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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오를의 저의는 (69/155)


68화. 오를의 저의는
2023.05.11.


그러자 카이델 공자도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연회장을 바라보다 카이델 공자가 언젠가부터 내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해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정도 아니고 호의도 아닌, 저의를 숨긴 미묘한 태도로.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는 언젠가 불을 뿜는 독수리의 발톱을 펴고 빚을 받으러 올 것이다.

과연 그때 내가 그에게 지불할 것이 있을까…….

그사이 춤곡 연주가 끝나고, 황녀 전하가 살짝 상기된 볼로 자리로 돌아왔다.

“새 구두가 생각보다 불편하네?”

“신으시던 구두를 가져오게 할까요?”

“아니야. 됐어.”

황녀 전하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으며 말했다.

“너도 춤추고 싶으면 춰. 나는 그런 것 상관 안 하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오늘은 시녀로서 참석한 거니까 전하의 곁을 지켜야지요.”

나는 내가 뱉은 말이 간지러워서 솜털이 다 일어서는 것 같았다.

황녀 전하의 표정마저 굳기에 나는 역시 실수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서 보고 함께 얼굴이 굳었다. 아가엘 사신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저는 아가엘 사신으로 방문한 재상 옐로이입니다. 황녀 전하께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황녀 전하는 작게 코웃음 치며 그를 외면했다. 그녀는 사신에게 모욕이라도 퍼부을 기세였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 황족께서 사신을 맞이하는 관례에 따라 아가엘 재상 옐로이 님께서 춤 신청을 하셨습니다.”

황녀 전하는 지금이 예법 챙길 때냐고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나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서 그녀에게 어서 나가라고 눈짓했다.

그녀는 입을 앙다물었지만 내가 눈이 뻐근할 정도로 부라리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원하신다면요.”

그녀는 쌩한 얼굴로 그와 함께 플로어로 나갔다.

나는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플로어로 나가려던 귀족들은 자리에 멈추어 황녀 전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에서 분노까지 다양한 표현이 떠올라 있었다.

심지어 카이델 공자도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나도 잔뜩 억울한 얼굴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가엘과는 국교를 중단한 적이 없어요. 사신을 모욕해서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러자 그는 쌩한 얼굴을 돌리더니 근처에 있던 영애에게 멋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이며 춤을 청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활짝 웃으며 그를 따라 플로어로 나갔고, 영애들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 카이델 공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는 춤 상대를 꽃이 피어난 듯 보이도록 한 바퀴 돌리며 나를 흘겨보기도 잊지 않았다.

그 생생한 시선은 ‘내가 춤추기 싫다고 했잖습니까!’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저게 무슨 짓인가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지금 황녀 전하에게 몰린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몹시 찜찜해졌다.

‘쳇……. 누가 도와 달래?’

춤곡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밀리오라 전하는 화가 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내게 쏘아붙였다.

“너 미쳤니? 지금 내 꼴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다들 나를 반역자 보듯 하잖아!”

“전하, 진정하세요.”

“진정? 너 내가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씩씩댔다.

나는 그녀가 날 언제 오냐오냐했는지를 정말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했다.

“거래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자를 모욕해서 좋을 것 없어요. 한 사람 정도는 환영의 뜻을 보여 줘야지요.”

“내 말 뭐로 들었어? 폐하께서는 저자가 꼴도 보기 싫어 저 구석에 처박아 두신 거라고. 아가엘과 거래는 무슨!”

“진정하세요, 전하. 저자가 제국의 철광석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몰라요.”

“……?”

황녀 전하는 부채질을 뚝 멈추고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 생각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황녀 전하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가, 입을 앙다물었다.

“……그게 잘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모르죠.”

“로리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요, 나중에 폐하 앞에서는 철광석 수출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셔야 해요. 그것은 무기 제작과 내수에 공평하게 써야 한다고 주장하셔야 해요. 공부하실 자료는 다 만들어 놨어요.”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구체적인 건 경연이 끝난 뒤에 로아르 백작님과 상의해 볼게요. 백작님이 검토해서 현실성이 있다고 하면 교섭해 주실 거예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끈했다.

“얘, 그건 내 공으로 삼아야지!”

“전하,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몸을 낮추셔야 해요.”

“……쳇. 알았어.”

그녀는 고개를 팩 돌렸다가 다시 나를 흘겨보았다.

“이거 아주 웃기는 계집애야.”

나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파티는 밤까지 이어졌다.

* * *

아카데미의 방학은 한참 남았지만, 칼린 앙카르트는 시험 기간과 다름없이 공부했다.

그녀의 휴식이란 어쩌다 황제 탄신일 파티의 여운을 곱씹으며 혼자 샐쭉 웃는 정도였다.

앙카르트 자작은 황제의 탄신일 파티에서 2황자가 딸에게 춤을 청한 사실에 흥분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쁘지도 않은 애가 혼자 앉아 있으니까 안되어 보이셨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얼마 후 황궁에서 선물이 배달되었을 때는 그녀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앙카르트 자작 부인이 그 일을 알았다면 그 소문이 수도 전역에 퍼지기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자작은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고, 딸과 둘이서 선물을 열어 보기로 했다.

“2황자 전하께서 너를 좋게 보신 게 아니냐! 어서 열어 보아라. 어서.”

칼린은 먼저 카드를 열었다.

「다음에는 ‘붉은 눈물’을 구경하게 해 주겠나?

-오를.」

그녀는 파티에서 자리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1황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연회장을 관조하며 사람들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메시지를 보내다니…….

앙카르트 후작은 더 흥분했다.

“1황자 전하께서? 지난번에 너에게 춤을 청한 건 2황자 전하이시지 않니. 두 전하께서 모두 너에게 반하셨다고? 이거야말로 가문의 경사가 아니냐! 제기랄, 하지만 둘 중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하는지……!”

“아버지, 흥분하지 마세요. 진정하시라고요.”

칼린은 부친을 가볍게 나무라고는 선물을 풀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제는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상자 안에는 생화로 된 화려한 화관이 들어 있었다. 화관이란 환영과 영광의 선물이었다.

‘대체 어디로의 환영일까…….’

예상 밖의 상황에 칼린의 눈이 다시 빛을 냈다.

“어머니께는 비밀로 하세요. 이 일은 절대 소문이 나면 안 돼요.”

“그거야 알겠다만. 칼린, 설명을 좀 해 보거라.”

칼린은 화관을 다시 상자에 담으며 말했다.

“아버지, ‘붉은 눈물’은 제값을 했어요.”

자작은 딸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벌컥 소리쳤다.

“어디 가느냐? 오를 전하께서 너를 마음에 두신 마당에 지금 공부나 하고 있을 때니? 드레스 장인을 불러와야지!”

그러나 문을 나서는 그녀의 대꾸는 건조했다.

“저는 조기 졸업을 해야겠어요.”

9. 세 번째 경연

두 번째 경연의 답을 보고하는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그래도 한번 경험해 봤다고, 전보다는 덜 떨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밀리오라 전하가 대답해야 하는데, 그녀는 틀린 말을 할 때도 당당해 보일 정도로 말에 재능이 있었다.

밀리오라 전하는 오늘 더 특별히 힘주어 꾸몄다. 파티용 화려함이 아니라 황족들 사이에서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단장이었다.

그녀가 준비를 마치고 나가자 론드 경은 멈칫하며 얼굴을 획 돌리고 말했다.

“준비되셨습니까, 전하?”

“응. 가자, 론드 경.”

나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저 마른 몸에 소녀 같은 외모의 여자가 저런 남자를 당혹하게 하는 모습도 말이다.

경연 홀은 지난번과 같은 광경이었다.

각 황자 전하들의 시종과 호위 기사가 무리를 지어 황제 폐하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잘해야 하는 날이 아니라 덜 잘해야 하는 날이다. 그러니 긴장하지 말자 생각하고 있을 때, 황녀 전하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돌아보니 오를 전하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 인사를 드렸는데 말이다.

그는 특유의 차분한 웃음을 띠며 밀리오라 전하 앞에 서더니 그녀의 귓가에다 무엇을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론드 경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내가 오를 전하를 그녀에게서 떼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그는 이미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사람을 순간 멈칫하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이다.

오를 전하는 그 불쾌한 웃음만 남기고 본인의 무리로 돌아갔다.

“밀리오라 전하, 괜찮으세요?”

“…….”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그녀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전하!”

나는 그녀를 속삭여 불렀지만 밀리오라 전하는 입술만 깨물었다.

그때 폐하가 들어와 그녀는 표정을 재빨리 정리했다. 그녀가 감정을 추스른 것은 다행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조마조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시종은 앞에 나와 크게 말했다.

“‘새로이 복속한 아마타의 철광석을 가장 효율적으로 분배할 방안을 마련하라.’ 황자녀 전하들께서는 지금부터 두 번째 경연의 답을 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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