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뜻밖의 도서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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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뜻밖의 도서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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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뜻밖의 도서관 친구
2023.05.04.
“뭔데? 그게 뭐야?”
바짝 집중하는 얼굴이 이럴 땐 전하도 꼭 애 같다. 나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입단속이요. 여동생에게 지고서 속이 편한 오빠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전하는 최대한 겸손한 모습, 경연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여 주셔야 해요. 티 파티의 영애들도 입단속 하셔야 하고요.”
“흠. 아무래도 그렇지? 알았어. 너도 입조심해.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단 말이야.”
어제 낮에 아마 그 벽은 하도 시끄러워서 귀가 멀고 말았을 거랍니다.
나는 억지 미소가 바닥나기 전에 밀리오라 전하의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몹시 피곤한 기분으로 황실 도서관으로 향했다.
* * *
나는 황실 도서관으로 향하다 문득 이 길이 황가의 서고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제 황족의 시녀, 황가 서고의 출입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방향을 돌려 그리로 갔다. 문을 지키던 관리가 나를 보고 누구시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가슴의 메달을 눈짓하며 말했다.
“황녀궁에서 왔어요. 황녀 전하의 심부름으로 서고를 잠시 이용하려고요.”
그러자 그가 내 메달을 다시 살피며 웃었다.
“새로 오신 시녀님이십니까? 황가의 서고는 황족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시종이라고 해도 들어갈 수 없어요.”
“정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말 진짭니다. 시녀님.”
‘카이델 공자님은 아니던데요!’
밀리오라 전하가 힘이 없어서 차별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사생아 출신이라고 그러는 건지.
나는 피해 의식까지 느끼며 울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이델 공자’의 ‘카’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황실 도서관으로 방향을 꺾으며 씩씩거렸다.
내가 입궁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가정 교사의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가의 서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유혹도 강렬했다.
그런데 그걸 잘못 알았던 거다. 그 인간 때문에!
대체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의 비밀스러운 특권은 어디까지 닿아 있는 것인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 불같이 일었다.
나는 내가 화가 난 줄 알았는데, 곱씹어 보니 그것은 질투였다. 그를 질투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게다가 생명의 은인에게 그러는 건 배은망덕한 짓이다.
‘양심을 되찾자, 로리샤. 엄마는 나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잖아.’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새로이 복속한 아마타의 철광석을 가장 효율적으로 분배할 방안을 마련하라.’
지금 내가 싸워야 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철 산업과 아가엘 왕국과의 외교 관계가 담긴 책을 모두 뒤졌다.
제국은 툰바르산맥을 중간에 두고 아가엘과 잦은 갈등을 벌여 왔다. 하지만 툰바르라는 거대한 장애물은 그 갈등을 매번 소모전으로 끝나게 했다.
하지만 이제 아마타족의 땅이 제국의 것이 되면서 제국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이 철광석을 제국의 어디에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생산량 전부 제국이 모두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외국과의 교역에도 이용할 것인가?’
황제 폐하 또한 아마타전에서 승전한 때부터 이 문제를 고민했기에 경연에 출제했는지도 몰랐다.
지난번 탄신일 선물처럼 자유도가 높은 문제는 황녀 전하의 체면을 세우는 정도로 결과를 조절할 수 있지만, 이 문제는 그렇지 못했다.
혹시라도 너무 잘해서 황자 전하들을 자극해서도 안 되고, 못해서 웃음거리가 되어서도 안 되었다.
“어렵다, 어려워.”
나는 한숨을 쉬며 서가에 꽂힌 『타가르 제국 외교 백서』 최신판을 뽑아 들었다. 그때 남자의 손이 내 손을 겹쳐 잡았다.
“어……!”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다.
‘아무렴, 너님이시겠죠. 카이델 공자님!’
카이델 공자가 씨익 웃기에 나는 그가 손을 놓는 줄 알았다. 그래서 책을 뽑으려는데 책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붙잡고 있어서였다.
나는 바짝 예민해져서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는데, 입가를 살짝 경련했다.
“제가 보려던 책입니다. 로아르 양.”
“제가 집은 책입니다. 카이델 공자님.”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너는 황가의 서고에나 가 버려!’
역시 나는 옹졸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옹졸함을 확인하게 만드는 그가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옹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도 치사한 인간이었다.
그는 내 손을 덮은 채 책을 쥐고서 힘을 풀지 않았다. 내가 먼저 손을 빼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우리의 체력의 차이나 신장 차이를 고려하면, 팔을 쭉 뻗어 올린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나는 몹시 경직된 웃음을 띠고 말했다.
“카이델 공자님, 제가 팔이 아프네요?”
“팔을 내리시면 됩니다.”
“책을 가져가시려고요?”
“네. 경연 준비에 꼭 필요해서요.”
“어머, 저와 같으시네요. 저도 경연 준비에 이 책이 꼭 필요하거든요.”
“그러면 팔이 아프시면 안 되겠군요. 참고로 저는 참으로 편안한 상태입니다.”
야, 이 잘난 새끼야! 너는 길어서 좋겠다!
아마타족도 정복하고, 해적도 때려잡고, 힘도 세고, 활도 잘 쏘고 좋겠다!
나는 속으로 절규하다 체력 싸움으로는 내게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온통 내게 집중하고 있어서 그와 시선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보느라 약간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그의 보라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홀린 듯 바라보며 그의 발등을 콱 밟았다.
“읍.”
나는 『타가르 제국 외교 백서』 최신판을 뽑아 열람용 책상으로 달아났다.
자기 목숨을 왜 그렇게 가볍게 여기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나도 답을 모르니까.
미친년에게 이성적인 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 아닌가.
나는 책상에 앉아서야 내가 방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천천히 실감했다. 그러자 순수하게 웃음이 나왔다.
흐흐.
엄마, 나 방금 첫 번째 사자의 아드님이자 장래의 첫 번째 사자의 발등을 찍었어, 콱. 엄마 딸이 말이야.
미샤에게는 공책을 도둑맞아 불태워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깟 책이 뭐라고 이러는지.
“…….”
내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데 내 맞은편 좌석에 그가 앉았다.
마치 세상 품위는 모두 자기 것이라는 듯 우아한 미소를 띤 채로.
그러나 나는 도저히 발은 괜찮으시냐든가, 아까 내가 순간적으로 미쳤었나 보다고 사과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퍽 뻔뻔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라는데, 그렇다면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야말로 내 가장 좋은 친구였다.
‘로리샤. 정신 차려.’
그가 가져온 책 무더기를 보니, 내가 나중에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들이었다.
카이델 공자는 빙긋 웃으며 내 책 무더기로 팔을 뻗더니 외교사 책 한 권을 가져갔다.
“그냥 같이 봐요. 어차피 같은 공부 중인데.”
“…….”
거기다 대고 어떻게 반박하겠냐고요.
나는 입을 앙다물고 모르는 척을 했다.
내가 방금 저지른 만행을 무마하려면 이 책을 빨리 보고 카이델 공자에게 넘기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 뻔뻔함 부족 때문이었다.
고개를 슬쩍 드니 책을 보느라 살짝 숙인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흡사 시집을 읽는 듯한 자태였다. 총명하게 움직이는 눈과 단정한 턱과 목선이 눈에 띄었다.
의아했다.
저 남자가 공해를 가로지르던 배를 호령하던 그 사나운 남자라니.
대체 연극은 누가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귀족은 이렇듯 다채로운 면면을 가진 것인지.
그때 나는 내 질투의 정체를 이해했다.
그것은 동경이었다.
그를 닮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깨닫자 감정이 놀랍게 가라앉았다. 약간 침울하리만치 말이다.
나는 불행히도 그의 미덕과 매력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지만, 그것을 내가 닮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는지.
가정 교사에게 필요한 미덕은 다채로운 면면의 유능함이 아니라 실력 그리고 또 실력이다. 줄리아 선생님이 그 산증인이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내가 이 황궁에서 무사히 살아서 나갈 때의 얘기다.
‘그래도 나쁜 인간은 맞아.’
나는 짧은 순간 내 안에서 이토록 많은 생각과 감정을 이끌어 낸 그를 살짝 미워하며 그렇게 결론 내렸다.
나는 공책 한 장을 북 찢어 무어라 쓰고는 그에게 내밀었다.
「발 밟아서 죄송합니다. 앞으론 안 그럴게요. 카이델 공자님.」
그러자 그가 그 밑에다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입을 앙다물고 낱장을 확 빼앗아 왔다.
「당신이 그 일을 자백ㅎ」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를 쏘아보자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웃음으로 소리 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걸 보니 내 부정적 감정들이 눈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참 신기한 인간이다.’
나는 그때부터 『타가르 제국 외교 백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그것을 다 보고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을 때, 그도 외교사 책을 내 책 무더기로 돌려놓았다.
빙긋 웃으면서.
나는 그의 책 무더기에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제국의 상업 발달사 자료를 가져와 펼쳤다.
우리는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공부했다. 대화는 한마디도 없었다.
눈이 침침해져 기지개를 켜자 그가 책을 덮었다.
“오늘은 이만할까요?”
웃긴다. 꼭 우리가 같이 공부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굳이 성질을 부릴 이유는 없어서, 나는 깔끔하게 인사했다.
“그럼 공자님도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런데 그가 도서관 정원 쪽 계단까지 나를 따라왔다.
설마 배웅?
굳이 이럴 필요는 없는데 싶어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느 땐 해적 때려잡는 해적보다 더 독한 놈이고, 어떨 땐 이렇게 신사고.
더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멈추더니 빙긋 웃었다.
“로아르 양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