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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라일리 경매(1) (51/155)


51화. 라일리 경매(1)
2023.04.24.


“잘 생각하신 게 맞소?”

론드 경은 굵다란 두 팔로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게 물었다.

나와 론드 경은 라일리 경매장에 나와 있었다. 황녀 전하는 황궁에 있었다.

우리는 클록으로 모습을 가리고 있었는데, 경매장의 귀족들과 그들의 대리인 중에는 클록은 물론이고 가면을 쓴 자들도 있어 오히려 분위기에 어울렸다.

아무래도 큰돈이 오가니 신분을 드러내기를 꺼려서 그런 것이었다.

“곧 알게 되겠죠?”

내 무덤덤한 대답에 론드 경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나는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왜 저렇게 조바심을 내고 있는지.

“이 안에서 위험할 일은 없어요. 그런 일이 생겨도 저는 그냥 내버려 두시면 되고요.”

그러자 론드 경이 어이없다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내가 시녀님을 호위하기 싫어서 이러는 것 같소? 이런 방법으로 밀리오라 전하를 도울 수 있느냐는 이야기요.”

론드 경은 밀리오라 전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주인이 뭐가 예뻐서 저러는지.

나는 이렇게 곰 같은 남자까지 달래야 하나 싶었지만 다정하게 얘기했다.

“경. 저는 밀리오라 전하께서 좀 더 마음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

론드 경은 별말이 없었다. 일단은 나를 지켜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다과 테이블에 가서 뭘 좀 먹고 싶었지만, 거기서 황녀 전하의 티 파티 멤버 둘이 수다를 떨고 있어서 후드를 당겨 쓰고 입찰석으로 갔다.

곧 경매 시작을 알리는 연주가 시작되고, 입찰자들은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경매사가 말했다.

“오늘 본 경매에 앞서 특별 자선 경매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물건은 제국의 작은 태양 밀리오라 3황녀 전하의 반지 함으로, 황족의 체온이 밴 스무 개의 진품 보석 반지를 개별 입찰하겠습니다. 수익은 전액 기부됩니다.”

경매사는 나무망치를 탕 쳤다.

“그럼 첫 번째, 장미 형태의 가넷 반지를 일만 골드부터 시작합니다. 오백 골드씩 호가하겠습니다. 일만 골드, 61번! 일만 오백 골드 계십니까? 37번…….”

나는 입찰석 뒤편에서 경매장 경호원의 감시를 받고 선 타르간지 기자에게로 향했다.

라일리 경매는 원래 비공개였다. 하지만 내가 황족의 참여가 귀족들에게 큰 화제성을 가질 것이라고 주최를 설득하여 특별 경매까지만 취재를 허락받았다.

기자는 특별 경매가 끝나자마자 경매장을 떠난다는 조건이었다.

“기부까지 제가 직접 진행하고 알려 드릴 테니 기사를 잘 써 주셔야 해요?”

“자선과 구호는 언제나 인기 있는 주제랍니다.”

나는 기자에게 환하게 웃어 주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경매사가 소리쳤다.

“황녀 전하의 애장품 반지 함의 세 번째 상품은 최상급 에메랄드 반지입니다. 역시 일만 골드부터 오백 골드씩 호가합니다. 일만 골드, 12번…….”

저것은 내가 훔쳐 갔다던 그 반지였다. 저것 때문에 그렇게 매질을 당했는데, 그 물건이 내 눈앞에서 버젓이 경매에 오른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몇 사람이 동시에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

경매사는 빠르게 진행했다.

“37번, 일만 팔천오백 골드, 17번, 일만 이천 골드, 가넷 반지를 놓친 37번 다시 도전하십니까? 17번 일만 구천 골드 하나, 일만 구천 골드 둘, 일만 구천 골드 셋. 에메랄드 반지 17번에게 일만 구천 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다음은…….”

* * *

17번 번호판을 들고 에메랄드 반지의 대금을 치른 사람은 로카르드 카이델이었다. 그도 클록에 모습을 숨긴 채였다.

그는 입찰석으로 돌아오며 멀리 로리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황녀 반지 도난 사건이 기사화된 이후 반지를 다 처분해 버리는 것은 자칫하면 비난에 대한 화풀이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돈을 자선 목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한다면 황녀의 악화된 인상을 바꾸는 일도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 라일리 경매보다 적당한 곳은 없었다.

이런 일을 꾀하다니, 로리샤가 드디어 시녀로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카르드는 빙긋 웃음을 띤 채 혹시라도 그녀의 눈에 띄지 않도록 멀리 돌아갔다.

그가 입찰석에 앉자 역시 클록 차림으로 옆 좌석에 앉아 있던 그레이언이 짜증을 냈다.

“밀리오라의 반지는 뭐 하게?”

“이제는 제 반지죠. 예쁘잖아요.”

“나는 네 머릿속을 알 수가 없다.”

그레이언은 그의 번호판을 빼앗아 갔다.

“그건 언제 나오는 거냐, ‘붉은 눈물’은.”

“본 경매 첫 번째 물건입니다. 입찰은 제가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 돈이잖아.”

로카르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팔짱을 꼈다.

그레이언은 인기리에 진행 중인 반지 경매를 지켜보며 말했다.

“가장 비싼 걸 가장 나중 순서로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

“어차피 그 보석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어요.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고가의 거래를 지켜보고 나면 생각하게 되겠죠. ‘저것에 비하면 이 정도 금액은 별것 아니잖아?’”

그레이언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영리한 논리라고 생각하며 로카르드를 돌아보았다.

그가 소유할 것이나 그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로카르드는 언제나 수월하게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머지 준비는?”

“배와 병력은 이틀 내에 준비될 겁니다. 하지만 오늘 ‘붉은 눈물’을 놓치면 아무 소용 없어요.”

“색이 예쁜 돌멩이일 뿐인데 그게 뭐라고.”

로카르드는 빙긋 웃었다.

사람들의 인식은 재미있었다. 우연히 붉은 빛을 띠게 된 돌멩이에는 영지를 하나 살 만큼의 값어치를 매기고, 그 자체로 빛을 내는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사실로 돌멩이보다 못하게 여긴다.

그런데 그의 주군은 보석도, 빛을 내는 사람도 무시했다. 장차 제국을 소유한들 그의 갈급함을 채워 주는 것은 없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일지도 몰랐다. 주군이 그 목마름을 견디지 못해 타락하지 않도록 돌보는 것. 그리고 견제하는 것.

이런 것은 아카데미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종류의 지식이었다.

* * *

황녀 전하의 반지는 완판되었다.

원래 귀족들은 황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선망했고, 여기 모인 귀족들에게 몇만 골드 정도는 몸풀기 수준이었다.

나는 쉬는 시간을 알리는 연주가 시작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돈을 받아 올게요.”

입찰석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내 앞을 불쑥 가리고 섰다. 내 앞 햇빛이 다 가릴 정도였다.

‘론드 경을 데려왔어야 하나?’

깜짝 놀라서 올려다보니 남자가 후드를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카……!”

네가 왜 여기서 나오세요?

카이델 공자는 손끝으로 내 입술을 꾹 누르더니 말했다.

“밀리오라 전하께 이 경매를 주선한 건 당신이군요.”

“그……. 저는 그분의 시녀니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카이델 공자는 평소의 웃음기라고는 없이 말했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을 걱정하는 겁니다.”

그는 퍽 진심인 듯 말하고 있었다. 너무 진지해서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화가 났다.

“지금 저를 위협하시는 건가요? 저 같은…….”

“사생아라고 하려고요? 앞으로 저와 대화할 땐 그 말 빼고 얘기하죠.”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기분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대화를 이어 가야 했다.

“같이 경연에 참여했는데 열심히 하지 말라니, 그런 말씀은 부적절하게 들리네요.”

“당신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황녀 전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선을 잘 조절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이 그걸 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오해하지 말라고 한다고 오해하지 않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나는 발끈 말했다.

“그 선은 누가 정한 건데요?”

“로아르 양.”

“제가 지금까지 사생아로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세요?”

“…….”

“저를 짓밟아도 소용이 없다는 걸 보여 줬거든요.”

“저는 지금 짓밟히지 말라고 말하는 거예요.”

“공자님의 말씀만 들어도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무시당하고 계신지 확실히 알겠어요. 하지만 기왕에 무시당할 거면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 보고 무시당하겠어요. 그편이 밤에 잠도 잘 온다고요.”

“…….”

카이델 공자는 눈썹을 기묘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런데 어째 찡그린 표정 속에 옅은 웃음이 밴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언제나 경주마처럼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렇죠?”

나는 그의 말이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당신을 지켜보게 될 것 같군요. 퍽 흥미롭겠어요.”

그는 퍽 느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나는 얼떨결에 아무 말도 못 했는데, 그가 돌아가는 걸 보니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저래? 뭐 잘못 먹었어? 지켜보겠다니, 자기만 눈 있어, 나도 눈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달려가 따질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으로 반지 대금을 받은 다음, 입찰석으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이제 가요. 론드 경.”

론드 경은 내가 가자고 말해 놓고서 정작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오랜만에 쌍욕을 하고 싶었지만, 론드 경 앞에서 카이델 공자를 언급해서 좋을 것이 없어 그만두었다.

결국 비비적거리듯 몸을 일으키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인제부터 보육원을 서른 개쯤 돌아다녀야 해요. 우린 바빠요. 론드 경.”

음악이 그치고, 경매사가 본 경매 시작을 알렸다. 티 파티 영애들이 난리를 치던, 그 빨간 다이아몬드라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조용히 라일리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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