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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공해의 무법자(2) (57/155)


57화. 공해의 무법자(2)
2023.04.30.


나는 멍한 상태로 이제는 무슨 맛인지도 모를 빵을 뜯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했던 말을 떠올랐다.

‘그녀는 그저 살려고 입궁한 겁니다.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허튼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압니다.’

그는 나를 위해 감히 그레이언 전하에게 맞서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그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내 속을 그렇게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조금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어째서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자신의 주군과 맞서는가.

저러니 미친놈 소리나 듣지.

나는 불쑥 말했다. 항의라기보다 투정인지도 몰랐다.

“공자님이 뭘 알아요?”

“……?”

“그레이언 전하 앞에서 절 살려 두라고 하면서 그러셨잖아요. ‘제가 압니다.’”

“제가 그랬습니까?”

그는 시치미를 뗐다. 나도 그에게 딱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내가 당하니까 속이 꼬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그러셨어요.”

“급해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

아마도 그에게서 진짜 속내는 듣기 힘들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무사할 방법은 그가 이 알 수 없는 음모에서 승리하는 것뿐이었다.

실패하면 반역죄로 목이 댕강이니까!

나는 울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많이 먹고 이기고 와라, 이 새끼야!’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는 눈을 피하며 물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어디 계세요?”

“다른 배 세 척을 이끌고 대기 중이십니다.”

“총 여섯 척.”

“한 척은 미끼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벌일지, 한번 상상해 봐요.”

“안 할래요.”

“같이 즐겨 봐요.”

그는 지금 나에게 퀴즈 놀이를 청하고 있었다.

나는 뚱하니 중얼거렸다.

“범선 여섯 척은 인근 두 왕국과 해전을 벌이기는커녕 공해의 해적단과 싸우기에도 부족해요. 상거래의 대규모 경호 선단이라고 하면 어울려 보이는데, 그러기엔 아까 군사 행동이라고 하셨으니까…….”

“…….”

“게다가 병사들이 멀미를 하는 걸 보면 수전에 훈련된 병력도 아니고……. 혹시 카이델가의 가신인가요?”

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는데,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이 배는 명백히 불법적인 행동을 위해 항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불법적인 거래 말이다.

“혹시 해적과……?”

나는 카이델 공자의 눈썹이 기쁜 듯 살짝 휘는 걸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미친 거야. 이 새끼는!’

그런데 대체 뭘 거래하는……?

그때 신문 기사가 뇌리를 스쳤다.

도난당한 유명한 보석, ‘붉은 눈물’. 그리고 라일리 경매장에 나타난 카이델 공자.

그가 겨우 중고 반지 하나 사자고 라일리 경매에 나타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그 보석은 앙카르트 자작의 것인데……?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표정에 약간 당혹하더니 빙긋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때 다다다, 발소리가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공자님! 배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웃으며 입을 쓱 닦고 일어났다.

“여기 있으면 안전할 겁니다. 구경하러 올라와도 말리지는 않을 거고.”

갑판 위에서는 병사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우르르,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나는 스푼을 재빠르게 움직여 수프를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은 다음 탕 놓았다.

저렇게 말하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올라가야지.

“아우, 씨.”

* * *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전투란 툰바르산 아랫마을 아이들과의 패싸움 정도가 다였다.

그 외엔 모두 개별전이었다. 백작 부인, 미샤…….

하지만 내가 갑판에 올라갔을 때 본 광경은 그런 것들과 규모가 달랐다.

갑판에는 병사들이 가득했다. 우리의 뱃머리가 향하는 곳 너머에는 누런 돛의…… 해적선이 보였다!

“으으!”

나는 돛대 끝에서 펄럭이는 해적의 깃발을 보고 기가 질린 채 바다를 둘러보았다.

삼각형을 이룬 해적선 세 척, 그 맞은편에 꼭지를 맞닿은 우리의 배와 같은 배 세 척이 거대한 X자 대형을 그리고 있었다.

저 배들은 그레이언 전하가 이끌고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X자 중간에 있는 배 두 척은 서로 갑판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 중간의 배에서 거래가 진행 중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해적선 뒤편 멀리로 해적 선단의 형체가 보였는데, 배들이 빡빡하게 모여 있어 몇 척인지 맨눈으로는 분간하기 힘들었다.

카이델 공자의 배 세 척이 합세한다고 해도 저들이 이리 합류하면 턱도 없는 열세였다.

공해의 해적이 얼마나 악명 높냔 말이다!

해적선 돛 위로 불룩하게 일그러진 해골 그림을 보며, 나는 저 해골의 주인은 생전에 끔찍하게 못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했다.

겨우 이 정도 병력으로 해적 선단을 향해 나아가는 상황에서 내 이성이 멀쩡하게 붙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본 카이델 공자의 얼굴은 묘하게 침착했다.

전방을 응시하는 그는 오히려 이 싸움에 흥분하여 기대에 찬 사람처럼 보였다.

저 강인함과 과감함은 원래부터 새끼 사자의 얼굴 아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낯설게 여기며 입을 꼭 다문 채 조타석 난간을 붙잡았다. 이제부터 무엇이 시작되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조금 후, 중간의 연결된 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속력!”

카이델 공자의 명령에 선원과 병사들이 일제히 흩어져 모든 돛을 내렸다.

키를 잡은 노인은 진짜 선원인 듯했는데, 그는 이마에 힘줄을 잔뜩 세운 채 진행 방향을 노려보았다.

우리 배가 그레이언 전하의 배를 앞질러 해적선의 뒤편으로 갈 때, 그레이언 전하의 배에서 불화살들이 날아올랐다.

연금술사 로이만 실장님의 발명품이었다.

불화살은 해적선으로 곧장 날아가더니, 배에 박힐 때 폭음을 내며 터졌다. 무시무시한 화력이었다.

‘연금술은 무서운 거였어…….’

해적선은 순식간에 불타올랐고, 위기를 느낀 해적들은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중간의 협상용 배를 지나친 카이델 공자의 배는 최고 속력으로 해적 선단을 향했다.

해적들도 대열을 벌리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델 공자가 명령했다.

“불화살 준비!”

배들이 가까워지고, 병사들이 폭발하는 화살을 쏘아 대자 해적선에 순식간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사이 협상선과 그 호위선을 해치운 그레이언 전하의 선단이 즉시 우리를 따라잡아 공격에 참여했다.

해적 선단은 십여 척이나 되었지만 타가르 황실 연금술사의 불화살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후미의 배 몇 척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가까운 배 두 척이 속력을 올려 추격했다.

나는 그동안 난간을 꽉 붙잡은 채 카이델 공자가 명령을 내리는 고함을 들었다.

발사! 발사! 우측으로 포위한다! 발사!

나는 불타는 해적선들이 차례로 가라앉는 바다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해적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수면을 점점이 물들이고 있었다.

카이델 공자의 목소리와 전투의 소음, 특이한 매연의 냄새와 배의 진동이 나를 그저 압도했다.

“속도를 올려! 놓쳐선 안 된다!”

우리의 배가 해적선 하나를 스쳐 따라잡을 때, 카이델 공자가 나를 품으로 와락 끌어당기며 검집을 휘둘렀다.

“앗!”

그의 손아귀 힘에 아파서 소리를 질렀을 때, 탕 소리와 함께 조타석 난간에 해적의 도끼가 박혔다.

키를 잡았던 늙은 선원이 자신을 스친 도끼를 노려보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것은……, 뼈가 떨리는 쌍욕.

나는 진정한 고수와 한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비극이었다. 배가 다 아플 정도였다.

“로아르 양?”

나는 놀라 멍청해진 눈을 들었다. 그리고 움찔 팔을 빼며 물러나 난간을 붙잡았다.

“지휘, 하세요.”

그러자 그가 내 몸을 날카롭게 훑은 다음 다시 고함쳤다.

“좌현으로 발사!”

멀리 도망친 해적선에서 불길이 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팔 소리가 퍼졌다.

그걸 본 카이델 공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배를 돌려라! 전하의 배와 합류한다.”

‘끝난 건가…….’

나는 마지막 해적선이 천천히 침몰하는 것을 바라보며 난간을 타고 느리게 주저앉았다.

카이델 공자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멍하니 앉은 내 턱을 살짝 당겨 들었다.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용감했어요. 로아르 양.”

우리 선단은 곧 합류하여 대열을 이루었다. 우리는 협상용 배로 옮겨 탔고 그레이언 전하도 그렇게 했다.

나는 거기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갑판 한중간에 해적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델 공자의 사병 몇도 부상을 입었지만, 적어도 사망자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둘러보다 그레이언 전하와 눈이 마주쳤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제 싸움은 끝났고, 자칫하면 나도 해적들처럼 저 바다의 점 하나가 될 차례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는 흐뭇한 얼굴로 갑판을 둘러보느라 나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는 어느 해적의 시체를 뒤집더니 품에서 새빨간 보석 목걸이를 찾아냈다.

전하의 손가락에 걸린 목걸이는 내가 처음 보는 찬란하고 붉은 빛을 뿜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유쾌하게 웃었다.

‘저게 ‘붉은 눈물’……?’

그는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카이델 공자에게 말했다.

“걱정 마. 이번엔 내가 알아서 할게.”

카이델 공자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묵례했다.

그레이언 전하가 나를 다시 주시한 것은 그때였다.

그는 내 코앞까지 오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카이델 공자에게 말했다.

“여기 로아르 시녀께서 착하게 구시던가, 로카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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