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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네가 내게 무가치하기 때문이야 (63/155)


63화. 네가 내게 무가치하기 때문이야
2023.05.06.


그레이언 전하는 식사를 시작하며 말했다.

“맛있는 걸로 준비했으니 들어. 밀리오라는 네게 반지를 훔쳤다는 누명이나 씌우지 사탕 한 알 안 주잖아.”

“…….”

“말해 봐.”

“네?”

나는 깜짝 놀랐으나 그는 나이프를 부지런히 놀리며 말했다.

“방금 이마에 주름 잡으며 한 생각.”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만 그레이언 전하는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어째서 제가 누명을 썼다는 것까지 알고 계신가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를 도둑으로 여기시는 것보다는 낫습니다만.”

그러자 그레이언 전하가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황궁에 적응을 못 했군. 로리샤 로아르. 이곳에 비밀은 없어.”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전하.”

‘저는 전하의 비밀을 목숨같이 지키고 있다고요!’

나는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그러자 입에 포크를 넣었던 그레이언 전하가 작게 웃었다.

“그래. 알아들었어.”

“그 사실이 어떤 경우에도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하.”

그가 설핏 웃었다.

문득 바라본 그의 나이프는 참으로 우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왜 네게 관심이 없는지 아나, 로아르?”

“……모릅니다.”

“네가 내게 무가치하기 때문이야.”

더럽게 직설적이네.

그러나 나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백작 부인의 독설과 해코지에 단련된 덕분이기도 하지만―그녀가 내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니!―그의 무관심은 내게 마냥 불리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언 전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너에게는 주군이 없으니까. 네가 밀리오라에게 하는 일은 오히려 봉사에 가깝지. 안 그런가?”

“…….”

나는 약한 충격을 받았다. 황족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나는 밀리오라 전하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은 없었다.

굳이 말하면 엄청나게 조건이 좋은 가게에 취직한 기분과 비슷했다.

내가 이 살벌한 황궁에서 버티는 이유는 오직 하나, 내 미래의 소박한 독신 생활을 위해서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욕망은 황족의 눈에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부덕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남의 충성으로 생존하는 황족이니까.

누가 옳건 간에, 나는 그레이언 전하에게 불경스럽고 위험한 인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저는 황녀 전하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2황자 전하.”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야. 어떤 타가르에게도 충성하지 않는 시녀가 경연의 영광을 훔치고 있으니까.”

“…….”

그래, 한 번 이기긴 했다. 그런데 그걸로 영광을 훔친다고까지야…….

“밀리오라에게 헛꿈을 꾸게 하는 것은 그 애를 위험에 몰아넣는 짓이야. 로아르.”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나이프를 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하면 밀리오라는 진정으로 황태녀를 꿈꾸는가?”

“……!”

그레이언 전하와 시선을 맞닿은 채,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의 살의는 지난번에도 지금도 생생한 진심이었다.

나는 이제 타가르의 은발이 주는 차가움을 이해했다.

그 타고난 냉혹함과 잔인함은 의도하지 않아도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다음에 한 번 더 저러한 시선을 받고도 살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의 티 파티!’

하지만 그는 나를 겁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절대 이번 경연에서 잘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녀 전하의 체면이 망가지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 딱 그만큼이 내 목표였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구구절절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밀리오라 전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황후 폐하께 받는 취급, 그것을 당연시하는 황자 전하들.

내가 황궁을 떠나 꿈에 그리던 삶을 사는 동안에도 그녀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미쳐서는.

나는 몹시 딱딱하게 말했다.

“황태녀라니, 잔뜩 취해 혀 꼬부라진 티 파티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전하.”

취한 철딱서니들 얘기로 사람 살 떨리게 하지 말란 말이다.

그레이언 전하는 내 미묘한 화법에 이마를 찌푸렸다. 그 웃음도 미묘했다.

하지만 나는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이 경연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밀리오라 전하의 시녀로서 제 목표 또한 분명합니다.”

“너의 목표? 감히…….”

“저는 황녀 전하께서 자신을 좀 더 사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하.”

“…….”

아아. 나는 방금 내 관뚜껑에 못을 박았다.

황후 폐하가 황녀 전하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래서 그녀의 속이 얼마나 너덜너덜한지, 황가의 속사정은 절대 내가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욕보다 먼저, 누가 억누르려 하면 더 튀어 나가고 마는 내 이 성질머리를 고쳤어야 했는데!

그레이언 전하는 무표정했으나 눈빛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고, 사생아 시녀 따위가 황족의 약점을 짚는 것을 한없이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부터 네가 뱉는 말을 조심해라, 로아르.”

그러나 내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지금 말을 멈추면 내 실수를 인정하는 셈이었다.

“저는 아무 욕심이 없습니다, 전하. 저는 경연이 끝나면 황궁을 떠날 거예요. 그 전에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래 살고 싶거든요!”

나는 흥분을 억누르느라 숨결이 거칠어져 있었고, 이제는 손이 다 떨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뱉었다. 나직하고 사나웠으며 의구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너를 믿지 않아. 로아르.”

나는 울적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가 없는데요. 전하.”

그가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은 너무 생생해서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왜?”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면 밀리오라가 네게 무엇을 해 줄 것 같아서?”

“……만족이요.”

“뭐라?”

“제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는 만족감이요. 그것은 남이 줄 수 없는 거라서 제가 얻어 내야만 하거든요.”

“…….”

그레이언 전하는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로 다시 나이프를 움직였다.

나는 어제 먹은 음식까지 식도에 줄을 서서 서로를 밀치고 있는 기분이었으나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기와 같이 음식을 먹는 사람을 구박하기 어려운 법이다. 내게는 그렇게 쪼잔한 희망이라도 필요했다. 젠장.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식사가 끝나고, 그는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

“밀리오라가 로카르드를 티 파티에 데려갔으니 나는 그 답례로 너를 부른 거야. 로아르.”

카이델 공자는 실컷 웃고 즐기다 갔는데, 나는! 답례 두 번 받았다간 사람 잡겠다.

하지만 나는 예의 바르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전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2황자궁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 * *

깊은 밤, 로카르드는 피로한 얼굴로 그레이언의 침소로 들었다. 그레이언은 혼자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이미 기분 좋게 취한 로카르드는 황자에게 투덜거렸다.

“오늘만 본가에서 자고 온다니까 꼭 부르셔야 합니까?”

“너 없으면 잠이 안 와.”

로카르드는 질색하고 손사래를 쳤다.

“제발 남 듣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 반쯤 장난 같은 대화는 오랜 습관에 가까웠다.

전장에서 긴장을 덜려는 억지스러운 농담.

어째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순간순간 치미는 분노를 달래려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는 일 모두.

그레이언은 씁쓸하게 말했다.

“너만 시끌벅적한 저녁을 보낸 게 아니야.”

“좋은 사람이라도 만나셨습니까?”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의 울적함을 알면서도 농담처럼 되물었다.

그레이언이 얻은 부상은 몸의 자상만은 아니었다.

황궁에서 곱게 자란 둘째 황제의 차남에게 돌연히 끌려간 전쟁터는 모든 것이 날것의 충격이었다.

그레이언은 지금까지 그것을 훌륭하게 감추고 있었지만, 경연이 시작된 후부터 때로 예민함이 도를 넘는 밤들이 찾아왔다.

이곳의 전쟁은 적이 어디 있는지, 무슨 싸움이 벌어지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신경이 더 곤두섰다.

그레이언은 거기 다시 처음부터 적응해야 했다. 이미 충분히 닳고 닳았다고 생각했음에도.

로카르드가 곁에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파열음을 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카르드가 하루라도 황궁을 비우는 것을 참지 못했다.

로카르드는 아이를 어르듯 그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땐 방법이 없다. 주군을 달래어 재우는 수밖에.

그레이언이 손바닥으로 감싼 술잔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이라……. 그래. 누구한테는 좋은 사람이지. 오늘 로아르와 저녁을 먹었어, 로카르드.”

“…….”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의 맞은편에 앉았고, 그레이언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걸 보고 말했다.

“죽인다고 안 했어. 걱정 말아.”

“그걸 꼭 말로 해야 겁나나요.”

“너는 누구 거야?”

“거……! 제발 말씀 이상하게 하지 마시라고요.”

“그 시녀가 말하길, 자신이 밀리오라를 돕는 이유는 최선을 다하며 산다는 자기만족 때문이라더군. 그건 남이 줄 수 없다며. ……무엄하게도.”

“……그녀답네요.”

로카르드는 일어나 자기 몫의 술을 따라 왔다.

“그녀가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게 어째서 전하를 울적하게 만든 겁니까?”

“지금 그걸 생각 중이었어.”

“그래서 생각나셨습니까?”

그레이언은 로카르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게는 삶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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