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그레이언의 불안 (65/155)


64화. 그레이언의 불안
2023.05.07.


“내게는 삶이 없었어.”

“…….”

로카르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나쁜 새끼. 인정하지 마. 그럴 땐 아니라고 해야지.”

“그러면 기분이 더 나아지시겠습니까?”

“…….”

겁에 질린 토끼 같던 로리샤가 돌아간 후, 그레이언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황후가 밀리오라를 멸시하듯, 오를은 그레이언을 멸시했다.

밀리오라가 그나마 그레이언을 따른 것은 피해자라는 동질감에 기댄 것일 뿐, 황가에 가족의 정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황제는 그들 모두가 든 어항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이기만 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오를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오늘 경연에서 나대지 말라는 협박을 받은 사람은 밀리오라가 아니라 그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하루에는 생존 불안 외의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겁에 질린 사생아는 따박따박, 그가 모르는 이야기만 뱉고 있었다.

자기 삶이니 만족이니 하는.

예전이라면 사생아 주제에 무얼 알겠냐고 귓등으로 흘렸을 테지만 툰바르산맥에 다녀온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까 그녀는 황궁이나 시녀 자리에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밖에 좋은 것이라도 있다는 듯 지금이라도 나가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나는 사생아조차 욕심내지 않는 황궁을 차지하려 모든 걸 건 것인가…….’

시간이 지나자 설명할 수 없는 열패감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레이언이 로카르드를 불러들인 것은 그 때문은 아니었다.

로리샤가 본의 아니게 투척하고 간 미지의 감정들을 곱씹다가 깨달아 버린 사실.

그레이언은 황제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황제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에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뿐.

감히 황족을 동정하며 삶의 보람 따위를 말하는 사생아.

그는 그녀가 펄펄 내뿜는 생의 활력에 질투를 느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술은 그래서 그의 목구멍을 타고 수월하게 넘어갔다.

그 눈. 로리샤 로아르의 눈은 겁에 질린 채로도 어떤 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로카르드가 그녀를 끝내 놓지 않으려는 것도 그 때문일까.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그 생경한 것을 뭉개 버렸으면 이 밤에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르는데.

사악한 아쉬움에 입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황궁을 떠나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보지 못했어. 황궁 밖의 삶이 있다는 것이 금시초문이라.”

그레이언은 자신을 바라보는 로카르드의 서늘한 시선을 보며, 자신이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해 버린 걸 깨달았다.

어둠을 적시는 로카르드의 목소리는 건조하기만 했다.

“전하께는 없지요.”

그것은 진실이었다. 오를과 대립각에 선 지금, 그에게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황궁의 주인이 되든지, 황궁 밖에 묻히든지.

그나마 머리와 몸이 붙어서 묻힐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에게 황궁 밖의 삶이란 없었다.

“잔인한 놈.”

그레이언의 일갈에 로카르드는 담백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무시하신 사생아가 식사 한 번으로 전하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군요. 우. 와.”

그레이언은 삐친 듯 말했다.

“내가 매번 휘둘릴까.”

“그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제 주군이시라면요.”

로카르드는 웃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레이언은 찬물을 맞은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황제가 되려는 자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줄 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보통의 인간들은 잘 알지 못하는 종류의 거래다.

그레이언은 불쑥 로카르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서로의 코끝을 붙이고, 그는 사납게 말했다.

“로카르드. 나는 충성을 원한다. 충성만을. 그러니 너는 나를 좋아하지 마. 내가 언제든 너를 죽일 수 있게. 행여라도 네가 나를 동정해도 목을 칠 거야.”

“…….”

“아니, 내가 동정을 살 처지가 된다면 내 목을 쳐다오. 로카르드.”

로카르드 카이델이 그레이언 황자를 동정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눈을 내리깔았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하……. 그래. 그래라.”

조금 망설이는 척도 없다. 그의 대답이 너무 단호하여 그레이언은 어이없다고 코웃음 쳤다.

“경연은?”

“전하의 세력이 될 자들에게 철 공급권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 고민 중인 부분은 폐하께 그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실행할 방법입니다.”

실은 로카르드의 오늘의 만찬도 귀족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자리였다.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마음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그레이언은 그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 로카르드를 응시했다.

“내 세력이 될 자들? ……철을 미끼로 흔들겠단 얘기야? 거기 움직이는 자들이 있는지 보려고.”

“대충 그렇습니다. 전하의 편에 서면 줄 선물이 있다는 걸 알리는 거지요.”

“…….”

그레이언은 등을 뒤로 기대며 늘어졌다. 긴장이 풀리자 취기가 갑자기 올랐다.

이번 경연도 승기를 잡겠구나. 로카르드는 이번에도 나를 황제의 자리로 반쯤 등 떠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은 어떠실까?”

“내수로 돌리려 할 겁니다. 황후 폐하와 동맹 가문들의 이득이 걸려 있으니까요.”

그레이언은 무심결인 듯 중얼거렸다.

“그 사생아는 뭐라고 하려나…….”

로카르드의 눈빛이 기묘하게 차가워졌다. 사생아라는 호칭 때문은 아니었다.

그레이언은 제국의 거대한 세력들 간의 알력을 이야기하는 순간에 어째서 그녀를 떠올린 것인가.

하지만 로카르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마 아름다운 답을 내놓을 겁니다. 정석의, 이상적인 해답을요.”

그레이언은 이제는 취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쓰며 로카르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읽는 책들, 그걸 보는 순서, 어느 책을 더 오래 보는지를 보고 감 잡은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카르드는 잠깐이지만 들떠 있었다.

“그녀에게는 밀리오라 전하의 정치적 이익을 챙겨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 정론을 들고 나오겠죠. 두 분 황자 전하들을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만요.”

그레이언은 살짝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놈이 저렇게 여유가 있으면 그녀를 불러다 겁을 준 저는 뭐란 말인가.

“고작 책 제목만 보고 알아낼 거였으면 며칠씩 종일 붙어 있을 필요는 없었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둘이 종일 마주 앉아 일어나지를 않는다고 하인들이 수군거릴 정도인데, 몰랐어?”

“하인들이 수군거리라고 그런 것 아니었는데요.”

로카르드는 자신이 로리샤와 며칠간 종일 붙어 있었다는 말에 살짝 놀랐으나, 돌이켜 보니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 실력대로 아카데미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그런 일상을 보냈을 테니까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일 오후에 명단을 가져오겠습니다. 장래에 교섭해 볼 자들을 고르시지요. 그러니 오늘은 주무세요. 전하.”

“그래. 로카르드.”

그제야 그레이언은 취기가 몰려온 듯 잠자리에 들었다.

* * *

-탕, 탕.

방에 있는데 무엇이 창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쳤나 봐!”

창밖을 내다보니 카이델 공자가 밖에서 내 창에다 돌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이 인간이 대낮에 왜 이러나 소스라쳤고,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려오라고 손을 흔들고서 후원 쪽으로 향했다.

나는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후원에 나가니 그가 몹시 가식적으로 말했다.

“이런, 우연히 만났네요.”

“하……. 예. 그러게요. 우연히 만났네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헛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서는 낮고 빠르게 말했다.

“무슨 짓이세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로아르 양은 지금부터 일 분 후에 내게 고마워하게 될 겁니다.”

얼마나 뻔뻔한 말투인지,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나를 이런 식으로 도발하는 걸 꽤 재미있어하는 모양인데, 언제까지 장단 맞추어 줄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공자님이 짜증 나는 건 어떡하고요?”

“지금 본궁에서 아가엘 사신이 폐하를 알현 중이에요.”

“……아가엘이요?”

“아가엘에서 철광석 수출을 원합니다.”

“…….”

내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다.

아가엘이 적국이나 다름없는 제국에 철광석 수출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들과 비교적 호의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스마일란과 거래가 틀어졌기 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경연의 쟁점도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카이델 공자가 씨익 웃었다.

“어때요, 고맙죠?”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이 남자의 진의는 뭘까?

“왜 이런 정보를 알려 주세요?”

“나는 당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거든요.”

“…….”

나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최대한 조그맣게 소리쳤다.

“공자님 탓에 며칠이나 걸려서 정리한 답을 다 바꾸게 생겼잖아요!”

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게 왜 제 탓입니까, 로아르 양? 이런 정보를 알려 주었으니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 감사해요. 감사한데요, 공자님이 그러지 않으셨으면(해적을 전멸시키지 않으셨으면) 거기서(스마일란에서) 거기랑(아가엘이랑) 그걸(교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잖아요!”

“그, 그게…….”

카이델 공자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공자님 때문에 그렇게(아가엘이 철광석 무역에 군함을 투입할 필요가 없게)되고 나니까 거기서도(스마일란에서도) 그럴(철광석 호송 군함에 다른 수출선도 끼워서 호위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 거잖아요. 가만 놓아두어도 자유 해상 무역이 일어날 테니까 끼워팔기의 이득이 사라져서요!”

“그거야…….”

1683486628478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