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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공해의 무법자(1) (56/155)


56화. 공해의 무법자(1)
2023.04.29.


그 싸늘한 말에 내 온몸의 솜털까지 다 섰다. 나는 재빨리 카이델 공자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뭐 하세요, 어서 가요.”

그러자 그레이언 전하가 거칠게 몸을 돌려 출발했다. 내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르자 카이델 공자는 침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컴컴한 복도를 걸으며, 나는 침묵 속에서 내 심장이 격렬히 뛰는 걸 느꼈다.

‘저들은 저 수상한 물건을 들고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걸까?’

제3황궁 측문으로 나갔을 때, 누군가 내게 두건을 뒤집어씌웠다.

* * *

“하아…….”

두건이 벗겨졌을 때, 내 눈앞에는 찬란한 아침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바닷바람에 마구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붙잡고 태양의 파편이 흩뿌려진 듯한 해수면을 바라보았다.

카이델 공자가 내게 뜨거운 차가 담긴 나무 컵을 내밀었다.

“마셔요.”

나는 컵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우리는 커다란 범선의 조타석에 있었다.

갑판 위의 칼 찬 남자들은 신분을 드러낼 만한 표시가 전혀 없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세로 보아 그들은 절대 선원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 표식 없는 배 두 척이 좌우에서 우리 배를 뒤따르고 있었다. 카이델 공자는 지금 작은 선단을 이끌고 어디론가 항해하고 있었다.

나는 밤새 눈이 가려진 채 이리저리 운반되었더니 온몸이 다 뻐근했고, 이제는 진이 빠져서 겁을 낼 기운도 없었다.

나는 차를 후 불어 마시며 기운 없이 말했다.

“방학이라서 부업으로 해적이 되셨어요?”

카이델 공자는 잠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갑판에 있던 남자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오래 쳐다보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카이델 공자가 내 주의를 환기하듯 말했다.

“우리는 지금 공해에 있습니다.”

공해? 공해라니!

“멀…… 리 왔네요? ……몹시.”

나는 당황해서 눈물이 다 그렁그렁해서 물었다.

“저를 바다에 버리실 거예요?”

“만약에 로아르 양이…….”

“아, 쫌! 그 편지 얘기는 그만하시고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무안한 얼굴을 했다.

내가 어떻게 눈치를 채고 선수를 쳤는지, 못마땅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럴 리가요.”

“…….”

내가 이번에 만난 그레이언 전하는 의심 많고 조급한 사람이었다.

황후 폐하나 황녀 전하도 그렇고, 돌이켜 보면 타가르들에게는 잔혹한 면모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가 나를 배 밖으로 집어 던지라고 명령하면 카이델 공자라고 무슨 수가 있을 리가.

내 낙담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카이델 공자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런 일은 내가 없게 할 겁니다.”

“…….”

어떻게? 황족을 어떻게 마음대로 할 건데요?

그는 마치 내 마음속 소리를 들은 것처럼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절 좋아하거든요.”

“아. 네.”

나는 힘없이 대꾸하고는 차를 마셨다.

그의 확신은 터무니없이 느껴졌지만, 어이없게도 기운이 쬐끔은 돌아오는 듯했다.

그런다고 눈앞의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 머릿속은 또 다른 이유로 복잡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 말이 최대한 농담처럼 들리기를 바라며 가식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지금 반역 행위 중은 아니시죠?”

그러자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되물었다.

“어떤 것 같아요?”

내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컵의 찻물이 살짝 넘쳤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혀를 차며 내 손에서 컵을 가져갔다.

그는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로아르 양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별로 없군요.”

“…….”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지만, 그게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저, 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보라고!

나는 속으로 어금니를 꽉 물어 태연한 척을 하며 그의 손에서 컵을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우리 그렇게 친하지 않잖아요.”

“…….”

“그런데 절 왜 구해 주신 거예요? 지금 상황을 보니까 그레이언 전하의 판단이 맞았던 것 같은데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몹시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것이 틀림없었다. 나라도 이런 일을 목격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을 거다.

그런데 카이델 공자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나 삐졌거든요.”

말문이 턱턱 막힌다. 이것도 재주다.

나는 뚱하니 뱉었다.

“우리 친하지 않잖아요.”

“…….”

나는 십 년은 늙어 버린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기, 친하지도 않은데 2황자 전하를 거스르면서까지 저를 살려 주신 이유가 뭐냐고요. 이유나 알고 살게요.”

“사과.”

“치, 친하지 않은 건 사실인데…….”

그러자 그가 눈을 오만하게 떴다.

“사람이 노력도 안 합니까? 은혜도 몰라요?”

“죄송…… 해요.”

지는 느낌이다. 아니, 한없이 지고 있다.

하지만 인질 주제에 뭘 바라나.

나는 허탈하고도 초연한 기분으로 새파란 공해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취미라고 해 두죠.”

“……취미요? 목숨 거는 게요?”

그는 말없이 나를 외면했다. 내 반문이 마음이 안 드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생각해 봐도 내가 그렇게 틀린 말을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나를 상당히 자주 목숨 걸고 살려 주는 경향이 있었다.

“…….”

나는 하려던 말을 잊었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푸른 바다와 붉은 태양의 빛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무표정하고 차가우며 동시에 강렬했다.

내가 가진 질문은 죄다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눈이었다.

그는 무심히 대꾸했다.

“당신을 곁에 두면 절대 심심할 일은 없겠군요. 물론 산 채로.”

아, 그러시구나.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도움받은 주제에 질문이 많았네요. 생각해 보면 누가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 준 건 우리 엄마 말고는 처음이라……. 그런데 그게 이런 수상한 일에 함께 가담할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 같고, 그러네요.”

그러자 그가 가슴으로만 웃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퍽 유쾌한 반응이었다.

‘이 인간 뭐지……?’

그의 웃음을 보니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웃음은 너무 편안해서 나까지 함께 편안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바다를 건너 같은 목적지로 여행을 가는 친구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상황과 그와 나의 관계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공포와 당혹감이 극에 달해 내 이성이 고장 난 모양이었다.

아니다.

야망 가득한 2황자와 함께, 신무기를 만들어, 수상한 배로 몰래 공해로 나가는 그가,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다. 고장 난 건 그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조타석에 선 그는 수도에서 만났던 로카르드 카이델과 어딘지 다른 남자처럼 보였다.

더 단호하고, 거친 듯한 남자.

갑작스러운 거리감이 나를 휩쌌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빚은 나중에 한꺼번에 받을 테니 그렇게 알아요.”

내 마음은 그제야 편안해졌다.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그의 계산 속에서, 나는 나중을 기약할 정도의 값어치가 매겨진 것이다.

지금 그 속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불편해하는 것일 뿐, 그가 나중에라도 손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어 배 안을 둘러보았고, 나는 그를 따라 난간에 기댄 몇 명을 보았다.

이제야 자세히 보니 멀미로 토하고 늘어져 있는 중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멀미약이 필요해요. 재료는 아래에 있어요.”

가만 보면 이 인간은 사람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령이 있었다.

나는 잠자코 선실로 내려가 멀미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자 누군가 식사를 갖다주었다.

그동안은 너무 긴장해서 허기졌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는데, 음식 냄새를 맡자 배 속이 난동을 부렸다.

내가 빵을 한입 베어 무는데 카이델 공자가 들어왔다. 나는 빵을 문 채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밥이라도 혼자 편하게 먹자고 발끈하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그의 배였다.

인질 주제에 누구와 밥을 먹고 싶네, 싫으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아…….

그는 내 앞에 앉더니 빵을 북북 뜯어 먹었다. 뜻밖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제브론 호텔에서 보았던 그 우아한 식탁 매너는 어디 가고?

그는 내 시선을 다 알아채고 웃었다.

“전쟁터 습관이에요. 당신의 반쪽이 벨로아 거리에 있다면 내 반쪽은 아마 툰바르에 있을 겁니다.”

그는 편안한 말투로 말했지만, 나는 전쟁이 그에게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무엇을 말이다.

나는 몹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씀은 지금 출정 중이시라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죠. 폐하의 허가가 없는 공해상의 군사 행동은 반역죄로 취급됩니다.”

“아, 그렇구나……. 폐하의 허락을 안 받으셨구나…….”

나는 영혼이 표백된 채 그렇게 끄덕거렸다. 이성이 박살 나니 입이 저 혼자 나불거렸다.

“잘못하면 국제 분쟁도 일으키겠네요……? 아가엘과 스마일란까지. 와아…….”

“기운 차려요. 성공하기만 하면 별일 없을 테니까.”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왕 같이 죽게 된 것, 무슨 일인지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제가 멀미약 먹여서 병력을 더 쌩쌩하게 만들어 드렸으니, 이제 저도 공범이잖아요. 로이만 실장님은 대체 뭘 만드신 거예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고 봐야 더 재미나죠.”

재미라니…….

나는 그에게 화답하듯 따뜻하게 웃었다.

‘이 새끼야……. 목숨 걸고 웃음이 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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