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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휘니드의 비밀 (53/155)


53화. 휘니드의 비밀
2023.04.26.


「황가의 축복이 고아들에게 내리다」

기사에서는 황녀 전하가 반지 도난 사건을 황실이 그동안 따라온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았다고 전하며, 기부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었다.

기사는 라일리 경매에서 특별 자선 경매를 열어 귀족들에게도 자선의 의미를 일깨운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타르간지 쪽에서도 황실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지난번에 황녀 전하를 까서 병을 주었으니 이번에는 약을 준 것이다.

황녀 전하는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며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이 없으니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시려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녀 전하, 기사 논조는 나쁘지 않아요.”

“…….”

“전하?”

고개를 든 밀리오라 전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지금 여기서 나를 칭찬하고 있어.”

그녀의 살짝 잠긴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내가 목이 칼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설마 이것이 그녀가 살면서 처음 들은 칭찬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이 황녀 전하가 세상 최고라고 했어요.”

“돈의 힘은 그런 거야.”

나는 그 말에 기운이 빠지는 기분을 참으며 꿋꿋하게 말했다.

“그 큰돈을 들고 다니느라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론드 경이 제 곁에 딱 버티고 지켜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론드 경에게 작은 포상이나, 치하의 말씀이라도 내려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전하.”

“됐어.”

밀리오라 전하는 내 말을 딱 잘라 버리고 신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 봐.”

내가 바로 알아듣지 못하자 그녀는 은발을 찰랑이며 고갯짓했다.

“너 돌아오면 하려고 그동안 티 파티 안 했어. 오늘은 일없으니까 돌아가 봐.”

“네. 전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속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화를 낸 건 아니니까 되었다.

* * *

예전이었다면 론드의 몸 상태로는 며칠간 이어지는 마차 여행은 불가능했다.

황녀의 새 왈가닥 시녀가 마부를 쉬지 않고 재촉하는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론드는 이번 일을 기회로 그녀가 강제로 먹인 약이 자신의 몸을 얼마만큼 개선해 줬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황궁으로 돌아온 후, 여독을 풀기 위해 하루쯤 방에서 쉴 수도 있었지만 평소처럼 후원으로 나갔다.

후원에서의 일광욕은 그의 일과였고, 보통 기사들은 일상적인 관습을 깨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평소보다 약간 늦게 벤치로 갔을 때, 그곳에는 잔뜩 골이 난 밀리오라 황녀가 있었다.

툰바르산맥에서 부상을 입기 전까지, 그는 자기 실력에 자만심 가득한 젊은 기사였다.

그런 덩치 큰 자가 깡마른 황녀 하나의 시선에 덜컥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은 신기한 광경이라고 해야 했다.

황녀는 멈칫하는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 해? 앉지 않고.”

론드가 불편한 기색으로 앉자 그녀는 짜증을 냈다.

“함부로 지각하고 그래!”

“…….”

론드가 이 후원에 나오는 일은 누구와의 약속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해명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한 얼굴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밀리오라는 그에게 타르간지를 안겼다. 돌돌 만 신문이 그의 가슴에 탁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나 신문에 났어. 멋있지?”

“…….”

론드는 눈으로 나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밀리오라는 그것을 외면하고 새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둘의 키가 비슷해 보였다.

“로리샤가 경이 좋대.”

밀리오라가 그 말만 남기고 삐친 듯 돌아가 버린 후, 론드는 신문을 펼쳤다.

그녀의 기사가 실린 면 사이에 봉투가 들어 있었다.

론드는 멈칫 사방을 주시한 다음 봉투를 열었다. 황녀궁에서 발행한 전표였다.

소박한 포상금이었다.

* * *

나는 오랜만에 약제실장님을 찾아갔다. 실장님 얼굴도 보고 론드 경의 약도 좀 챙겨 놓을까 싶었다.

그 전에 주방에 들러 마카롱을 조금 얻어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늘 부탁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해서였다.

“로이만 실장님. ……실장님? 저 로리샤예요.”

안에서 무슨 소리는 들리는데 노크에는 대답이 없었다.

“실장님, 저 문 열어요!”

살짝 문을 열어 보자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키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실장님은 약제실 한쪽에 놓인 긴 의자에 잠들어 있었다. 딱 보니 밤을 새우고 일하다 잠시 눈을 붙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져간 마카롱을 테이블에 올려놓다가 이상한 걸 보고 말았다.

‘화살?’

테이블에는 화살 한 무더기와 그 끝에 매달 수 있는 작은 대롱들, 심지 같은 것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저절로 대롱 안에 가연성 물질을 채운 불화살이 떠올랐다.

‘실장님이 무기를 개발한다고?’

나는 내 짐작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황궁 약제실에서 살상용 무기를 만들다니, 나는 지금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내 등 뒤에 시커먼 그림자가 달라붙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죽는 건가?’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컥.”

“쉿.”

‘카이델 공자?’

그는 내 입을 막아 나를 연구실 안에 딸린 작은 창고 안으로 데려갔다.

창고 안은 좁아서 우리 둘은 바짝 마주 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불편해 죽을 지경인데, 그는 나를 서슴없이 밀어붙였다.

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는 나를 바짝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 뭐…….

그런데 내가 입을 열기 전에 그가 먼저 뇌까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로리샤 양.”

처음 듣는 그의 음산한 목소리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저 이글거리는 눈빛 좀 끌 수 없나?

지금 그의 태도를 보니 실장님이 만드는 무기는 그와 연관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실장님에게 연금술사의 실력을 발휘해 저것을 만들라고 시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설마, 그레이언 전하가 무슨 일을 벌이시는 것은…….

내 머릿속에는 온갖 파국적인 상상이 한꺼번에 스쳤다.

마지막에는 그레이언 전하가 오를 전하를 암살하려는 것은 아닌가에까지 닿았다.

나부터 믿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저 화살의 용도가 무엇이건, 나는 남의 비밀을 훔쳐보았고, 그 비밀의 주인은 화가 나 있었다.

그를 흘끔 올려다보니 그렇게 살벌할 수가 없었다.

이 새끼, 아마타족의 목을 벨 때 딱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겠지?

평소 그의 능글거리는 얼굴이 다 연극이었다고 생각하니 더, 더 무서웠다.

“어…….”

“물었어요.”

“조, 좀 떨어져 주시면…….”

하지만 로카르드 카이델이란 놈은 청개구리 고기를 처먹었는지 내 말과 반대로 했다.

그는 양팔을 선반으로 뻗어 나를 제 팔 안에 가두었다. 그때쯤에는 나는 아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까웠다. 너무 가까웠다!

“물었는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실장님께 마카롱 드리려고…….”

“아. 맛있지. 그거.”

몹시 음침한 음성의 대꾸.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대꾸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

나는 내 몸뚱이가 이 세상에서 차지한 표면적을 어떻게든 줄여 보려고 온몸을 꼼지락거렸다.

“론, 론드 경의 약도 만들까 싶었고요…….”

그는 몹시 음산하고 느리게 중얼거렸다.

“아. 그랬군요. 로아르 양.”

목소리 깔지 말래? 너 오늘 좀 무섭다고!

“그런데 주인 허락 없이 남의 방에 들어오는 건, 좀 무례하죠, 아마?”

나는 격하게 끄덕였다.

“네, 무례해요. 죄송해요! 아니, 공자님께는 안 죄송하고, 실장님께 사과드릴게요.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와서요. 왜냐하면 오늘 저는 아무것도 못 봤거든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나를 가둔 팔을 스르르 내렸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까?”

“네! 지금 저 좀 보세요. 눈 꼭 감고 있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꽉 감은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가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게서 성큼 물러나더니 창고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아무것도 못 보셨으니 돌아가시죠. 혹시 돌아가다가 뭘 본 것 같으면 다시 잊어버리세요. 가능하실까요? 로아르 양. 이건 몹시 중요한 일인데.”

나는 무조건 끄덕였다. 이 새끼, 마음먹으니까 살기가 장난이 아니다.

나는 방 안을 더 보지 않으려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든 채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면서 그가 쫓아오지는 않나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그런데 로이만 실장님은 왜 무기를…….’

나는 고개를 저으며 희망을 쥐어짜 냈다.

그것은 단지 연금술사이기도 한 로이만 실장님의 취미인지도 모른다.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든다면서 그 일의 실패 과정에서 온갖 희한한 걸 만들어 내곤 하니까.

그리고 카이델 공자는 단지 나를 놀려 먹으려고 무슨 소설 속 흑막처럼 군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정말로 그가 흑막 짓을 하는 걸 우연히 보고 말았다는 그런 사건은 아니어야 했다.

내 생각이 마냥 엉터리는 아닌 것이, 그가 정말로 황제 폐하 몰래 흑막 같은 짓을 하는 중이었다면 나를 살려 돌려보낼 리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저도 모르게 창문을 꼭꼭 잠갔다.

그가 밤에 이리로 들어와서 내 목을 쓱싹! 하면 어쩌냔 말이다.

이불 속에 들어가 눈을 감자 약제실 창고에서 그와 거의 가슴을 맞대다시피 서서 숨을 참았던 순간이 떠올라 지워지지 않았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쿵, 제멋대로 뛰었다.

그 와중에 그 인간도 마카롱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악연도 어쩌면 이런 악연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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