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경연은 기회예요, 황녀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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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경연은 기회예요, 황녀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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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경연은 기회예요, 황녀 전하
2023.04.23.
나는 응접실을 슬쩍 빠져나왔다. 방금 본 광경에서 지독한 인생의 피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전실에서 대기하던 에리아가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듯 바라보았지만, 나는 괜찮다고 웃어 주었다.
소파에 앉으니 옆의 바구니에 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모두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응접실에서 새어 나오는 하하호호 웃음소리를 들으며 오늘 자 타르간지를 찾아 펼쳤다.
“……!”
「최근 황녀궁에서 일어난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반지 도난 사건은 우리에게 또 다른 관점을 시사한다.
과연 황족에게 있어 품위 유지와 사치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황녀 전하께서는 지나친 사치를 즐기다 범죄에 연루되신 것은 아닌가?」
‘이건 무슨 개풀 뜯어 먹는…….’
기사의 논조는 기묘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것은 황녀 전하의 반지 도난 사건을 익명의 출처로 보도하면서, 마치 그녀가 너무 많은 보석을 소유하여 범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황궁 내의 사건이 신문에 실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뿐더러, 그 반지는 애초에 도난당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피해자에게 잘못을 돌리다니.
응접실에서는 영애들이 일제히 환호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 저러고 계실 때가 아닌데!’
나는 신문을 꽉 구겨 쥔 채 응접실 문을 쏘아보았다.
‘공자님, 오늘 바쁘니까 좀 그만 인기 있으시죠?’
내가 희박해지는 인내심을 꽉 붙들고 있을 때, 황후궁의 시종이 나타났다.
그는 응접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내가 다가가자 가슴의 메달을 확인했다.
“황녀 전하께 손님이 있으십니까?”
“네. 티 파티 중이세요.”
“자리를 파하고 오셔야 할 듯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즉시 들라 하십니다. 무슨 일인지는 아시겠지요?”
나는 내 손아귀에서 거의 교수형에 처해진 꾸깃한 신문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격노하셨습니다.”
“곧 모시고 가겠습니다.”
나는 그를 돌려보낸 다음 응접실로 들어갔다.
“황녀 전하, 황후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영애들은 카이델 공자와의 흥겨운 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나를 마치 조상의 원수 보듯 쏘아보았다.
“지금 황후궁으로 들라고 하십니다.”
황녀 전하의 표정이 싸늘해지고, 영애들도 저마다 울상을 했다.
그러나 카이델 공자는 우아하게 일어나 인사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의 용무를 방해할 수 없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래.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가 돌아가자 황녀 전하는 새침하게 말했다.
“너희들도 돌아가.”
“네. 황녀 전하.”
영애들은 아쉬움에 울먹이듯 대답하며 일어났다.
문이 닫히자마자, 황녀 전하는 사납게 물었다.
“왜!”
나는 구겨진 신문을 펴 황녀 전하에게 건넸다.
“이건……. 너 때문이잖아!”
반지 도난 사건은 그녀의 자작극이었다. 그런데 나 때문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입이 쩍 열렸다.
황녀 전하는 벌떡 일어나 나가며 말했다.
“이 기사를 쓴 자를 체포하라고 할 거야!”
* * *
내가 따를 수 있는 곳은 황후 폐하의 응접실 앞까지였다. 황후 폐하의 시종은 나를 두고 황녀 전하만 들여보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후 폐하는 황녀 전하처럼 고함을 지르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난번 내가 매를 맞았을 땐 황후 폐하께서 정말로 화가 폭발하셨다는 뜻이다.
“…….”
한참 후, 밀리오라 전하는 울면서 뛰쳐나왔다. 푹 젖은 뺨에 은발이 달라붙어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황녀궁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나도 말을 걸지 못하고 그녀를 뒤따랐다.
황녀궁 응접실로 돌아가자마자, 황녀 전하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반대편에 가만히 앉았다.
누군가 달래서 멈출 울음은 굳이 달래 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눈물은 옆에서 달래 줄 수 없다. 그런 눈물은 몸 밖으로 내보내야 할 뿐이다.
한참 후, 황녀 전하는 울다 지쳐서 소파 위에 바로 누웠다.
늘 시끌벅적하던 응접실이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다.
불쑥, 그녀는 진솔하게 물었다.
“너, 내가 우습지?”
“아니요.”
내가 차분하게 대답하자 밀리오라 전하는 설핏 웃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적대감도 눈물과 같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또 고이겠지만.
나는 나직이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오라비들의 앞길에 구정물을 뿌린 추악한 계집애. 고귀한 타가르 혈통에 생긴 돌연변이……. 네가 먹칠한 황실의 명예를 어떻게 되살릴 거냐고 하시는데 대답할 말이 없지 뭐야.”
“…….”
“내가 대답을 못 하니까 그러시더라.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빌어먹을.
나는 그녀를 동정할까 봐 입을 꼭 다물었다.
그녀의 상처 난 자존심에 하찮은 사생아의 동정심은 유해할 뿐이다.
“어쩌실 생각이세요?”
“생각……? 나는 아무 생각 없어. 황후 폐하께서도 그러셨는걸. 너처럼 생각 없이 사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고.”
나는 개의치 않고 나직이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훗…….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내가.”
밀리오라 전하는 누운 채로 힘없이 웃었다.
나는 짧게 말했다.
“할 수 있다면요.”
황녀 전하는 뺨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로 안 태어났으면 좋겠어.”
왜 내가 가슴이 찢기는 기분이 드는 거지.
나는 목소리가 먹먹해졌을까 봐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없고요.”
“그렇겠지.”
나는 정말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 목표는 여기서 안전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백작님의 말대로 시녀 출신이라는 경력의 날개를 얻어 멀리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울컥하는 걸 어쩌는가.
내 앞에 있는 그녀를 저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전하께는 기회가 있어요.”
“…….”
황녀 전하는 저 사생아가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가 하고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경연이요. 그건 기회예요.”
황녀 전하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너,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 알아. 하지만 감히 아무 짓도 할 생각 말아.”
내가 어디 잘난 데가 있어야 잘난 척이 되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모든 눈이 황자녀 전하들을 주시하고 있어요. 경연은 황후 폐하께 전하께서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줄 기회이기도 해요. 그런 기회가 되게 만드세요, 전하.”
그러나 황녀 전하는 어둡게 말했다.
“내 말 못 알아들어? 이 경연은 두 오라버니를 위한 거야. 내가 조금이라도 튀려고 했다간 오라버니들이 먼저 나를 제거할 거야. 네가 타가르에 대해 뭘 알아? 닥치고 가만히 있어.”
“전하도 욕심이 없으신 건 아니잖아요.”
황녀 전하는 나를 쏘아보았다.
“티 파티 영애들과 경연 과제를 고민할 땐 즐거워 보이셨다고요.”
“……그런 척한 거야. 아니면 황후 폐하가 경연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실 테니까. 그러니 내가 오해를 사게 할 언동은 하지 말란 말이야. 이 사생아야.”
그녀는 사납게 말했지만 나는 좀 웃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사생아라는 소리를 몇 번쯤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황녀 전하는 내 그런 여유를 눈치채고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전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안 해요. 저도 그편이 편하니까요.”
“…….”
“하지만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전하께서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보여 줄 수 있을 거예요. 화려한 경쟁은 두 분 황자 전하들 몫으로 돌려드리고요.”
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내가 문을 열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를 믿으시는 것으로요.”
“내가 미쳤니?”
그렇게 말하는 밀리오라 전하의 말투에는 힘이 없었다.
“제가 반지를 훔쳤다거나, 카이델 공자님과 친근한 사이라거나……. 그런 의심 대신 저를 믿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전하를 위해서 지금보다는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예요. 전하.”
나는 그녀의 녹안이 잘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 아마 지금까지 그녀에게 믿어 달라고 말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마침내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멋대로 해.”
나는 그녀에게 돌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뭐?’ 하듯 눈을 치떴다.
“그 반지 함, 제게 주세요.”
* * *
밀리오라를 내보낸 황후는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사이 오를이 들어와 앞에 앉았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떴을 때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황제의 장남, 그녀의 사랑하는 첫 번째 아들은 다정하게 말했다.
“분을 식히세요. 황후 폐하. 미모가 상하십니다.”
“황자의 말이 옳아. 저런 아이 때문에 내 심기를 어지럽히다니,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지.”
“지당하십니다.”
하녀가 차를 들여 주고 나가자 황후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기사, 네가 냈니?”
“네. 제가 냈어요.”
오를은 그렇게 말하고 활짝 웃었다.
“궁금해서요. 세 번째 사자가 사생아 딸을 보내며 한 말이 참인지, 아닌지. 그 시녀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네 말이 맞는구나. 하지만 그렇게까지 세게 할 필요는 없었어. 황실의 위신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황후 폐하.”
그러나 황후는 오를이 황녀궁을 뒤흔든 이유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를 음미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