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공해의 무법자(3) (58/155)


58화. 공해의 무법자(3)
2023.05.01.


“전하의 배를 응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의 고함을 못 들으셨습니까?”

카이델 공자의 능청스러운 대답을 들으니 정신이 확 들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내 존재가 못내 거슬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로아르, 오늘을 함께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영광입니다!”

“하지만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도록. 밀리오라를 위한답시고 허튼짓을 했다간, 여기 로카르드의 목이 달아날 테니.”

내가 굳은 얼굴로 입을 앙다물자, 카이델 공자가 내게 닥치라고 눈짓을 했다.

하지만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저는 황녀 전하께서 다른 분을 음해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공으로 인정받으시도록 도울 것입니다. 전하.”

그레이언 전하는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카이델 공자를 보았다.

카이델 공자는 할 말을 찾는 듯하다가 나를 외면한 채 설핏 웃었다.

그러자 그레이언 전하가 말했다.

“시녀 로리샤 로아르.”

“네, 전하.”

“제브론 호텔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전하. 처음으로 로아르 백작님과 둘이 여행한 곳이라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내게 빚을 졌어. 언젠가는 그걸 회수하겠다.”

“네. 전하.”

나는 실제로는 ‘그렇다고 해도 저를 납치한 빚을 까는 정도인데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족에게 말대꾸하기엔 나는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했다.

그나저나 이 한 쌍은 빚 지우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레이언 전하는 다시 나를 무시하며 기분 좋게 명령했다.

“돌아간다.”

“각자 위치로! 귀환한다!”

카이델 공자의 명령에 병사들이 환호했다.

우리는 다시 배로 돌아갔고, 그가 불화살을 쏘아 협상용 배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우리의 여정은 끝났다.

바다 위에서는 해적선 파편을 붙잡은 해적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우리 배는 본토를 향해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내 안쓰러운 시선을 눈치챈 카이델 공자가 말했다.

“해적들은 잡히면 모두 사형이니 구해 주는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이번 일이 알려져서도 곤란합니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다 끝났다 싶으니 감당하기 힘든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선실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는 몰라도, 그레이언 전하는 도난당한 ‘붉은 눈물’을 미끼로 해적들을 협상 테이블로 꼬여 냈다.

‘붉은 눈물’ 정도의 금액이면 해적 하나가 감당하기에 부담스러운 금액일 테니, 해적 여럿이 돈을 모아 사들이려 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해적들은 개인 사업자와 비슷해서 서로를 믿지 못했고, 거래를 주도한 해적이 그것을 꿀꺽할까 봐 몰려나와 거래 현장을 지켰을 것이다.

혹은 그것을 빼앗으려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카이델 공자와 그레이언 전하가 그 점을 예측하고 준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로이만 실장님에게 연금술사로서의 실력을 발휘해 엄청난 무기를 만들게 했고, 그것을 활용해 턱없이 적은 인원으로 공해의 해적단을 소탕했다.

나는 선실 한쪽에 웅크려 잠을 청하며 그레이언 전하의 말에 담긴 속뜻을 곱씹었다.

공해의 해적이 사라지면 아가엘과 스마일란의 철광석 거래에서 군함이 출동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제국도 제브론 곶에 해군 기지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카이델 공자와 그레이언 전하는 수십 년간 주변국을 괴롭힌 해적을 소탕하는 동시에 제브론 호텔을 지켰다.

단 한 번의 해상전투로 말이다.

황제 폐하의 탄신일 선물로 이만한 것이 또 있겠는가.

나는 잠에 빠져들며 중얼거렸다.

“졌다. 졌어.”

* * *

“아가씨, 일어나십시오. 공자님께서 찾으십니다.”

목소리가 굵은 남자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갑판으로 올라갔다.

“왜 부르셨어요?”

나는 카이델 공자에게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런데 눈을 비비며 살짝 잠을 깨 보니 키를 잡은 그 인간이…… 미치게 잘생겨 보이는 게 아닌가.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자 그는 부하에게 키를 넘기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어깨를 살짝 붙잡아 내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세웠다.

“이걸 보라고요.”

“아……!”

나는 턱을 떨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카이델 공자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내 어깨에 망토를 덮어 주는 느낌도.

제브론 해변은 아름답다. 하지만 석양에 물든 공해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뭐가 더 낫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거대한 불덩어리를 반쯤 머금은 바다가 붉게 물들어 반짝이는 광경은 그저 아름답다는 표현 말고 다른 말을 붙일 수 없다고 말하는 거다.

나는 태양이 서서히 바닷속으로 잠기고, 해면에 차갑고 질긴 어둠이 물드는 동안 난간에 기대 있었다.

밤바다의 공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지만 카이델 공자가 미리 입혀 준 망토 덕에 괜찮았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카이델 공자가 갑자기 절세 미남처럼 보였던 것은 그가 그 아름다운 석양빛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어서였다.

이제 갑판은 떠들썩했다. 쉬운 승리를 거머쥔 병사들은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멀미약은 더 이상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술도 합니까?”

언제 돌아왔는지, 나는 카이델 공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병사들을 부러운 듯 응시하는 시선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아, 아니요. 술 끊었어요.”

“……!”

나는 카이델 공자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고 내가 무심결에 쌍욕이라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나는 마음속에서 한참 곱씹다가 겨우 말했다.

“고마워요, 카이델 공자님.”

그는 한결같이 못마땅한 사람이었지만 그 화풀이를 하기도 전에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 일의 가짓수가 더 늘어나곤 했다.

나는 그게 점점 더 싫었다.

그런데 그가 공해의 석양을 보여 주고 나자 그런 소소한 일은 더 기억나지 않았다.

그도 간결한 말로 대답했다.

“천만에요.”

* * *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두건이 벗겨졌을 때, 내 앞 마차 창밖에는 수도의 밤거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갑자기 현실을 자각하자 이가 달달 떨렸다.

“저……. 저……. 무단결근했어요! 밀리오라 전하가 저를 죽이려고 하실 거예요!”

“타가르들은 주로 시녀를 죽이려 드는 걸 즐기죠.”

그것도 농담이라고!

나는 고개를 획 돌려 카이델 공자를 노려보았다.

음흉한 자객 같은 복장에서 반듯한 귀족의 모습으로 변신한 그가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공자님은 웃음이 나오시겠죠! 하지만 저는……. 흑.”

“도와줄까요?”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도와줄까 하는 그 한마디로 그와 나의 입장 차이가 자각되어 부아가 났다.

자기는 주군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고 뻐기는 것도 아니고.

넌 참 쉬워서 좋겠다. 다들 너를 동경하고, 존경하고,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니 모든 게 수월하겠지.

하지만 이제 나는 그에게 그런 일로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들에게 쉽게도 얻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호의가, 절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목격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책임져 왔다.

그러니 그와 나의 까마득한 차이는 진실이었으며 정당했다.

나는 내 머릿속을 환기하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 티 파티는 왜 거절했다가 오신 거예요? 그때 제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세요?”

“제가 안 가면 곤란해지는 것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맞는데……!”

그의 빙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이놈이 알면서 이러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 몰아넣으면 재미있어요?”

“네.”

“하!”

나는 카이델 공자에게 알아서 기가 죽어 버린 후라 맥이 빠져서 말했다.

“황녀 전하께 절대 아무 말씀도 마세요. 정말 곤란해요.”

“원하신다면.”

나는 마차 벽에 머리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아팠다고 할까? 아니야, 내 방이 빈 걸 알았을 텐데. 황궁은 넓으니까 길을 잃었다고 할까?”

그런데 그가 슬쩍 말을 끼워 넣었다.

“수도 근교 보육원에 준 기부금에 문제가 생겨서 급히 갔다가, 아이들이 붙잡아서 자고 왔다고 하면요?”

“아악!”

카이델 공자는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어색하게 따라 했다.

“아…… 악?”

잘난 새끼. 미운 새끼.

그런 엄청난 경연 선물을 준비한 것도 모자라 내 문제까지 단박에 해결해?

나는 몹시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악……. 좋은 생각이시네요, 라는 뜻이에요.”

“당연하죠. 내 생각인데.”

“가, 감사…… 합니다.”

이제는 그를 재수 없어 하기도 피로했다.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창밖을 보다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축하요?”

“첫 번째 경연에서 이기신 거요.”

“글쎄요.”

나는 그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천천히 이해했다.

“그래도요.”

그제야 그가 진심으로 웃었다.

“감사합니다.”

어느덧 제3황궁 건물이 보였다.

* * *

공해의 해적단이 내부 분쟁 끝에 자멸했다는 기사가 난 것은 이틀 후였다.

카이델 공자가 가져간 배는 깨끗이 불타 사라졌으니 해적단 괴멸의 원인을 그렇게 추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면의 활자를 내려다보며 멍한 기분에 빠졌다. 내가 생생히 목격한 일을 남의 목소리로 재구성한 기사문으로 보니 그것은 전혀 다른, 낯선 사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황궁에서 나만 안다는 것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 할미가 공해의 해적이 싹쓸이되는 걸 직접 봤단다! 홍홍홍.’ 하고 말해 볼 기회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황녀 전하는 내가 응접실에 나타나자 도끼눈을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변명해 봐!”

1682942084917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