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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우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68/155)


67화. 우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2023.05.10.


플로어 위에서, 칼린 앙카르트는 눈을 반짝이며 그레이언을 쳐다보았다.

그레이언은 그 기묘한 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여자로서의 은근한 유혹은 담겨 있지 않았다. 타가르에게 익숙한 동경과 유혹의 시선이 거기 없어, 오히려 그를 더 집중하게 했다.

대신 총기와 탐욕이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많은 남자들은 저 위험함을 매력으로 착각할 것이다.

그레이언은 그 위험함이 싫지 않았다.

원래 불은 적절한 거리만 지키면 더없이 유용하지 않은가.

칼린은 저를 살피는 그레이언의 시선이 싫지 않아 느긋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툰바르산맥에는 이때도 눈이 온다지요? 눈이 활짝 핀 봄꽃을 죽여 놓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제국 사교계에 툰바르산맥에 대해 아는 영애가 있다니.

아카데미 차석이라더니, 미리 조사하여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레이언은 그녀의 철저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곳에 가득한 들꽃의 색이 희어 그리 보일 뿐, 눈이 녹으면 꽃들은 닫은 봉오리를 열고 다시 피어나. 아마 병사들이 자세히 지켜보지 않아서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야.”

“작은 것도 면밀히 살피시는 전하의 현명함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레이언은 부드럽게 웃으며 칼린을 리드해 갔다.

그녀가 말했다.

“‘붉은 눈물’이 돌아왔어요.”

칼린 앙카르트가 싸움을 걸어오는 방식은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레이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축하하지. 도난 기사를 본 것을 기억하는데, 그 소식은 미처 보지 못했군.”

“신문에 나지 않았으니까요.”

칼린은 감히 타가르를 빤히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레이언은 자신의 미묘한 표정 변화라도 잡아내려는 그녀의 시선에 냉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기죽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 그걸 저택으로 배달해 돌려보냈다고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더구나 해적의 자멸 기사가 크게 난 뒤에 말이에요.”

“…….”

“도둑이 더없이 고귀한 양심을 지녔음을 알게 된 것은 저의 기쁨이었지만요.”

두 사람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교환되고, 칼린은 웃었다.

그레이언은 그 시선 속에서 그녀가 남다른 생물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배고픈 짐승은 먹을 걸 준다고 길들여지지 않는다. 로카르드도 그걸 알기에 그녀를 멀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앙카르트라는 거대한 재력에 매혹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신분이 비천하여 곁에 두기에는 망설여지긴 했지만, 고귀한 자라면 이미 첫 번째 사자의 자식이 곁에 있지 않은가.

그레이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기는. 앙카르트가의 명망을 드높이기 위해 그 보석을 샀다 했지.”

“더 극적인 이야기가 생각날 때까지 보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함구하려고 해요.”

“극적인 이야기라…….”

“하나 만들까 싶기도 하고요. 전하께서 도와주시겠어요?”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장래에는.”

“장래에는, 요.”

“지금은 겉으로는 거리를 두어야 할 때거든.”

겉으로는.

칼린은 그 말의 진의를 탐구하느라 그레이언의 눈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의 침묵에서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으나, 그녀는 지금이 조를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녀는 그레이언 황자를 제치고 ‘붉은 눈물’을 낙찰받았다. 황자가 웃돈을 얹어 주겠으니 팔라는 제안도 거절했다.

그런 후에 도난당한 ‘붉은 눈물’은 해적을 꼬여 내는 미끼 역할을 한 다음 기적적으로 그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 그레이언 황자가 연관되어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바보가 아닌가.

물론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칼린은 자신이 꽤 그럴듯한 카드를 손에 쥐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2황자가 지금 그 사실을 몸소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돌연한 춤 신청, 저 미소와 저를 향한 집중력, 모두.

음악이 끝나자 그레이언은 칼린을 플로어 밖으로 데려다주며 말했다.

“파티를 좋아하나, 앙카르트?”

“원하신다면 좋아하겠습니다.”

“그럼, 종종 보지.”

깊이 머리 숙여 황자를 배웅하고서,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권력의 근처에 다가선 기분은 이런 흥분감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며 그것을 쾌감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차가운 샴페인을 들이켜며 땀을 식혔다. 입가에는 저절로 뜻 모를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그런 칼린을 감상하듯 응시하는 조용한 시선이 있었다.

* * *

나는 밀리오라 전하가 다시 플로어로 나간 후 전하의 좌석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사이 카이델 공자는 두세 명과 춤을 추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는 갑자기 방향을 꺾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밖에서 아는 척 좀 하지 말라고요!

“무슨 일이세요?”

내가 발끈 신경질을 내며 말했음에도, 그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빠르게 속삭였다.

“나와 심각하게 대화하는 척 좀 해요.”

“왜요? ……아.”

나는 주변을 쓱 훑어보고 이유를 바로 이해했다.

수많은 부채 뒤, 영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등을 향하고 있었다. 기대로 꽉 차 반짝이는 눈알들과 함께.

그는 나를 피난처로 삼으려는 것이다. 춤이 싫은지 여자들이 싫은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삐죽 심술이 나서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제가 왜 도와드려야 해요?”

“저에게 빚진 것 없습니까?”

치사하긴!

당연히 그에게 대가를 치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좀 찜찜하단 말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 말했다.

“그걸 이렇게 쪼잔하게 받아 가시게요?”

“그럼요?”

“공자님의 빚을 갚았다고 하려면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할 텐데요.”

나는 무심결에 뱉었다가, 카이델 공자의 흐뭇한 눈빛을 보고 아차 싶었다.

“감동적이군요. 절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흐음.”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진심으로 기쁜 듯도 했지만 나를 놀려 먹는 것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래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빚은 빚이고, 그걸 빌미로 아무 때나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나는 문득 무슨 소리를 들은 척하며 말했다.

“황녀님이 부르신 것 같아요, 그럼 이만…….”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살짝 인상을 쓰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안 부르셨어요. 제가 확실히 들었습니다.”

“안 부르신 걸 어떻게 들어요? 부르셨으니까 들린 것 아니고요? 이만 가 봐야…….”

“가만 좀 있어 봐요!”

그가 약간 신경질을 내듯 내 앞을 살짝 막아섰다.

그 말투가 예전으로 돌아간 듯해 조금 웃음이 나왔다. 잘난 공자님과 방황하는 사생아가 비밀을 공유하던 잠깐의 시기 말이다.

나는 황족의 시종들끼리 일 이야기를 하는 척, 괜히 머리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꼽기도 하며 말했다.

“그래도 인기는 좋은 것 아닌가요?”

그러자 그도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한 포즈를 하며 말했다.

“대부분은요.”

“대부분이 아닐 때는요?”

“지금이죠. 원래도 인기가 과했는데 승전파티 이후 파티에 참석하지 않다 보니, 오늘 특히 열기가 과하네요.”

그러고 보니 그는 제국의 전쟁 영웅이었다. 하도 태연한 척을 해서 까먹었었다.

“파티에 더 많이 나가셔야겠어요. 자주 보면 덜해지겠죠.”

“바빠요. 그레이언 전하를 황태자로 만들어 드려야 하고, 아카데미도 조기 졸업해야 하고.”

“…….”

대체 이건 무슨 자신감일까.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런 자기 확신이 부럽고 신기하면서 살짝 질투도 났다.

나는 놀라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가, 재빨리 연극으로 돌아갔다.

“그런 말씀 막 하셔도 괜찮아요?”

“소문내게요?”

나는 머리를 붕붕 저었다.

“다행이에요. 우리 목숨은 떼려야 뗄 수 없는데.”

그는 해적 소탕 때 그레이언 전하께 내 실수나 배신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약속하고 나를 살려 두었다.

내가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 그도 목이 함께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굳이 그렇게 묘하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 그 말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아세요? 오해를 살 일은 삼가 주세요.”

“…….”

그는 또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당신을 어떻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요.”

“하…….”

아니, 난 별로 당신이 말해 주었으면 싶지 않다고요. 오히려 지금 그쪽이 나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인 것 같은데!

나는 그에게 말려들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영애들에게서 도망쳐 쉬는 김에 나를 놀려 먹는 재미까지 챙기고 있었다.

이 인간과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지.

하지만 우리의 채무 관계를 확인하고 나니 네 맘대로 해라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러려고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헛헛하게 말했다.

“선물 감사드려요. 그 베개, 책상에서 엎드려 자기에는 정말 최고더라고요.”

“그럼요. 아카데미는 유행을 선도합니다.”

뜬금없는 자부심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가 보셔야 하지 않아요?”

“좋아요. 플로어로 가죠.”

그는 내가 자기와 춤을 추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네. 전하!”

나는 마치 황녀 전하가 부른 것처럼 얼른 그녀 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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