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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먼저 씻어요. (64/155)


11화. 먼저 씻어요.
2023.05.06.


명함을 받아 든 미주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잠시 숨을 고른 미주는 창문 커튼을 살짝 밀고 밖을 내다봤다. 그는 여전히 차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리고 미주를 발견했는지 팔짱 낀 한 손을 풀고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보내는 모습도 보였다.

그의 인사를 본 미주는 얼른 집 안으로 숨었다.


“뭐야 아직 안 갔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밖을 내다본 것인데 시윤이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마치 자신이 시윤을 훔쳐보다 들킨 것 같아 심장이 뛰었다.

그는 세련되게 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는데, 제 자신은 화들짝 놀라 숨어 버렸다는 것도 창피했다.

미주는 벽에 기댄 채 손끝으로 그가 준 명함의 모서리를 이리 저리 만져보며 자신의 어수룩함을 곱씹었다.

하루 종일 흑역사를 갱신하는 중이라는 생각에 더욱 시무룩해졌다.

그가 준 명함을 들어봤다. 거기엔 주립대 경영학과 교수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고 일전에 마트서 제니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미주. 우리 주 주립대학교에 유명한 한국인 있다는데 알아요?>

<글쎄요?>

제니는 주머니서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SNS를 보여줬다.


<이거 봐요.>

웬 남자가 귀에 연필을 꽂고 심각하게 연구지를 펼쳐보고 있었다.

빈티지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지만 몸매까지 가히 짐작되는 사진이었다.


<잘생겼다. 누구예요?>

<학생 같아요, 모델 같아요?>

<모델이죠.>

<그죠? 누가 봐도 모델인데.>

<근데?>

<교수래요.>

<네?>

미주는 다시 핸드폰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아무리 봐도 교수 같지는 않았다. 나이는 학생 나이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범한 학생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모델 연출 샷이라 생각했는데, 교수라니.’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대요. 하긴 이 미모에 교수 실력까지 갖췄으니 워너비 될 만하죠. 미주 씨, 이 사람 한인회 같은 데서 못 봤어요?>

<내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봐요.>

알지도 못하거니와 평생 이런 사람과는 접점도 없을 거란 생각에 관심을 끄고 서둘러 카트에 물건을 담았었다.

그때 그 사람이 바로 시윤이라니, 미주는 마치 유명 스타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본 초절정 자연인이 된 것 같았다.


‘하긴 사진 보다 실물이 훨씬 나으니 못 알아볼 만도 하지.’

미주는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적였다. 이미 온갖 SNS를 타고 시윤의 사진은 여기저기 퍼져 나간 터라 너무나 쉽게 그의 모습을 검색할 수 있었다.


‘부럽고 멋있는 사람이네.’

미주는 제 처지와 비교가 돼 씁쓸히 핸드폰을 닫았다가도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 사진 아래 달린 무수한 댓글에 미주의 마음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 내 스타일인데.

- 딱 봐도 게이.

- 여기로 놀러 오세요.

이외에도 무수한 성적 희롱과 난잡한 링크가 한가득 달려 있었다.

게다가 여자에겐 관심도 없는 남자라느니, 게이라느니 하는 확인도 되지 않은 댓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 이 정도 의혹에 본인 등판 안 하면 게이 인정?

미주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갖은 비난과 조롱에 얼마나 시윤의 마음이 상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고, 한편으론 왜 그의 상황에 연민의 마음이 생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시윤은 다시 미주의 집 앞에 차를 대고 미주가 사는 5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미주 집의 벨을 눌렀다. 그러자 이내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김시윤입니다.”

집 안에서 움직이던 인기척이 잠시 멎었다. 하지만 곧 안전 고리를 잠근 채 문이 빠끔히 열렸다. 그 문틈 사이로 미주의 얼굴이 보였다.


“나예요.”

“아니, 김시윤 씨가 왜?”

“차 나한테 맡기고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래도 이 시간에 오는 건!”

미주는 문을 닫고 안전 고리를 열어젖힌 후 다시 문을 열었다.


“왜 전화 안 받아요?”

문이 열리자마자 시윤이 미주에게 따지듯 물었다.


“전화하셨어요?”

“세 번이나 했는데. 안 받아서 올라왔습니다.”

그제야 미주는 주먹 쥔 손으로 제 이마를 가볍게 올려 쳤다.


“미안해요. 세탁실 갔다 왔어요. 우선 들어오세요.”

미주는 문을 활짝 열어 길을 터주며 집 안으로 손을 뻗었다.


“아, 집 안 꼴이 엉망인데.”

순간 실수했구나!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시윤은 미주를 스쳐지나 너무도 당당하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미주는 문을 닫고 시윤을 따라 들어갔다.

집이라고 해봤자 침대와 소파, 그리고 한쪽에 주방 가구들이 있는 원룸형 스튜디오다.

이 작은 방에 시윤이 들어서니 집 안이 꽉 차 보였다. 시윤이 돌아서 미주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뗐다.


“이렇게 아무 남자나 집에 들어오라고 문을 벌컥벌컥 열어주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아니, 약속도 없이 찾아와 놓고…….”

미주는 문을 열어준 제 탓을 하는 시윤이 야속했다. 그럼 밖에 세워두거나, 돌아가라고 해야 마땅한가. 지금이라도 내보낼까. 잠시 갈등했다.


“나 말고 다른 남자도 온 적 있어요?”

그제야 미주는 발끈하면서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내 집에 남자를 들이든, 여자를 들이든 그게 그쪽하고 무슨 상관이래요?”

“아버지가 그런 말 안 해요? 남자는 다 늑대라고?”

“…….”

없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니 미주는 할 말이 없어졌다.

아버지뿐 아니라 미주에겐 가족이 없다. 3살 때 실종 아동으로 신고 되어 성인이 되기 전까지 미주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고3때 미국 학교에 지원해 합격했고, 보육원을 나올 때 받은 자립지원금과 고아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특별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가족이란 단어는 미주에게 그리움이기도 했지만 아픔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구구절절한 아픔을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진 않았다. 시윤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김시윤 씨니까 들어오라고 한 거예요. 어차피 여자든 여자 집이든 관심 없잖아요.”

미주는 뾰족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시윤은 미주의 깊은 오해 때문에 미주의 집에 쉽사리 발을 들일 수 있었음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시윤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짓는 그때, 미주는 어지러운 집 안 풍경이 다시 신경 쓰였다.

아무렇게나 어지럽혀진 소파. 방금 자다 깨 정리되지 않은 침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들.

하지만 이미 시윤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이상 엎질러진 물이었다.

미주는 태연한척 하며 소파로 가 물건들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헐렁한 슬리브리스와 숏팬츠가 물건을 치울 때마다 들려 올라가고 내려오며 미주의 몸이 드러났다.


‘아침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턱관절이 움찔할 정도로 시윤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시윤의 복잡한 속도 모른 채 미주는 소파 위를 치우다가 식탁을 바라봤다. 나란히 앉는 소파보다는 식탁이 나을 것 같아 식탁 의자를 꺼내 시윤에게 자리를 권했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시윤이 말없이 식탁으로 가 미주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미주는 뒤돌아서 커피를 내리고 커피잔을 찾아 선반을 뒤적였다. 예쁜 잔을 찾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어 몇 번이고 선반을 훑어보다 결국은 도넛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머그잔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혼자 분주한 마음으로 커피를 내리는 미주의 뒷모습을 시윤은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향이 집안을 채울 때쯤 미주가 돌아서서 시윤 앞에 커피 잔을 내려놓는 순간, 미주는 시윤의 눈길을 의식하게 됐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시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나 같은 여자는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하지만 잘생긴 남자 앞에서 여자로서의 본능적 창피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몸을 거의 드러낸 듯한 옷차림과 부스스한 얼굴, 아무렇게나 말아 올려 봉두난발 된 머리.


‘하. 그지 꼴이구나…….’

사형집행을 거행하는 망나니가 현생 했다면 이런 꼴이지 않을까. 미주는 시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다시 돌아섰다.


“어딘가 쿠키가 있었는데.”

미주는 있지도 않은 쿠키를 찾느라 서랍과 선반을 뒤적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을 짜냈다.


‘우선 아무렇지 않은 듯 셔츠를 껴입을까.’

아니다. 그렇게 한들 훤하게 드러난 다리는 어쩔 것인가.


‘그럼 셔츠랑 같이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을까?’

그 역시 불가능하다. 원룸 형태의 스튜디오인데 어디서 핫팬츠를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단 말인가.

옷은 둘째 치고 부스스한 머리 스타일이라도 어떻게 해보고 싶었다. 당장 머리끈을 풀러 다시 묶으면 될 텐데, 뒤에 서 있는 시윤이 의식 돼 그 작은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제 집에선 강아지도 먹고 들어간다는데, 내 집에서 내가 못 할 일이 어디 있어.’

미주는 획 뒤돌아섰다. 시윤이 진한 눈빛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뭘 구경하는 거지!’

하지만 시윤은 갑자기 돌아선 미주의 모습에도 놀란 기색을 보이거나, 눈빛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벌거벗고 서 있다 한들 신기하게만 볼 뿐 아무 느낌도 없는 거야.’

미주는 자신의 어떠한 행동에도 시윤은 전혀 동요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빛과 표정을 보니 잠옷 차림의 제 모습을 여자로서 부끄러워했다는 게 창피해졌다.

시윤이 눈빛을 거두고 찻잔을 들었다.


“자동차도 고쳐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그쪽도 우선 커피부터 하죠.”

어서 자리에 와 앉으라는 듯 시윤이 재촉했지만, 미주는 거리를 두며 싱크대 앞에 기대섰다.


 


“차는 어떻게 됐어요?”

“시동이 여전히 불안해서 리페어 숍에 보냈어요. 같이 가봅시다.”

“네 그런데, 제가 좀 전에 일어나서 아직 씻지도 못 했어요.”

당당하게 보이고 싶어서 어제 시윤이 차 앞에 서 있었던 것처럼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아 싱크대에 기대섰다. 두 팔에 말랑한 가슴이 닿아 도드라져 보일 거란 걸 알았지만 굳이 포즈를 바꾸지 않았다.


‘어차피 관심도 없을 테니까.’

도발이라도 하는 듯한 미주의 포즈에 시윤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먼저 씻어요.”

“그러게. 불쑥 찾아오면 어떻게 해요. 전화…… 아니, 온다고 시간 약속이라도 했어야지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퉁퉁거리자 귀엽다는 듯 시윤이 미주에게 미소를 보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씻고 나와요.”

시윤의 부드러운 말투에 미주는 더 이상 화낼 구실도 찾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분 후, 욕실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설마!’

시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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