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죽이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걱정 마 (62/155)


62화. 죽이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걱정 마
2023.05.05.


다음 날 도서관에 갔을 땐 내가 보던 책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책상 위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도서관 관리인들이 이곳을 마치 내 책상인 것처럼 관리해 줬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펴 어제 읽은 부분을 상기한 다음 계속 읽어 나갔다.

그런데 카이델 공자가 와 내 앞에 앉았다.

‘오늘은 따로 앉으셔야 하지 않아요?’

불만 가득한 내 시선에, 그는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로아르 양. 아침잠이 없으시군요.”

“카이델 공자님도요.”

그리고 그는 어제 보던 책을 가져가 펼쳤다.

“…….”

문득 우리에게 규칙 같은 것이 생겨 버렸나 싶어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오늘은 따로 앉으시죠?’라고 말할 수야 있겠지만, 대화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방금 그것을 놓쳤다.

내가 지금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를 엄청나게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 거다.

‘이 자식……. 그거였어?’

나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사이 책에 완전히 집중한 것 같았지만, 나는 이것이 그의 계략이라고 확신했다.

내 정신을 이렇게 산만하게 해서 공부를 못 하게 하고, 그래서 경연에서 형편없는 답을 내놓게 만들려고!

나는 그의 희고 긴 손가락이 책장을 소리 없이 넘기는 것을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디 한번 지켜보시죠. 내가 집중을 하는지, 못 하는지!’

나는 로아르 백작저 출신이다. 그는 그 의미를 모르겠지만, 그곳은 백작 부인과 미샤가 사는 곳이란 말이다.

십 년간 방해 공작을 이겨 내고 공부해 온 실력을, 오늘에야말로 발휘하리라.

으아아아.

나는 맹렬하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내 달라진 기운을 감지한 카이델 공자가 나를 흘끔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흥!

언제 잠들었을까,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가 향긋한 홍차 향에 눈을 떴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입술을 모아 내 쪽으로 홍차를 후 부는 카이델 공자의 얼굴이었다.

가까워!

나는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뜬 채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그는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빙긋 웃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 홍차를 마셨다. 마치 자기 응접실에 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

그 여유로운 표정이라니.

나는 혼자 소름이 돋아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도서관에는 관리들 몇이 돌아다닐 뿐, 여전히 조용한 분위기였다.

“안 마셔요? 향 좋은데.”

그가 하도 태연하니 오히려 내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잠자코 차를 마셨다가 눈이 커졌다.

이 차는 뭐 이렇게 맛있는지…….

“웬 차예요?”

“그레이언 전하가 보내 주셨어요. 고생한다고.”

“아. 네.”

“내 곁에 있으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답니다. 로아르 양.”

이 새끼, 저 햇살같이 웃는 것 좀 봐라.

상대를 경계하며 예민해진 건 나만인 듯했다.

나는 문득 내가 좀 한심해져서 차만 홀짝였다. 우유를 살짝 푼 홍차의 부드러운 맛은 마실수록 기가 막혔다.

카이델 공자는 이런 대우를 받는구나 생각하니 부럽기도 했다. 황녀 전하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더 요구하기나 할 텐데.

하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카이델 공자는 그레이언 전하와 운명 공동체였고, 나는 경연이 끝나면 떠날 사람이 아닌가.

그가 향을 음미하며 물었다.

“로리샤 양은 어떻게 생각해요?”

“네?”

“철광석 문제요.”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런 데 넘어갈 줄 알고?

“엄청난 발상이 떠올랐지만, 그걸 공자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지 않겠어요? 우린 경연 중이잖아요.”

그가 빙긋 웃었다.

“맞아요. 우린 경연 중이죠. 그리고 이럴 땐 경쟁자의 속마음이 가장 궁금한 법이고요.”

“어머, 제 속마음이 궁금하세요?”

“당연히. 당신의 머릿속을 짐작하는 일은 몹시 흥미로워요.”

이건 무슨. 얼핏 들으면 찬사 같지만, 그 얼핏이 지나가고 나면 욕 같은 말이었다.

내 머릿속이 이상하다는 건지, 뭔지.

하지만 나는 크게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홍차 탓도 있었지만, 카이델 공자같이 완벽한 인간에게 안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있기나 할지 의심스러우니 말이다.

“걱정 마세요. 저는 공자님처럼 경험이 풍부하거나 식견이 넓지 못해요. 아마 제가 구상은 이 책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텐데, 이 문제는 완전히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거잖아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나는 그를 다시 흘끔 보며 말했다.

“나중에 제 답을 비웃지나 마시고요.”

“…….”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를 무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카이델 공자는 경연 문제의 최종적인 결정을 그레이언 전하와 의논할 것이다.

이 경연은 황자녀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 시종은 어디까지나 돕고 조언하는 역할이어야 했다.

하지만 황녀 전하는 경연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녀에게 ‘문제’란 ‘아랫사람이 해결하는 귀찮은 무엇’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제 답’이라고 말한 것은 실수였다.

카이델 공자가 지금 나를 불쌍히 여기는지 불경하게 여기는지, 그의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기분이 상해 버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 있으면 저절로 기가 죽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가 잘난 척하려 들었다면 나는 오히려 그를 괴롭혀 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그러지 않아서, 나는 오히려 그에게 접근할 수 없는 벽 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그는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를 내게 또렷이 집중한 채로 나직이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당신을 가진 게 얼마나 행운인지, 부디 알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로아르 양.”

“…….”

나는 놀리지 말라고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별로 적절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방황하다가 그냥 책을 읽었다.

* * *

저녁 무렵, 카이델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아버님과 저녁 만찬에 참석해야 해요.”

“네. 맛있게 드세요. 공자님.”

나는 책을 보다가 건성으로 대답했고, 카이델 공자는 살짝 당혹한 기색을 띤 채 돌아갔다.

나는 책에 집중했던 탓에, 그가 가고 나서야 그걸 깨닫고 말았다.

지금 읽어야 할 게 많아서 바빠 죽겠는데, 자기가 밥을 누구랑 먹는지까지 내가 알아야 하냐고.

그런데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의로 말하면 선의로 받는 건 어때요, 로아르 양?’

어떻게 생각해도 내가 무례했던 것이 맞아서, 나는 조금 기가 죽은 채 공부를 계속했다.

제국에서 철의 수급권을 선점하고 싶어 하는 무리는 대략 둘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엄청난 양의 무기와 돈을 소모한 군대 및 군벌 가문과 늘어난 내수.

원재료의 공급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해도 철의 생산량 증가에는 한계가 있으니, 황실은 선택의 문제에 처해 있었다.

황실 군대를 포함하여 이번 전쟁에 참여한 귀족들은 일단 전량을 무기 생산에 돌려 그동안 소모한 무기를 다시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의 방어력 문제는 언제나 중요했고, 목숨 바쳐 싸운 당사자들에게 이권을 우선 부여하는 것은 일면 합당했다.

하지만 제국 내부에서도 철의 공급 확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신문 광고로 화제가 된 철마차가 그 예다.

그 발명가는 마차 외부에 철판을 덧대어 강도의 습격에도 안전하다며 부자들에게 주문을 받았다.

그것은 아마타전 승리가 준 기대감으로 출현한 물건이었다.

제국은 아마타전이 벌어지기 몇 년 전부터 철의 공급 부족을 겪었다.

아가엘이 아마타족을 꼬드긴 것도 그 문제가 제국 내부에 그만한 타격을 줄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승전했음에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모두가 황실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철과 관련된 산업 외에도 철광석 광산을 둘러싼 다툼의 역사, 전후 처리와 보상, 철의 부족으로 일어난 사회 문제의 보고서 등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건 어떤 결정을 내려도 반드시 한쪽은 불만을 품게 되는 문제 같았다.

‘막다른 골목 같아.’

나는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갔다. 도서관 앞 정원을 좀 걸으면서 바람을 쐬고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 황궁의 하인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시녀님, 저를 따르시지요.”

제가 뭔데 대뜸 오라 가라야?

내가 한소리 하려고 할 때 그가 먼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2황자궁에서 기다리십니다.”

주어가 없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

나는 종종 빌어먹을 귀족 놈들이라고 욕을 하곤 했는데, 황족은 한술 더 떴다.

‘드디어 목이 잘리는 건가? 아니야, 아니야. 죽여도 설마 황궁 안에서 죽이기야 하겠어.’

나는 스스로에게 희망을 강요하며 하인을 따라 걸었다.

* * *

2황자궁의 하인은 나를 그레이언 전하의 응접실 발코니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화려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앉아. 로아르.”

“전하…….”

그는 잔뜩 얼어붙은 나를 약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나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던 일이 떠올랐는지 ‘아, 그랬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죽이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걱정 말아.”

“네. 전하.”

나는 그가 가리키는 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죽이지 않겠다고 하면 ‘어머, 감사합니다.’ 하고 좋아해야 하나? 빌어먹을 황족 놈들.

하지만 공해로 천천히 침몰하던 불타는 해적선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자 입이 꼭 다물렸다.

이 인간이야말로 나중에 황제가 되실지도 모른다.

‘……나, 장래의 황제에게 찍힌 거야?’

갑자기 카이델 공자가 보고 싶었다. 아무리 얄미워도 이럴 땐 쓸모 있는데…….

세상에 살다 살다 그가 그리워질 줄이야.

하지만 차마 그가 어디 갔냐고 말을 걸 용기까지는 없었다.

1683288433441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