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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두 번째도 승리해야지, 안 그래? (60/155)


60화. 두 번째도 승리해야지, 안 그래?
2023.05.03.


오를은 분기를 감추지 못하고 발코니로 나아갔다. 난간을 주먹으로 때려 보았으나 그 정도로 추슬러질 마음이 아니었다.

잰걸음으로 따라 들어온 황후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처럼 달랬다.

“그 시녀, 발칙한 것이 주제를 모르는구나! 밀리오라 같은 아이에게 민심을 끌어들여 어쩌자는 건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생아가 무얼 알까. 문제는 밀리오라다. 이 경연이 무언지 알고 제가 나댄단 말이니. 마음을 풀거라, 오를. 내가 불러 잘못을 알게 할 테니.”

오를은 그러나 가벼운 은발을 세차게 저었다. 그는 분에 차 있었다.

“아니요, 황후 폐하. 밀리오라가 아닙니다. 그레이언이에요.”

“……무슨 소리니?”

“오늘의 승자는 밀리오라가 아니라 그레이언이란 말입니다!”

황후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그레이언이 경연 과제인 선물을 고작 황실 호텔 초대권 하나로 대신하다니. 하지만 폐하는 분명히…….”

“제브론 호텔. 르네가 알아 온 정보에 의하면 폐하께서 첫 번째 사자에게 그곳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는 계획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셨었답니다.”

“세상에, 그 절경에 군기지라니!”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공해의 해적이 사라졌으니까요.”

“그건 해적들의 내분이라고……. 지금 설마, 그것이 그레이언이 한 짓이라고 말하는 거니?”

“그것이 아니라면 그레이언이 폐하께 엄청난 사기를 친 것이겠지요.”

“하아!”

황후는 현기증이라도 느낀 듯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를은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오는 발코니 너머를 응시하며 아주 나직이 이를 갈았다.

그가 불로초를 찾아내려 들인 돈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적다이아몬드 가격에 근접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 소용 없게 되다니.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공해의 해적 괴멸에는 그레이언이 연관된 것이 분명합니다. 로카르드가 또 뭔가 마술을 부려 줬겠죠.”

“믿을 수가 없구나.”

멍하니 중얼거린 황후는 고개를 획 돌려 오를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로카르드를 족쳐야 해. 누구 마음대로 공해에서 군사 행동을 한단 말이니? 만약 거기 첫 번째 사자가 연관되어 있다면 그도 함께 죄를 물어야 한다. 그레이언의 세를 꺾을 기회야!”

“제발요. 황후 폐하.”

마치 아둔한 소리는 그만하라는 말투에 황후는 얼굴을 차게 굳혔다.

그녀의 사랑스럽고 다정한 장자는 이따금 날카롭게 굴었다.

건강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가슴에 비수가 박히는 것 같았다.

사랑이란 언제나, 어째서 이렇게 어려운지.

잠깐 사이 심기를 다스린 오를이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선물은 받았다. 그레이언.’ 이미 폐하께서 승인하신 일이니 이 일은 묻어 두어야 합니다.”

“그게, 그런 뜻이었다?”

황후는 자신의 면전에서 벌어진 남편과 차남의 비밀스러운 거래에 치를 떨었다.

그리 위험한 행동을 용인하다가 그 치기 어린 손에 목이 베이실 것은 두렵지 않으신지.

황제는 다섯 살 나이에 황태자가 되었다.

힘 있는 자들은 저희끼리 경쟁하며 그에게 줄을 대고, 거기서 밀려난 자들은 다른 황자녀들에게 붙어 살길을 도모했다.

그들은 그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제거하려 끈질기게 음모를 꾸몄다. 이지가 생긴 이래 평생 정쟁 속에 살아온 것이다.

그 끝은 황가의 그것다웠다. 황제는 성년식을 한참 남겨 둔 어느 봄, 제 손으로 형제자매를 참수하고 유일한 직계 타가르가 되었다.

그가 일찍이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은 것은 귀족들을 줄서기에서 한발 물러나게 만들었다.

분명 미리 줄을 서 제가 선택한 황자녀를 위해 길을 닦고 싶어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황제의 의중을 파악할 머리가 있다면, 그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내릴 철퇴도 두려워하리라.

황제가 자녀들이 장성한 후 경연을 연 것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가족 상잔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는, 동시에 차기 황권 이양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황후는 과연 이유가 그뿐 일까 늘 의심했다.

황제가 자식들을 찍어 눌러 제 권력을 더 오래, 공고히 차지하려는 노욕은 아닌가.

황후는 자신의 그러한 짐작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이 이름다운 아들이 제위에 올라 저와 같이 아름다운 제국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어째서 바람직하지 않은가.

그녀는 그레이언의 늘 화가 난 듯한 눈과 그를 보호하듯 곁을 지키는 로카르드의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제야 오를이 밀리오라의 반지 도난 사건을 신문에 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그 사생아 시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지 도난 기사로 인해 이번 경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이 경연은 두 형제가 승자와 패자를 극명히 가리는 살벌한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오를은 본인의 건강 문제와 그레이언의 승전으로 열세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녀의 등장으로 삼자 구도가 형성되면서 그러한 분위기가 희석되고 있었다.

형에게 눌려 울분 가득하던 그레이언은 이제 로카르드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발목을 잡아채는 데는 그 시녀가 적격이었다. 영특한 오를은 그 사생아에게 그를 위한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황후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 * *

황녀 전하는 폭주했다.

그녀가 티 파티 멤버들에게 샴페인을 돌리는 모습은 카이델 공자의 배 갑판에서 취해 고함치던 병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저는 황녀 전하께서 경연에서 승리하실 줄 알았어요! 이대로 황태녀가 되시는 거예요, 전하!”

“밀리오라 전하의 경연 승리를 축하하며, 건배!”

“타가르 제국 장래의 첫 번째 황태녀를 위하여 건배!”

내 목이 떨어지게 할 거냐고 난리를 쳤던 게 누구더라?

칭찬도 받던 사람이 받아야지, 황녀 전하는 머리가 다 크고 나서 처음으로 칭찬받고 성취를 경험하니 감당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색이 되어 그녀들을 말리려 했지만, 잔을 가장 높이 쳐든 건 황녀 전하였다.

“건배! 다들 잔 비워, 건배!”

나는 티 파티 영애들을 말리느니 내가 이 꼴을 안 보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테이블 끝에서 샴페인 한 병을 슬쩍 가로채 밖으로 나갔다.

론드 경은 내가 뒤춤에서 샴페인 병을 내밀자 놀라 눈이 커졌다.

“시녀님, 대낮이오.”

“아휴. 전하의 응접실을 보셨어야 해요. 거긴 이미 난리라고요.”

론드 경은 샴페인 병 너머로 내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그의 표정을 퍽 잘 읽을 수 있었다.

‘황녀 전하가 취해서 실수하지 않도록 가서 지키지 않고 뭐 하시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도 한 번쯤 승리의 맛을 즐겨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

론드 경은 그제야 샴페인 병을 쓰윽 받더니 레이블을 보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내 눈치를 보며 민망해했다.

좋은 술인 모양이었다.

“다음 경연 답은 찾으셨소?”

“그거요? 그게 꽤 정석의 문제라 오히려 어렵네요.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으니 차차 생각해 보려고요. 이 술은 약이랑 같이 드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내가 일어나자 그는 낮게 웃었다.

* * *

다음 날 나는 밀리오라 전하의 응접실 대신 침소로 갔다. 그녀가 숙취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기했다. 타가르의 은발은 숙취로 엉망진창이 되어 일어났을 때조차 차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아아, 머리 아파.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내가 바라던 바다.

“다른 영애들은요?”

“걔들은 나보다 더 마셨어. 지금쯤 꼼짝도 하지 못할걸.”

나도 알고 있다. 인사불성이 된 그녀들을 마차에 실어 집으로 돌려보낸 것은 나였으니까.

나는 밀리오라 전하의 응접실로 끊임없이 술과 맛있는 안주를 들였다.

모두가 그렇게 마시고 기억이 끊겨 버려야 어제의 그 참담한 대화도 잊어버릴 것 아닌가.

황태녀라니. 무슨 참담한.

예전 같으면 나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레이언 전하가 나를 죽이겠다고 할 때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상대하는 것이 그런 자의 적의라면, 나는 절대 그녀를 응원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시녀로서의 내 의무는 밀리오라 전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밀리오라 전하가 뭐가 있냔 말이다. 권력이 있어, 군사가 있어. 애초에 야망도 없다.

있는 거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사생아 출신 시녀 하나…….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기운이 빠졌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혹시라도 황녀 전하가 첫 번째 경연 승리에 취해 황태녀를 노린다는 말이 황녀궁 밖으로 나가기라도 하면 나로서도 감당 못 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럴 바에야 머릿속을 깨끗이 지우는 것이 낫지 않은가.

하지만 밀리오라 전하의 머릿속은 아직 덜 깨끗했다.

“아직도 거기서 뭘 하고 있어?”

“네?”

“두 번째 경연은 어떻게 할 거야? 지난번 정도로는 좋은 답을 내야겠지? 네가 내 시녀라면.”

“전하…….”

“두 번째도 승리해야지. 안 그러니? 너는 자존심도 없어?”

제 자존심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생존하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만.

하지만 나는 과장되게 대답했다.

“물론 두 번째도 최선을 다해야지요, 전하. 머리에서 쥐가 나게 고민해 볼게요!”

“그래. 바로 그거야! 정신 단단히 차리고 똑바로 해. 이미 봤겠지만 오를 오라버니는 장난이 아니시거든. 불로초라니, 세상에!”

그건 돈과 인맥이 있으면 사는 거고요, 저는 공해에서 더 엄청난 걸 이 눈으로 보고 말았답니다. 전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겉으로는 최대한 미소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전하도 한 가지 해 주셔야 할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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