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첫 번째 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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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첫 번째 무도회
2023.05.09.
그녀들의 손에 들린 부채가 동시에 빨라지는 걸 보니 실소가 나왔다.
‘왜 아니겠어.’
막 입장한 카이델 공자는 오늘 특별히 더 매끈하고 찬란한 모습이었다.
누가 보면 제 생일인 줄 알겠다.
영애들의 반응에 비추어 내 평가가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그런 걸 어쩌냔 말이다.
그는 그레이언 전하의 좌석으로 가면서 내게 스치듯 눈인사를 했다. 나는 엉겁결에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손님을 맞았다.
“뭐 하니?”
백작님이 황녀 전하에게 예를 갖추자, 그녀는 내게 백작님과 대화하라고 고갯짓했다.
나는 머쓱하게 백작님과 한쪽으로 나왔다. 그는 내 가슴의 시종 메달을 응시하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
뭐지.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그냥 ‘저는 잘 먹고 잘사는 중인데, 백작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면 될걸.
백작님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좋아 보이는구나. 로리샤.”
“그…… 런가요? 백작님도 좋아 보이세요. 늘 좋아 보이시지만요.”
나는 시선을 슬쩍 들어 백작님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거기서는 황녀 전하께 인사를 마친 백작 부인과 미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마주친 건 백작 부인의 질시하는 시선이었다.
나를 지금 이 자리로 보낸 건 자기였으면서도, 내 가슴의 메달이 못내 아까운 거다.
미샤도 눈길이 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애는 여전히 내가 자기 걸 빼앗아 갔다고 믿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변했는데, 저들은 예전과 똑같다니.
내가 어색하게 웃자 백작님이 물었다.
“첫 번째 경연에서 좋은 결과를 냈다지?”
“초심자의 행운이었을 뿐인걸요.”
그러자 백작님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적당히 눈치를 보아 가며 하고 있다는 데 안심한 것이었다.
나도 바보는 아닌걸.
그러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백작님과 오랜만에 만나도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 심란해졌다.
“저는 이만 밀리오라 전하께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러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집으로 연락하거라. 로리샤.”
“네, 백작님.”
나는 자리로 돌아가 멀리 백작님과 백작 부인이 손님들과 인사하고, 미샤가 또래 영식들의 춤 신청을 받아 플로어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회장 한쪽에 따로 마련된 테이블에 착석하는 중년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연회장 내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주변에는 마치 울타리가 쳐진 듯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서야 그의 가슴에 달린 휘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 미쳤어!’
그는 아가엘의 사신이었다.
나는 밀리오라 전하에게 가까이 속삭였다.
“황녀 전하. 저쪽에 아가엘인이 앉아 있어요.”
“봤어? 아가엘 사신이야. 폐하께 철광석을 구걸하러 왔대. 양심도 없지.”
‘헉. 저기요, 전하. 그런 걸 알았으면 이 시녀에게도 말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지 않으셨어요?’
“사신이 오면 파티를 열어 주는 게 관례야. 귀족들과 만나 정보도 주고받고 하라고. 하지만 아가엘 사신에게? 어림도 없지. 그래서 폐하께서도 탄신일 파티를 당겨 열어서 저자를 파묻어 버리신 거야.”
파묻다니 뭘요…….
표현이 듣기 좀 그래도, 사신 맞이 파티를 열지 않은 사실은 황제 폐하의 심기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제국은 아마타족과 전쟁을 벌였고, 아가엘과 표면적으로는 국교를 단절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가엘 사신을 대놓고 홀대할 구실이 없으니 이렇게 소심하게 화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이 그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래요?”
“뭘 어떡하셔, 참고 있으시겠지. 저자의 목을 말에 실어 돌려보내는 대신 저기 앉혀 두셨잖아? 음식 아깝게.”
나는 황녀 전하의 말을 들으면서 시선은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식들 몇이 황녀 전하에게 춤을 청하기 위해 눈치를 보는 게 눈에 띄었다.
황녀 전하도 이미 그걸 눈치채고 신청을 받아들일지 말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그럴 때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두 번째 경연 답은 뭐라고 하기로 했어?”
그때 티 파티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녀들은 황녀 전하가 이 파티에서 얼마나 독보적으로 아름다운지 찬양하며 즐겁게 떠들었다.
그들이 돌아가자 가장 발 빠른 영식 하나가 황녀 전하에게 춤 신청을 했고, 그녀는 못 이긴 척 새침한 표정으로 플로어로 나갔다.
나는 지금까지 파티를 밖에서 구경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가운데서 관조하니 신기한 부분이 많았다.
파티는 엄청난 눈치 싸움이었다.
누구와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았는지, 누가 누구와 유독 오래 대화하는 중인지, 누구에게 춤 신청을 해야 할 타이밍인지.
참석자들은 그런 것을 살피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다가 카이델 공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분명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 허리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지금 저 자식이 나한테 춤 신청을 하려고 한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하면 저 인간이 얼마나 비웃을까 싶었다.
아니, 저 인간이라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그러면 지금부터 배우면 되겠군요!’ 하고 지껄일지도 모른다.
‘로리샤 양은 닥치면 하잖아요.’ 하고 능글거리면서.
하지만 그때 나와 그의 사이로 빨간 머리 영애가 끼어들었다. 미샤였다.
미샤의 모습과 몸짓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저 계집애, 밖에서는 저렇게 얌전한 척을 하는구나.
나는 미샤의 오목조목 예쁜 얼굴과 그런 내숭이 퍽 어울린다는 걸 깨닫고 더 기가 찼다.
“오랜만에 뵈어요. 카이델 공자님. 방학은 즐겁게 보내고 계신가요?”
“물론입니다. 로아르 양. 오랜만에 뵙는군요.”
카이델 공자는 미샤가 자기 앞을 막아선 순간 살짝 멈칫했지만, 꽤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사람 마음이란 참 이상한 거다.
카이델 공자가 나타나자 짜증이 났으면서, 미샤가 그를 가로채니 그것도 그것대로 기분이 나빴다.
카이델 공자는 몇 마디 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미샤는 눈을 내리깔고 ‘네, 네.’ 하며 그의 앞에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저 계집애 뭐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나서야 미샤가 뭘 원하는지 깨달았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미샤. 미샤…….’
카이델 공자는 결국 말했다.
저 인내심 가득한 신사다운 태도가 가짜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로아르 양,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카이델 공자의 대답에 미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을 때, 한 영애가 카이델 공자 앞으로 끼어들었다.
‘저건 또 누구?’
갈색 머리의 키가 큰 영애는 미샤를 살짝 가리듯 서더니 우아하고도 자신감 넘치게 인사했다.
누가 봐도 갈색 머리 영애가 미샤에게서 카이델 공자를 채어 가려는 중이었다.
“카이델 공자님. 또 뵙네요.”
“앙카르트 양!”
미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앙카르트라니, 그 대부호 자작의 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미샤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돈도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에 좀 의아해졌다.
천하의 미샤 로아르가 주눅이 들다니.
“미샤 양, 카이델 공자님과 대화 중이셨나요?”
그걸 보면 모르냐고.
앙카르트 영애는 노골적으로 카이델 공자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손에 땀이 쥐어질 정도로 흥미진진함을 느꼈다.
미샤 계집애 성격에 가만있을 리가 없다.
자, 미샤!
“아니에요. 카이델 공자님을 오랜만에 뵈어 인사를 드린 참이었어요. 그럼.”
미샤가 꼬리를 말고 물러나다니, 나는 내가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카이델 공자가 짧은 묵례로 미샤를 배웅하자 앙카르트 영애가 말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며 웃는 표정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저를 이대로 방황하게 두실 건가요?”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앙카르트 양?”
“칼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제는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요?”
나는 그때 연회장 내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이델 공자와 칼린 앙카르트에게 날아가 꽂히는 걸 보았다.
그는 2황자 전하를 대리하는 역할 상 사교계의 인기 관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춤 신청은 여자의 자존심이 걸린 꽤 심각한 일이니, 그는 오늘 밤 이를 악물고 모든 영애들과 춤을 춰야 할지도 몰랐다.
저런 게 유명인의 삶인가.
나는 처음으로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한 1초 동안만.
카이델 공자가 예의 바른 웃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을 때, 그녀의 손을 가져가는 남자가 있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칼린은 그레이언 전하에게 손이 붙잡힌 채 머리를 숙였다.
그레이언 전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와 춤추지. 앙카르트. 로카르드, 괜찮겠지?”
카이델 공자는 ‘전혀요’ 하듯이 가볍게 묵례했고, 칼린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2황자 전하.”
그레이언 전하가 칼린을 데리고 플로어로 나가자 파닥거리던 영애들의 부채가 일제히 느려졌다.
그리고 부채 뒤의 눈동자들은 즉시 재빠르게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다음번 카이델 공자에게 춤 신청을 받을 영애가 누구일지, 그의 동선에 언제쯤 끼어들지 탐색하느라 말이다.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공자님, 오늘은 우리 절대 아는 척하지 맙시다.’
나는 저쪽 테이블에 울상을 하고 앉은 미샤를 바라보았다.
미샤 로아르의 콧대를 꺾은 영애가 있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나는 어쩐지 초라한 표정을 지은 것 같은 미샤를 보며,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 모습이 보기 고소해야 하는데 왜 또 짠한지.
‘미샤. 그렇게 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