이번에는 쉽게 벗어날 수 없겠어.’

황후 폐하의 시녀인 미리암 호르테 자작 부인은 앞에 놓인 스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라가세요. 종아리를 걷어요.”

‘옘병.’

나는 속으로 뇌까리며 그 위에 올라섰다. 치마를 걷자 그녀가 회초리를 들고 내 옆으로 섰다.

나는 황후 폐하에게 뭐라고 해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친딸도 그토록 멸시하는 사람이다. 사생아 시녀가 예를 어겨 가며 하는 해명을 들어 줄 리 없었다.

“윽!”

첫 번째 회초리가 날아왔을 때, 나는 내 종아리가 반으로 쪼개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녀장의 회초리질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며 이쯤 견딜 수 있다고 이를 악물어 보았지만, 그 이가 달달 떨릴 정도로 아팠다.

그렇게 치 떨리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회초리 두 개가 부러졌다.

시녀가 새 회초리를 꺼내 들었을 때, 나는 눈앞이 휘청하여 스툴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황후 폐하는 그제야 내게 말을 걸었다.

“네가 오늘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니, 로아르?”

아마 첫 번째 회초리가 부러졌을 때쯤 물었다면 나는 그녀에게 싹싹 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쯤 되니 조금 덜 맞는 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싶었다.

이미 내 종아리는 만신창이였다. 그녀가 나를 사람처럼 여겼다면 내가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말을 걸었을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황후 폐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이를 악물고 버텼는지, 말을 하려 입을 여니 턱이 뻐근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판단을 그르쳐 황녀 전하께 어리석은 답변을 하시게 했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는 더 분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일갈했다.

“아직 제 죄를 모르는구나!”

그러자 시녀가 소리쳤다.

“일어서시오!”

내가 일어나려다 비틀거리자 하녀들이 달려와 나를 부축해서 스툴 위에 세웠다.

그리고 다시 회초리가 날아왔다.

“끄흑!”

맞는 건 나인데, 황후 폐하가 더 분에 차 바들거리며 말했다.

“오늘의 승리는 오를의 것이어야 했어. 그 애야말로 모든 승리의 영광을 차지해야 한단 말이다!”

황후 폐하가 ‘승리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와중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내뿜는 감정이 마치 지독한 열등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를 전하가 얻지 못한 모든 것에 분노한 것 같았다. 건강한 몸, 전쟁 영웅의 칭호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평생 가질 수 없을 오를 전하에게는 이번 경연의 승리가 뼈저리게 중요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나는 황후 폐하가 드러내는 분노 속에 담긴 열등감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그레이언 전하도 그녀의 아들인데, 어째서 오를 전하가 아우에게 느껴야 할 감정을 황후 폐하가 대신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지…….

내가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여 더 화가 났는지 황후 폐하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비천한 것이라 깨달음이 더디구나.”

그러자 시녀의 회초리가 더 높이 올라갔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 진저리를 치며 눈을 꽉 감았다. 나도 더는 견딜 여력이 없었다.

‘빌어먹을.’

“황후 폐하!”

그때 밀리오라 전하가 반쯤 달리듯이 들어와 황후 폐하 앞에 엎드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황후 폐하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래. 늘 네 잘못이지. 여기서 그걸 모르는 자가 누가 있을까. 너는 태어난 것부터 잘못이었어. 나는 어째서 이걸 계속 견뎌야 하는 거지?”

그때 나는 밀리오라 전하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산산이 깨어져 나가는 걸 보아야 했다. 또다시 이가 악물렸다.

그래도 밀리오라 전하는 황후 폐하 앞에서 물러나지 않고 버티려 했다. 그녀는 바닥에 두 손을 짚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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