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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새로운 과제 (66/155)


65화. 새로운 과제
2023.05.08.


아가엘은 스마일란에서 철광석을 수입하면 호위 군함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나야 하는 바다가 악명 높은 공해였기 때문이다.

스마일란 입장에서는 굳이 팔지 않아도 되는 철광석을 파는 대신 그 호위 군함에 자국의 일반 상선을 딸려 보내 공짜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해적이 사라지자 호위 군함의 필요성도 사라졌다.

스마일란은 철광석을 수출하지 않아도 아쉬운 게 없었고, 반면 아마타족의 철을 잃은 아가엘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스마일란은 철광석 가격을 크게 올려 부르거나 다른 조건을 붙였을 것이고, 결국 거래가 틀어진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의 시발은 공해의 해적을 제거한 카이델 공자였다.

“그러면 공자님 때문이 맞아요, 아니에요?”

카이델 공자는 당혹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레이언 전하 때문입니다. 저는 당당하게 책임을 전가하겠습니다.”

“하…….”

나는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뻔한 걸 참았다.

그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물었다.

“설마 거기까지 내다보고 하신 일인가요?”

“크흠.”

카이델 공자는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가 주먹으로 가린 입은 분명 웃고 있었다.

저 남자로 인해 아마타전의 진짜 주동자인 아가엘 왕국이 스스로 제국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무서운 인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어쩐지 오싹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마지막까지 사신의 방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황녀궁은 고립된 곳이었고, 밀리오라 전하는 정무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끄러미 보는 내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다가 말했다.

“이번에도 왜 도와주느냐고 물을 차례입니까?”

“공자님은 알려 주시지 않을 거고요.”

“효율적인 대화, 즐겁군요.”

나는 헛헛하게 웃었다. 이미 들은 소식을 귀에서 꺼내 돌려줄 수도 없다.

이놈은 언젠가 이자까지 받아 갈 놈이니까 그렇게 고마워할 일은 아닌가 생각하자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아무튼 감사드려요. 공자님. 큰 도움이 되겠어요.”

“오히려 제 기쁨입니다.”

그는 짐짓 우아하게 인사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서 몸을 획 돌렸다가 다시 돌아섰다.

“2황자 전하께 전해 드리세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못하겠다고요!”

나는 난감하게 웃는 그를 내버려 두고 돌아왔다.

아가엘의 철광석 수출 요구로 이제 경연 문제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제국에 남아도는 철광석을 아가엘에 수출할 것인가, 말 것인가.’

두 황자 전하의 답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절대 불가.

아마타전에는 2황자 전하와 제국의 유력가가 2년 가까이 큰 희생을 치렀다.

이번에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거기 투입된 인력과 물자의 규모는 엄청났다.

그 발단이 된 적국에게 철광석을 나눠 준다니,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답을 내야 했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감정에 호소해서, ‘그레이언 황자 전하의 노고와 제국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습니다!’ 정도면 충분하다.

이 급격한 상황의 반전은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나는 가장 무난한 결론을 얻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 *

다음 날 도서관에 갔을 때 내 앞자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의 조사는 막바지였으니 카이델 공자가 도서관에 더 나오지 않을 것은 예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빈 책상을 보자 괜히 허전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

나는 내 책 무더기 곁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솜을 넣어 만든 팔뚝처럼 가늘고 긴 베개 같은 것이 접혀 있었다.

나는 카드를 펼쳤다.

「아카데미에서 유행하는 물건이에요. 공부하다가 잠깐 눈 붙일 때 좋아요.」

얼굴이 잘생기면 글씨도 예쁜가?

그의 반듯하고 유려한 글씨는 좀 재수 없었지만, 나는 카드를 다시 봉투에 곱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참 쓸데없는 짓도 잘해.”

* * *

내 평온이 깨어진 건 밀리오라 전하의 부름 때문이었다.

그녀의 침소로 가니 그녀는 옷장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옷장을 쏘아보며 내게 말했다.

“파티 드레스 좀 골라 봐. 너, 시녀가 좀 알아서 못 하니?”

“파티요?”

“폐하의 탄신일 파티가 사흘 뒤로 당겨졌어. 폐하께서 주최하시는 파티는 싫은데…….”

그녀는 음산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는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폐하가 주최하시는 파티에는 황후 폐하가 참석하실 테니까. 그분의 시선이 무섭고 싫어서 그러는 거다.

그녀는 나를 획 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잘 꾸며야 하는 것 알지? 내 체면 깎이게 하지 마.”

생각해 보니 내게는 아직 입지 않은 열한 벌의 드레스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드레스를 고르려 오만상을 쓰고 옷장을 쏘아보았다.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 드레스 하나를 꺼내자, 그녀가 짜증을 냈다.

“내가 너한테 뭘 바랐는지! 경연 준비는 잘하고 있어? 너는 그런 거나 해.”

내 드레스 고르는 안목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으므로, 그녀의 짜증이 별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카이델 공자에게 아가엘 사신이 온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할 수가 없어 간략하게만 대답했다.

“네. 준비는 걱정 마세요.”

“이번에도 이겨야 해. 알지?”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장래 희망이 황제세요?”

내가 너무 훅 들어갔다는 건 안다. 하지만 밀리오라 전하가 속내를 꺼내 놓게 하려면 정곡을 찌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과연 그녀는 눈이 커다래져서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주위를 살폈다.

“너, 미쳤니! 그런 말을 하다니 날 죽일 셈이야? 황제 같은 건 거저 줘도 안 해! 내가 황족으로 태어난 걸 얼마나 후회하는지…….”

뱉지 말아야 할 말을 뱉어 버리고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다독이듯 말했다.

“그러면 어째서 경연 승리를 욕심내시는 거예요? 전하도 그러셨잖아요. 오라버니 전하들이 무서우시다고요.”

“그거야……!”

“전하는 첫 번째 승리를 거머쥐셨어요. 다음 승리는 황자 전하들께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요, 전하?”

“너! 일하기 싫으니까 고작 하는 소리가 그거니?”

“전하의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잘 준비할게요. 하지만 전하께서 진심으로 황자 전하들과 경쟁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면 승리를 욕심내시는 건 좋지 못해요.”

“……건방진 계집애!”

황녀 전하는 몸에 대어 보려고 꺼냈던 드레스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소파로 갔다. 그녀가 씩씩거리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렸다.

다가가 보니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맞는다고! 하지만 나는 애들이 나를 대단하게 봐 주는 게 기분이 좋았단 말이야.”

그녀는 오빠들을 이기는 승리감이 아니라 티 파티 멤버들에게 우쭐대려고 경연을 욕심낸 것이다.

어쩌면 좋아.

나는 미샤에게도 못 느껴 본 딱한 감정을 느꼈다.

세상의 주인인 타가르에게 이런 것까지 느껴야 하는지, 원.

그녀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말했다.

“이번에 지면 애들이 나를 위로하려고 할 텐데, 난 그런 소리 정말로 듣기 싫어.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한심해져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나는 소파 앞에 앉아 다독이듯 말했다.

“그러면 제가 티 파티 영애들에게 미리 언질을 줄게요. 시녀는 원래 주인의 뜻을 대신 전하기도 하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렇지? 원래 황족들은 불편한 얘기는 시종을 통해서 하는 거니까.”

“네. 그러니까요.”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사실은 나도 무서웠어. 오라버니들이 화낼까 봐.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잘한들 폐하께서 나를 오라버니들보다 잘 봐 주실 리가 없으니까 한 번 정도는 더 괜찮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황자 전하들의 체면도 중요하잖아요. 이 경연은 온 제국이 지켜보고 있는걸요.”

그녀는 침울하게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애들한테 말이나 잘해. 나는 경연 따위로 속상해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 그냥 위로가 싫은 것뿐이야. 타가르에게 위로라니, 무엄하지 않니?”

“그럼요. 그럼요.”

그녀는 나를 곁눈으로 째려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너는 가서 옷 가져와.”

“네?”

“네 드레스 몇 벌 가져와 보라고. 방금 네가 고른 것 보고 내가 아주 소름이 돋더라! 파티에는 내가 골라 주는 걸 입어.”

“……네, 전하.”

내가 살다 살다 황족이 골라 준 옷을 입게 될 줄이야.

나는 방으로 돌아가 아무 드레스 세 벌을 골라 갔고, 밀리오라 전하는 내 안목을 한참이나 비난하다 한 벌을 골라 주었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살짝 즐겁기까지 했다.

밀리오라 전하가 진짜로 비난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드레스들을 사 모은 백작 부인의 안목이었으니까.

세 번째 사자님 부인의 자부심 가득한 그 안목 말이다. 흐흣.

* * *

폐하의 탄신일 파티는 제국 전체가 들썩이는 행사다.

그것은 황제 폐하 개인의 생일이라기보다 제국의 축제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여하지 못하는 약소 귀족이나 평민들도 저 나름대로 파티를 열어 즐겼다.

물론 백작저에 있을 때 나는 백작님 부부와 미샤가 황궁 파티에 간 다음 집에 혼자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내 평생 처음 참석하는 황궁 파티였다. 툰바르 산촌 출신 계집애가 이만큼이나 출세한 거다.

나는 밀리오라 전하가 황제 폐하 부부 앞에 나아가 예를 올리고 탄생일 축하의 말을 건네는 동안 뒤에 엄숙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파티장에서도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 외에 내가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어디 한번 파티를 구경해 볼까 하고 연회장 내를 둘러보는데, 젊은 영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리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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