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나는 그녀를 모른다, 로카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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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나는 그녀를 모른다, 로카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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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나는 그녀를 모른다, 로카르드
2023.04.28.
「대부호 앙카르트 자작이 ‘붉은 눈물’을 흘리다! 세기의 적다이아몬드 도난 사건」
신문을 펼친 황후는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마치 황후궁 응접실의 시간이 돌연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그녀의 손은 무심결에 드레스 자락을 비틀어 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표정을 짓누르느라 기묘하게 경련했다.
‘그게 왜 여기에…….’
그때 부드러운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얹혔다.
“모후께서는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황후는 오를이 곁에 앉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미소 지었다.
“천만 골드짜리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리다니, 난감한 일이지 않니. 오를.”
“흠…….”
오를은 기사를 눈으로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황후는 얼른 분위기를 환기하듯 물었다.
“경연 준비는 어찌 되어 가고 있어?”
“르네 자작이 보낸 자가 물건을 찾았다고 합니다.”
“믿어도 되겠지?”
“당연히요.”
오를은 활짝 미소 지었다.
* * *
후원에 산책을 나갔을 때, 론드 경은 나를 향해 설핏 웃었다.
그의 웃음은 처음 본다고 느낄 정도로 드문 일이라, 나는 반갑게 다가갔다.
“론드 경,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황녀 전하의 기사를 봤소.”
“보셨어요? 잘됐지 뭐예요.”
“밀리오라 전하께서도 몹시 기뻐하셨어요.”
론드 경은 그렇게 말해 놓고 아차 하듯 눈을 피했다.
어라?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말했다.
“전하께서 내게 금일봉을 주셨소.”
“좋으시겠다! 황족이 내리는 상금은 얼마나 되나요? 액수는 안 밝히셔도 돼요. 그냥 말을 살 정도인지 집을 살 정도인지…….”
내가 갑자기 흥분하자 론드 경이 낮게 웃었고,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하룻저녁 술을 거하게 마실 정도요.”
“아……. 네.”
뭐야, 황족이래도 돈에 있어서는 짜구나.
나는 괜히 김이 빠져서 후원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전하께서 시녀님을 좋아하시오. 계속 그렇게만 해 주면 나도 고마울 거요.”
“제 일 인걸요. 론드 경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고요.”
론드 경은 황녀 전하에 대해 자기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의외로 허풍도 있는 편이었다.
황녀 전하가 나를 좋아한다니, 하하하.
나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고 싶어 손가락이 막 꼬였지만 꾹 참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약이 다 떨어져 가는데…….”
“아…….”
나는 거기서 머리가 정지해 버렸다.
원래라면 얼른 가서 약을 타 오겠다고 바로 일어났을 테지만, 오늘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창고 안에서 내 시야를 꽉 막던 카이델 공자의 가슴이 떠올라 숨이 다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미남에게 살해당한다고 아름다운 죽음이 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론드 경의 거구를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 근육은 그의 통증의 크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나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약제실장님을 만나 뵙지 못해서 그냥 왔지 뭐예요. 다시 가 볼게요. 걱정 마세요.”
“고맙소. 로아르 양. 신세가 크오.”
“아휴,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잔망스럽게 웃으며 제3황궁으로 향했다.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지만, 나는 다시 각오를 다졌다.
사생아 주제에 쉽게 기죽기까지 하면 그야말로 살아갈 방법이 없는 거다.
‘그래, 노크. 노크를 크으게 하는 거야!’
약제실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미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약은 실장님이 바쁘시면 허락을 얻어 내가 만들면 된다.
물론 그 흉측한 물건들이 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노크만 잘하자!
나는 문짝이 원수인 양 주먹으로 두들겼다.
쾅! 쾅! 쾅!
“로이만 실장님! 계세요? 저는 로리샤입니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쾅! 쾅!
“문 부서지겠어요.”
문이 빼꼼 열리며 로이만 실장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지친 몰골을 보고 놀라 멈칫했다.
대체 며칠이나 밤을 새운 건지.
그는 나를 안으로 들이는 대신, 문밖으로 약병을 내밀었다.
“이거 때문에 왔지요?”
“어떻게 아시고…….”
“마카롱 덕분에요. 이제 돌아가요. 나는 좀 쉬어야겠어요. 많이……. 오래…….”
“네. 그러셔야죠. 감사합니다.”
문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닫혔다.
나는 아직 온기가 남은 약병을 안고 제3황궁 후원 쪽으로 나갔다.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지만, 긴장을 좀 떨치려면 찬 바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행정관들이 퇴근하여 텅 빈 제3황궁은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벤치에 앉아 있자니 예전에 카이델 공자를 따라 몰래 입궁했을 때 이리로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 까마득한 옛날 일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나는 체온이 떨어진 것 같아 복도로 들어갔다. 그곳을 통해 황녀궁으로 돌아가면 찬 바람을 덜 맞기 때문이었다.
약간 오싹한 기분에 몸을 떨며 텅 빈 복도 모퉁이를 꺾는데, 시커먼 것이 훅 다가와 부딪혔다.
“앗!”
그 탓에 상대가 쓴 후드가 벗겨졌다.
“그레이언 전하!”
나는 그를 보고 놀라 머리를 숙였다.
그레이언 전하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며 후드를 다시 썼고, 그의 호위 기사가 내 앞으로 다가서며 나를 험상궂게 쏘아보았다.
황자 전하와 기사가 모두 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뒤이어 그들의 뒤에서 카이델 공자가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화가 난 듯이 내게 쏘아붙이는 그의 손에도 시커먼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께서 여기는 왜…….’
나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들은 저 수상한 가방을 들고, 제3황궁 측문으로 몰래 출궁하려던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보아선 안 될 것을 보았음을 순간 직감했다. 울컥하다 못해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씨X! 하루도 무사히 안 넘어가는 거야?’
나는 얼른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최대한 태연하게,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는데……! 부주의하게 걸어 죄송합니다, 전하!”
그러나 황자 전하는 대답이 없었다.
싸늘한 살기.
머리를 숙인 내 시야에 그들의 짐 가방이 들어왔다.
보나 마나 그 안에는 로이만 실장님이 만든 위험한 화살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때 호위 기사의 클록의 팔 부분이 들렸다. 허리에서 단검을 뽑는 동작이었다.
나를 입막음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겁에 질려 숨을 멈추었다.
그때 카이델 공자가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전하!”
“그녀는 우리를 보았다. 로카르드.”
“그녀는 아무 말 안 할 겁니다.”
“매사 철두철미한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레이언 전하와 카이델 공자가 서로를 쏘아보는 긴장감에 내 손발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멍청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전하.”
그러나 그레이언 전하의 표정에는 동요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날카로운 의심뿐이었다.
카이델 공자는 황자 전하의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다 말했다.
“전하의 행운의 여신을 죽이실 셈입니까?”
그레이언 전하는 무슨 미친 소리냐고 카이델 공자를 쏘아보았다.
“전하께 그 수치스러운 감염증 약을 찾아준 건 그녀였습니다. 그 일에 대한 소문을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그 기생충 사건을 어디 가서 나불거렸다면, 아마 지금 제국의 모든 술집에는 2황자에 대한 노래가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 태양의 배 속에는 벌레들이 살아요, 뭐 이런.
원래 남의 놀림거리는 순식간에 퍼졌다.
“로카르드!”
“그녀는 그저 살려고 입궁한 겁니다. 함부로 입을 놀려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허튼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전하.”
카이델 공자는 목소리로 그레이언 전하를 압박하고 있었다.
복도는 컴컴했지만, 후드 안에서 일그러지는 그레이언 전하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잠시 이를 악물었던 그레이언 전하는 씹듯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로카르드.”
“제가 압니다.”
“그리 주장하고 싶다면, 그녀의 입에 네 목숨을 걸 수 있겠나?”
로카르드는 그 말에 나를 흘끔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나를 언제 봤다고, 나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내놓을 이유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제국의 병권을 주무르는 카이델가의 후계자다.
그렇게 커다란 책임을 진 사람은 자기 목숨을 자기 뜻대로 놀릴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그가 단호하게 끄덕였다.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그녀의 행동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오늘 전하께 제 목숨을 걸듯, 그녀의 함구에 대해서도 확신합니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소릴…….
나는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어둠 속에서 윤곽만이 희미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레이언 전하의 중얼거림은 등줄기가 다 싸늘해지게 했다.
“불쾌한 말이군, 로카르드. 불쾌한 말이야.”
카이델 공자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방금 그의 말은 자칫 그가 나를 전하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들릴 위험이 있었다.
2황자 전하 역시 그렇게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날카롭게 말했다.
“물때를 맞추려면 지금 이럴 시간 없습니다. 전하.”
그레이언 전하는 그와 나를 차례로 쏘아보다가 이를 갈 듯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그녀는 네 책임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를 데려간다.”
“전하!”
‘뭐……?’
나는 넋이 빠진 얼굴로 그레이언 전하를 바라보았고, 카이델 공자는 목소리를 억누르느라 이를 갈 듯 말했다.
“전하! 지금 우리가 어딜 가는지 모르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때 그레이언 전하가 카이델 공자에게 바짝 다가오며 후드가 흘러내렸다.
드러난 그의 눈은 방해자나 배신자를 절대 참아 줄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그에게는 나를 믿을 이유가 없다. 나라는 위험 요소를 방치하는 부담을 질 이유는 더더욱 없다.
“지금 처리하든, 네가 데려가든. 결정해. 로카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