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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사라진 '붉은 눈물' (54/155)


54화. 사라진 '붉은 눈물'
2023.04.27.


앙카르트 자작은 ‘붉은 눈물’을 사람들 앞에 공개하는 보석들이 파티를 열었다. 자작 부인이 그것을 착용하고서 손님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자작은 칼린이 낙찰받아 온 ‘붉은 눈물’을 처음 보았을 때는 혀를 찼다.

‘흠집이 있지 않으냐. 천만 골드짜리가!’

그는 적다이아몬드 금속 장식의 날카로운 흠집을 손으로 못마땅하게 문질렀으나, 그것이 지워질리 없었다.

칼린은 웃었다.

‘아버지, 이건 역사예요. 아니, 전설이라고요. 이건 라일리 경매사에서 보증한 ‘붉은 눈물’이고, 그 이름만으로 천만 골드의 가치는 충분해요.’

자작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보석들이 파티 소문이 퍼지자 초청해 달라는 사람이 넘쳐나 감당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붉은 눈물’의 인기는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자작은 사업상 이익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초대장을 발부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연회 홀에 경쾌한 음악이 연주되고 샴페인이 쉴 새 없이 날라지는 동안, ‘붉은 눈물’은 앙카르트 자작의 금고 안에 있었다.

자작 부인은 가슴이 깊이 파인 붉은색 러플 드레스에 ‘붉은 눈물’을 걸쳤다.

옷과 큰 보석의 색상을 맞추는 것은 뭘 모르는 여자들이나 하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자작 부인을 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골에 얹힌 ‘붉은 눈물’은 샹들리에 빛을 받아 기이하게 붉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색상의 드레스를 입었는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손님들의 탄성은 가히 천만 골드 어치였다.

사람들의 홀린 듯한 시선과 경탄의 소음은 자작 부인에게 자신이 천만 골드짜리 여인이 된 것 같은 황홀감을 주었다.

그녀가 손님들 사이를 누비며 샴페인 잔을 비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녀의 취기에 경계심을 느낀 앙카르트 자작은 부인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만 들어가 목걸이를 벗으시오. 그렇게 취하다가 누가 목을 자르고 목걸이를 가져가도 모르겠소.”

“당신은 저보다 목걸이가 중요해요? 어째 하룻밤도 기분 좋게 놓아두시지 않는지!”

취기가 오른 자작 부인은 화를 내며 남편의 말을 무시하려 했으나 그가 이미 불러 놓은 기사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자작 부인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3층 자작의 서재로 돌아갔다.

빈정이 상한 그녀는 목걸이를 벗으려 손을 올렸다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안주인이 뭘 벗는 걸 보고 싶어서?”

기사들은 난감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자작 부인은 취기에 손이 미끄러져 몇 번 실패한 끝에 목걸이를 벗었다.

그것을 책상에 놓인 함에 넣었을 때, 발코니 구석에 놓인 도자기가 와장창 깨졌다.

“에구머니!”

“자작 부인!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들이 달려 들어와 검을 뽑았다. 자작 부인은 놀란 가슴을 붙잡은 채 도자기를 가리켰다.

“바람이 불어 그랬나 봐!”

하지만 기사들은 그저 자작 부인이 취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그래. 나가들 보게.”

자작 부인은 목걸이 함을 남편의 금고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갔다. 그새 더 오른 취기에 다리가 풀려 벽을 짚으면서.

* * *

길가에서 어둠을 뚫고 나타난 로카르드는 문양 없는 마차에 올라타 두건을 벗어 던졌다.

“내 다시는 벽 타는 짓은 안 할 줄 알았는데!”

마차 안에서 기다리던 그레이언은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했다.

그는 두건을 집어서 착착 접은 다음, 방긋 웃으며 로카르드의 무릎에 곱게 올려 준 것이다.

그걸 본 로카르드는 헛헛하게 웃으며 품에서 ‘붉은 눈물’을 꺼내 건넸다.

마차를 출발시킨 그레이언은 잔뜩 쳐든 ‘붉은 눈물’을 달빛에 비춰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눈치챈 자는 없고?”

“자작 부인의 주의를 돌리고 재빨리 빼내 왔어요. 얼마나 취했는지, 제가 눈앞에서 돌아다녀도 헛것을 본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레이언은 흐뭇하게 말했다.

“절벽에 매달려 있던 아마타 족장의 붉은 지붕 집이 아직도 눈에 선해. 네가 거기서 족장의 지팡이를 훔쳐 아마타족의 사기를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그때 우리 병력의 손실이 엄청났을 거야.”

“쩝…….”

“네가 도둑질에 얼마나 대단한 자질을 가졌는지 알게 해 준 건 나니까 감사하도록 해. 로카르드. 내 시종.”

“으흐.”

그레이언은 미리 준비한 작은 함에 ‘붉은 눈물’을 집어넣고 말했다.

“흠집 난 보석이 천만 골드라. 역시 안 사기를 잘한 것 같아. 곱게 쓰고 곱게 돌려주겠어.”

“돌려줄 땐 전 모릅니다.”

로카르드가 토라진 듯 말하자 그레이언이 즐겁고도 음흉하게 웃었다.

마차가 수도 시내로 들어섰을 때, 로카르드가 마차를 멈추게 했다.

“저는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전하.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그레이언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으나 로카르드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 * *

타르간지에 ‘붉은 눈물’의 도난 기사가 실린 아침, 로카르드는 2황자궁에 들어 있었다.

그레이언은 그의 앞에서 신문을 읽었다.

대부호 앙카르트 자작이 라일리 경매에서 낙찰받은 유명한 적다이몬드가 구입한 지 며칠 만에 자택에서 도난당했다.

이렇게 이름이 붙은 고가의 보석은 제국 내에서 팔리기 어려우니 출현한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사라져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

앙카르트 자작가는 단 며칠간 보석을 감상하는 비용으로 천만 골드를 치렀는지도 모른다고, 기사는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며 끝맺고 있었다.

그제야 그레이언은 로카르드가 ‘붉은 눈물’을 훔쳐 오는 도중에 마차에서 내린 것이 이 기사를 제보하기 위해서였음을 깨달았다.

“난 가끔 네가 무서워.”

“‘붉은 눈물’의 도난 소식이 널리 퍼질수록 유리합니다. 세상 끝까지 퍼져야 해요.”

그레이언은 자신의 시종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 정도로 소란스러워졌으니, 범인이 누군지 잡혔다간 평생 감옥에서 썩겠군. 천만 골드짜리를 훔친 도둑이니까 말이야.”

로카르드는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

“오늘 밤 출발하시죠.”

“나 뱃멀미하는데.”

그레이언의 투정에 로카르드는 욱하는 것을 억누르고 휘니드의 약제실로 향했다. 멀미약을 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휘니드는 다른 일로 바빴다. 며칠째 철야 하는 사람에게 멀미약까지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건 심한 처사였다.

‘멀미약 정도라면 로리샤 양도 조제할 수 있을 텐데.’

로카르드는 문득 그녀를 떠올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꼈다.

그가 약제실에 가자 휘니드가 구부정한 자세로 작업하고 있었다. 눈 밑 그림자가 턱까지 내려온 몰골이었다.

로카르드는 얼굴을 바꾸어 웃으며 들어갔다가 약품 냄새에 코를 살짝 찡그렸다.

“환기 좀 하시죠. 실장님 건강도 상할 거예요.”

“환기……. 하세요.”

로카르드가 창을 여는 동안 휘니드는 염세적인 얼굴로 작은 약통에 수상한 액체를 부으며 말했다.

“해지기 전에는 다 준비될 겁니다.”

“저……. 전하의 멀미약이 필요해서 왔어요.”

그러자 휘니드가 고개를 획 돌렸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그러면 해가 진 후에 준비될 거예요. 공자님.”

카이델은 관자놀이를 긁으며 휘니드의 눈치를 보았다.

휘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느릿하게 말했다.

“로아르 양을 불러요. 그녀라면 멀미약 정도는 만들 줄 알 테니까요.”

“실장님.”

“잠결에 들었어요. 로아르 양도 이미 알잖아요!”

수면 부족은 휘니드에게서 평소의 온건한 성격 밑에 잠들어 있던 무엇을 깨우고 말았다.

그는 울컥 분노하여 말했다.

덜덜 떨리는 손에서 위험한 액체가 쏟아지려 하는 걸 보고, 로카르드는 엉거주춤 서서 침을 꼴깍 삼켰다.

“공자님이 로리샤 양을 창고로 끌고 들어가서 무슨 짓인가 하는 걸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멀미약은 그녀에게 부탁해 보세요!”

“무슨 짓이라니……! 실장님? 잠결에 무슨 상상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로리샤 양의 입…….”

휘니드는 하필 그 부분에서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어 로카르드의 말을 잘랐다.

“저는 황실 약제사예요. 그런데 어째서 제가 이런 걸 만들고 있는 거죠?”

로카르드는 창고에서의 행동이 순수하게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강력히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휘니드는 그런 설명을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다정하게 말했다.

“약제사이시기 전에 제국 최고의 연금술사여서요?”

“흥.”

휘니드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코를 벌름거렸다.

평소에는 침착하고 온화한 그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삐진 여자 친구처럼 돌변하는 면모가 있었다.

로카르드는 달래듯 말했다.

“로아르 양을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일이 잘못되면 반역죄로 처형될 텐데, 그녀를 연루시킬 수는 없지 않겠어요?”

“거기, 그 남색 병의 약초를 한 주먹 꺼내 보세요.”

휘니드는 반역죄 부분은 싹 못 들은 척하고 로카르드에게 멀미약을 직접 만들게 시켰다.

로카르드는 휘니드가 시키는 대로 약초를 삶으며 내내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틈을 찾아냈다.

이것은 그에게 몹시 중요한 일이었다.

“실장님, 저는 정말 창고에서 로리샤 양에게 아무 짓도…….”

“지금, 그게 중요해요? 공자님은?”

로카르드에게 개인적인 명예는 매우, 절대적이라고 하리 만큼 중요했다.

하지만 휘니드가 퀭한 눈으로 가리키는 작업대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 일에는 ‘붉은 눈물’을 확보하는 것만큼이나 휘니드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가 실수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로카르드는 꾹 누르고 말했다.

“이제 다 끓은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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