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당신이 자백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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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당신이 자백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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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당신이 자백한다면
2023.04.22.
밀리오라는 무서워 달아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 은발을 타고난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또 상처 입어야 했다.
경연이 진행될수록 모후가 저를 얼마나 경멸할 것이며 궁인들은 뒤에서 또 얼마나 비웃을까.
그녀는 기왕 경연을 망쳐 버리고 말 거라면 저 좋은 대로 하고 싶었다. 향기로운 차와 맛있는 다과를 즐기면서 친숙한 사람들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서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 마카롱, 차, 보석과 경매.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만 신경 썼다.
사실 그녀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남의 일이라서.
그들이 그녀의 티 파티를 사랑하는 이유는 ‘며칠 전에 황궁에 다녀왔는데 말이에요.’ 하고 뻐길 수 있어서였기 때문에.
그래도 그녀에게는 티 파티 멤버들이 소중했다. 그녀가 부르면 달려오고, 작은 일에도 호들갑스럽게 칭찬해 주는 사람들은 그들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진짜 도움이 필요한 이런 날에는 애써 잊고 지냈던 진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는 매일 조금씩 실패를 쌓아 가고 있을 뿐이었다.
모후가 천한 사생아를 그녀의 시녀로 곁에 둔 건 네 수준이 그 정도라고 가슴에 딱지를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모후가 그녀를 미워하는 이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다.
천한 시녀는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내일 그녀의 친구들이 경연의 놀라운 해답을 찾아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밀리오라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느 방향을 바라보아야 할지, 고개를 돌려도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도도하게 턱을 쳐들고 웃는 것뿐이었다.
* * *
우리는 석양이 곱게 깔리는 후원에서 만났다.
늘 앉는 벤치에 있던 론드 경은 카이델 공자가 나타나자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나는 론드 경에게 우리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로 나아가 카이델 공자를 맞이했다.
그는 따뜻하게 가라앉아 가는 빛을 받으며 웃었다.
능글능글.
“로아르 양이 저를 불러 주시다니요.”
나는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빈정이 상할 대로 상했으나, 철갑 같은 정색을 한 채 그를 맞이했다.
나도 한다면 한단 말이다.
“급작스러운 만남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델 공자님.”
“아닙니다. 로아르 양.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그의 대답도 뻣뻣하고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금방 분위기를 맞추는 것도 빈정 상했다.
그러나 그가 론드 경이 보는 데서 친한 척을 하는 것보다는 나아서 꾹꾹 참았다.
나는 그의 시종 메달이 든 상자를 앞으로 내밀고 몹시 거리감 있고 정중하게 말했다.
“먼저 카이델 공자님의 친절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천만에요.”
무슨 애들 연극도 아니고.
카이델 공자의 입꼬리가 웃음을 참느라 씰룩거리는 걸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가 뵙자고 한 이유는 이것을 돌려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공자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그 호의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카이델 공자는 내 가슴에 달린 새 메달을 보더니 가볍게 묵례하고 상자를 받아 들었다.
“천만에요. 곤경에 처한 여성을 돕는 것은 귀족의 의무일 따름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렸다.
나는 그때 그의 옷자락을 붙잡을 뻔했다. 아우, 씨.
“카이델 공자님!”
그는 분명 내 부름을 들었음에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짧은 몇 초에 내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지, 순전히 내 기분 탓인지, 그는 몹시 느릿하게 몸을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 못 한 말씀이 있으십니까, 로아르 양?”
저 X끼, 일부러 저런다.
나는 이를 빠득 갈 뻔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녀 전하의 뜻을 전해야 했다.
“황녀 전하께서 카이델 공자님을 티 파티에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참석이 가능하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카이델 공자님.”
그러자 그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경연이 시작된 시점에 그것은 부적절한 행동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로아르 양. 저는 앞으로는 그레이언 전하의 시종으로서 처신해야 하니까요.”
“네. 이해해요.”
나는 그의 거절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며 어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가 내 말 한마디에 황녀궁으로 쫄래쫄래 왔다면, 황녀 전하는 그와 내 관계를 완전히 오해하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느니 무능력하다고 갈궈지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미소를 띠며 한 발 앞으로 다가오더니,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태도는 은밀한데 말투는 참으로 태연했다.
“그 편지, 당신이 자백한다면 참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헉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래서 오기 싫었던 거라고.
“죄송하게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카이델 공자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나는 달아나듯 돌아왔다. 카이델 공자가 낮게 웃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아 귀를 막고 싶었다.
* * *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털썩 앉았다.
카이델 공자와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이토록 진이 빠지다니.
“그놈의 편지 때문이야.”
그는 그 편지 이야기를 언제까지 물고 늘어질 건지.
심지어 그는 나를 추궁하는 걸 즐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끈질기긴.
하지만 결국 원인은 내게 있었다. 내가 미샤에게 심술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백작 부인과 미샤는 늘 남을 해코지해도 잘만 살던데, 나는 이 정도도 하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
나는 내 가슴에 손을 가만히 얹어 보았다. 내 시녀 메달은 거기 얌전히 달려 있었다.
내가 이 사자 굴에 뛰어 들어온 건 이걸 얻기 위해서였다. 이 작은 메달로 내 미래를 사려고.
그러니 이렇게 심란해하는 대신에 이 메달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애써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할 수 있다!”
* * *
다음 날 황녀 전하의 응접실에 갔을 땐 케릴 라이선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지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황녀 전하는 케릴의 빈자리를 보며 즐겁게 웃었다.
“케릴은 어제 밤을 새워서 늦나 봐?”
“그게…….”
맞은편 영애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케릴 양은 부친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앞으로 황궁에 못 올 것 같대요.”
“갑자기?”
“네……. 전하.”
하지만 황녀 전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 다시 경연 문제를 풀어 볼까?”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전하. 재작년 저희 아버님 생신에 제가…….”
영애들은 열심히 폐하의 탄신일 선물에 관한 제안을 했고, 황녀 전하는 묵묵히 들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티 파티 멤버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케릴이 돌연히 사라진 것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걸 보는 내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영애들은 자신들이 밤을 새우기 위해 찬물로 목욕을 했다거나 각성 효과가 있는 차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가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제안하는 선물은 소박하거나, 엉뚱하거나, 가정적이어서 경연의 답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영애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황녀 전하, 그런데 카이델 공자님께서는…….”
그러자 모든 영애들이 일제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전하를 쳐다보았다.
“네! 저희 정말 열심히 생각했다고요! 카이델 공자님과 차를 마실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전하.”
황녀 전하는 나를 획 쏘아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로리샤. 로카르드 공자는?”
그녀는 그가 거절했다고 말하면 나를 뜯어먹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보나 마나 너야말로 나의 수치라며 난리를 치시겠지.
나는 쓴 약을 삼키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카이델 공자께서는 2황자 그레이언 전하의 시종으로서…….”
그때 밖에서 알렸다.
“황녀 전하,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님이 드셨습니다.”
꺅. 꺄악.
작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울리고, 황녀 전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같이 경악했다.
이런 우라질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났냔 말이다.
응접실에 들어온 카이델 공자는 오늘따라 더 반질, 매끈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향기가 풍기는 듯싶었다.
“타가르의 작은 태양 밀리오라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가의 꽃은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급한 업무가 있어 조금 늦은 점 용서를 바랍니다. 황녀 전하.”
“아니야. 앉아. 로카르드 공자.”
그의 목소리를 들은 영애들은 아주 조그맣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흡사 이곳이 갑자기 작은 조류관이 된 듯했다.
카이델 공자는 케릴의 빈자리에 앉아 티 파티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셨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자니 방 안 조도가 살짝 올라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과 별개로, 그가 초대를 단칼에 거절하고서 오늘 불쑥 나타난 저의를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그럴듯한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편지 사건으로 내게 앙심을 품고 있을 텐데도 나를 시종 임명식의 난처한 상황에서 구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러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카데미 수석이신 전쟁 영웅께서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신박한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계신 걸까?
그동안 대화는 달아오르고 있었다.
“공자님께서 2황자 전하의 생명을 구하신 것이 사실인가요?”
“저희는 모두 제국의 작은 태양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요.”
“어머, 멋있으셔라!”
황녀 전하도 끼어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카벨 훈장을 내리실 거라던데?”
“감사하게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공자처럼 젊은 나이에 카벨 훈장을 받은 자는 없었어.”
“그저 영광일 뿐입니다. 황녀 전하.”
다른 영애가 끼어들었다.
“저는 카이델 공자님께서 황녀 전하의 시종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요. 그러면 자주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텐데요!”
“감사하게도 오늘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습니까.”
“말씀도 멋있게 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