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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실종된 시종 메달 (47/155)


47화. 실종된 시종 메달
2023.04.20.


딱딱하고 둥그런 금속.

펼쳐 보니 그것은 시종의 메달이었다.

놀라 론드 경을 보자, 그는 먼 산을 보며 모르는 척 돌아갔다.

시선을 옮겨 보니 그의 어깨 너머에서 카이델 공자가 오만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놀란 내 시선을 스치듯 피하며, 그는 우아하게 몸을 돌려 그레이언 전하에게 돌아갔다.

황제 폐하의 시종은 뒤이어 그레이언 전하와 시종을 불렀고, 두 사람은 폐하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패닉에 빠졌다. 저절로 입술이 달싹거렸다.

‘저, 저 인간이 미쳤나 봐! 지금 자기 메달을 나한테 준 거야? 자기는 메달도 없이 황제 폐하 앞에 나가려고?’

나는 카이델 공자가 딱 한 번만 돌아보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에게 메달을 던져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멋진 정복을 입은 채 그레이언 전하와 나란히 멀어지기만 했다.

“하!”

고개를 돌리니 그새 내 손에 쥐인 것을 본 황녀 전하가 나를 사납게 쏘아보고 있었다.

네가 메달이 어디서 났느냐고 말이다.

‘진짜 돌아 버리겠네!’

카이델 공자는 이미 황제 폐하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마침내 상황을 받아들이고 착잡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네 장렬한 희생은 잊지 않을게, 이 미친놈아.’

나는 황녀 전하가 보는 앞에서 메달을 내 가슴에 달았다.

‘지랄 맞은 계집애.’

처음으로 황녀 전하를 욕하면서 말이다.

황제 폐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델 공자는 어째서 메달을 패용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그레이언 전하가 카이델 공자를 흘끔 보더니 대답했다.

“정복에는 폐하께서 직접 수여하신 표지만을 달게 되어 있습니다. 폐하.”

“그렇군. 메달이 있건 없건 로카르드 카이델이 그레이언의 충성스러운 시종임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 둘은 목숨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닌가.”

카이델 공자는 절도 있게 머리를 숙였고, 황제 폐하는 그들에게 경연에서 신의 가호를 빈다는 축사를 해 주었다.

다음은 밀리오라 전하와 내 차례였다.

황녀 전하는 몸을 획 돌려 먼저 폐하 앞으로 가 버렸고, 나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얼른 따라갔다.

황제 폐하는 밀리오라 전하에게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 지긋한 시선에 저절로 눈을 내리깔고 숨을 참았다.

“경연에서 최선을 다하거라. 신의 가호를 빌겠다.”

그리고 황자녀와 나를 비롯한 시종들은 순서대로 황제 폐하 앞에 섰다. 이제 경연에 관한 공지가 있을 차례였다.

황제 폐하의 시종은 스크롤을 펼치고 크게 말했다.

“위대한 타가르 제국 황자녀 전하들의 경연 시작을 알리며 첫 번째 과제를 출제하겠습니다. ‘황제 폐하를 가장 만족시킬 탄신일 선물을 준비하라.’”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나란히 퇴장한 후, 황자 전하들은 순서에 따라 정무 홀을 떠났다.

정무 홀에 황자녀와 시종들만 남자, 밀리오라 전하는 내 가슴에 달린 메달을 쏘아보다가 화가 난 듯이 나가 버렸다.

‘저게 아주…….’

안 보이는 데서는 황제도 욕하는데 황녀 전하 정도야.

황제 폐하 앞에서 나를 망신시키면 자기는 손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부아가 나서 골이 지끈거릴 정도였다.

나는 황녀 전하를 따라잡는 론드 경의 뒷모습을 보다가, 혼자 씩씩거리며 뒤를 따랐다.

* * *

나는 방으로 돌아와 끙끙거리며 침대에 웅크렸다. 긴장이 풀리니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바로 누우니 아직 내 가슴에 달린 시종의 메달이 점점 무거워지며 내 가슴을 꾹 짓누르는 것 같았다.

“대체 뭐냐고요…….”

황녀 전하도 괘씸했지만, 카이델 공자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는가 싶어 막막했다.

론드 경 뒤에서 웃으며 눈을 돌리던 그의 얼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레이언 전하도 카이델 공자의 행동을 모르는 눈치였는데, 그가 그렇게 순식간에 변명하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느냔 말이다.

내가 곤경에 처하는 건 내 몫이었지만, 그 여파가 남에게까지 미치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나는 거칠게 몸을 일으키다가 아파서 윽 소리를 내며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메달을 떼어 살펴보다 서랍에 넣었다.

나는 야망 같은 건 없다. 밀리오라 전하도 그렇다.

그녀의 욕심이란 고작 즐거운 티 파티나 어깨를 펴고 황후 전하를 대하는 것 정도일 거다.

내 역할은 그녀가 이 경연을 무사히 치르도록 돕는 것이 다고.

그 정도라면 내 온전한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시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카이델 공자의 메달이나 양보받는 처지였다.

과연 사생아가 이런 걸 가져도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달랐다.

백작님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믿었고, 황녀 전하는 그것을 지독한 모욕으로 여겼다.

나는 누구의 생각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이게 필요하다는 사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남의 메달을 손에 쥔 처지가 되니 기분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

카이델 공자에게 이걸 돌려주기는 돌려줘야 할 텐데, 그를 찾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동시에 그가 무슨 생각이었나 의심스럽기도 했다.

내가 그레이언 전하의 건강상 비밀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입막음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뇌물은 자기보다 힘이 센 자에게 바치는 것 아닌가.

그가 내게 빚을 지운다고 해도, 내가 장래에 그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따금 그가 나를 보는 시선에서 흥미와 의심이 뒤섞인 감정이 느껴지곤 했다.

때로 의구심을 가득 담은 그 눈빛은 내 머리 위를 드높이 맴도는 독수리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첫 번째 사자의 아드님이 보기엔 다른 사자의 인정을 받은 사생아인 내가 희한한 존재라 그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행동을 설명할 만한 마땅한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로카르드 카이델…….’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단순한 일이었다. 그는 나를 궁지에서 구해 주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한다.

나라면 절대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자기에게 욕설 편지나 쓰는 여자를 위해 그런 부담을 감수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의 대담함과 용기가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복잡한 기분에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다가, 어쩌면 내가 이런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뭐, 날 위해 그랬겠어? 미친놈이 미친 짓 한 거지.’

투덜거려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픈 몸을 웅크리고 이 부조리를 곱씹어야 했다.

내 주인은 나를 절벽으로 내몰고, 적이나 다름없는 미친놈은 나를 구해 주는 이상한 상황을 말이다.

* * *

“무슨 짓이야?”

정무 홀 밖 복도에서, 그레이언은 소리 낮추어 로카르드를 추궁했다.

하지만 로카르드의 대답은 천진했다.

“정복 규정대로 한 겁니다. 그리고 전하의 임기응변 능력을 신뢰했고요.”

그레이언은 그의 해명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너……, 설마 그 사생아에게 마음 있어?”

그레이언은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휘었으나, 로카르드는 미간을 좁히고 대답했다.

“있습니다. 마음.”

“로카르드!”

“애초에 전하의 사람으로 만들었어야 할 여자예요. 전하의 곁에는 다양한 계층의 유능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네 말과 행동이 반대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레이언의 지적은 옳았다.

로카르드가 로리샤 로아르를 욕심낸다면서 그녀가 밀리오라의 시녀로 자리 잡게 돕는 행동은 모순되었다.

하지만 로카르드는 먼 산을 보며 살짝 찌푸렸다가 미소 지었다.

“길게 보려고요.”

그레이언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걷자 로카르드는 그를 따라잡으며 말했다.

“전하도 사실은 그녀가 아까우시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하고요.”

로카르드의 물음에 그레이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떼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너는 황제 폐하의 탄신일 선물이나 잘 생각해 봐.”

“이미 생각했어요.”

그레이언은 급히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고, 로카르드는 눈을 휘어 접어 웃었다.

“그런데 그게 좀 쉽지 않아서요. 전하.”

* * *

다음 날, 나는 시종의 메달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이게 경연이 시작되었으니 메달을 패용하고 다녀야 할 텐데, 이건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 메달을 달고 밀리오라 전하의 응접실로 향했다.

메달을 카이델 공자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직은 그가 아카데미에서 돌아오지 않은 시각이었다.

내가 문 앞에 서자 에리아는 내 메달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내가 들어가 예를 올렸지만, 황녀 전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정말 하나도 바뀌지 않은 거다.

대신 티 파티 멤버들이 내 메달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여자들이라도 사람들이 내 가슴을 일제히 쳐다보자 약간 민망했다.

그들은 메달에서 내 얼굴로 질시의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나를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케릴은 내 눈치를 흘끔 보며 영애들에게 말했다.

“자, 여러분. 우리는 폐하의 탄신일 선물 준비를 계속해 보아요.”

뭐라고?

시녀도 아닌 영애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케릴은 승리감에 찬 미소로 나를 흘긋 보더니 내가 들으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저희가 황녀 전하의 경연을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어요, 안 그래요?”

“그럼요,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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