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시작된 경연 (46/155)


46화. 시작된 경연
2023.04.19.


“제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기사로서 직무를 계속하게 해 주는 것이 다였어요. 그가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 자리를 받아들인 것도 기사의 위신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공자님이 약을 갖다주시면 론드 경은 모욕적으로 여기겠네요.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주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녀에게 부탁해 볼게요. 사실 반지 함을 스치기만 해도 반지 도둑이 될 정도면, 론드 경에게 약을 챙겨 줬다가는 그분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리라도 나올까…….”

카이델 공자는 갑자기 튕기듯 벌떡 일어나 말했다.

“론드 경의 약은 내일 배달될 겁니다. 그럼.”

“어……. 감사해요.”

나는 영문도 모르고 창밖으로 사라지는 카이델 공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 * *

과연 황궁 의사의 실력은 좋았다. 며칠 만에 통증과 부기가 가라앉아서 가볍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의사가 나를 치료했어도 약은 로이만 실장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시녀 생명은 하루하루 위태롭다. 실장님이랑 친해져서 이것저것 많이 배워 두면 약재상으로 돌아갔을 때 큰 도움이 될 듯했다. 그런 사람의 지척에 있는 건 큰 행운이었다.

그런데 그 성격 좋고 똑똑한 분이 어째서 카이델 공자 같은 또라이랑 친한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잡생각을 하며 쉬고 있는데 에리아가 황녀 전하의 부름을 알렸다.

‘오늘은 또 뭐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도 싶고 두근거리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런 상태로 황녀 전하의 응접실로 가니 그녀는 전과 다름없는 자태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멀쩡하네?”

“보여 드릴까요? 아직은 피멍이 가라앉질 않아서 옷깃만 스쳐도 아프지만…….”

내가 옷을 내리려 주섬주섬 몸을 움직이자 황녀 전하가 질색했다.

“너는 정말 포기할 줄을 모르는구나? 하긴 그러니 로아르 백작을 설득했겠지. 이 사생아에게 적녀의 자리를 달라고 말이야.”

참 진부한 공격이었다. 나는 받아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상하게 이제는 황녀 전하의 악의가 전처럼 살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약한 여자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우리 둘의 신분 차를 생각할 때 놀라울 정도로 쓸데없는 동정심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내 느낌이 그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녀 전하, 상황을 보니 아마 전하는 저를 떼어 놓지 못하실 것 같아요. 이만 제 존재를 인정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너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니? 명문가에서 자라 한두 개는 얻어 배웠나 보구나.”

“제가 전하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바로 그 주제넘은 사고가 글렀다는 거야. 너는 나를 욕보이기 위해 여기 있는 거야. 그런데 내가 널 받아들일 것 같아?”

나는 황녀 전하의 사나운 말투가 황후 폐하와 꼭 닮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는 꼭 나를 욕보이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구나.’

나는 괜히 맥이 빠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황녀 전하는 분한 듯이 말했다.

“그래도 명은 명이지. 네가 뭐라고 내가 황후궁의 명을 거스르는 부담까지 지겠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경연이 시작되기 전에 황자녀의 시종 임명식이 열릴 거야. 거기에 너를 데리고 가긴 하겠지만, 그걸로 뭔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렴.”

황녀 전하께서 나를 임명식에 데리고 가시겠다는데, 이 정도만 해도 어딘가.

나는 그보다 더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절도 있게 예를 갖추었다.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7. 경연의 시작

시종 임명식은 작은 비공개 행사였다. 하지만 황족이 모두 참석한다는 점에서 무게감은 웬만한 공식 행사 못지않았다.

임명식은 폐하가 계시는 중앙 황궁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황녀 전하를 따랐다.

황녀 전하는 쌩하니 앞서 걷기만 해서 말 한번 붙여 볼 수 없었다.

론드 경은 늠름한 아머 차림으로 뒤따랐는데, 체구 차이 탓에 수탉 한 마리가 병아리를 앞세우고 걷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는 오랜만에 일을 하여 기분이 좋은지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긴장한 내게 힘내라는 응원 같기도 했다.

가만히 보면 론드 경은 밀리오라 전하 지랄에 대한 면역력이 나보다 훨씬 높은 것 같았다. 아머를 입으면 그런 것도 방어가 되는가 싶었다.

황궁에 도착하자 1황자 전하의 무리가 보였다.

얼핏 병약한 예술가와 같은 인상을 주는 저 은발 미남이 1황자 오를 전하라는 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중년의 귀족이 서 있었다.

황녀 전하는 그들을 곁눈질하며 빈정대듯 말했다.

“르네 호르테 자작이야. 황궁에서 뼈가 굵은 노회한 자니까 저자 앞에서는 입도 뗄 생각 하지 말아.”

황녀 전하는 곧장 1황자 오를 전하에게 나아가 예를 올렸고, 나도 뒤를 따랐다.

오를 전하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 시선을 감지한 황녀 전하는 금방 불쾌한 기색을 비쳤다.

으으.

나는 2황자 그레이언 전하 일행이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꽉 조이는 드레스를 입었더니 온몸이 불편하기도 했고, 얼른 끝내고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그때 그레이언 전하와 카이델 공자가 나타났다. 그레이언 전하는 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에 제브론에서 만났을 때의 그는 몹시 피로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활기차고 강건해 보였다.

역시 기생충이…….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꾹 참았는데, 그때 카이델 공자가 나를 흘겨보듯 곁눈질하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날카로워 보이는 건 각자가 선 위치 때문이란 사실을 알았는데도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 건 뭔지.

그 두 사람은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색색의 표지를 달고 허리에 비스듬히 검을 찬 모습은 서 있기만 해도 멋있어 보였다.

카이델 공자만 있었다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레이언 황자 전하까지 나란히 있으니 그 둘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람들이 괜히 그 두 사람에게 열광하는 게 아니다.

“형님 전하를 뵙습니다.”

“그레이언.”

오를 전하는 그레이언 전하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는데, 기분 탓인지 내게는 그것이 마냥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형인 자신은 병약하니, 저렇게 늠름한 동생을 보는 기분이 좋을 수는 없으리라는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레이언 전하 일행이 오를 전하에게 인사하고 물러나자, 밀리오라 전하가 그레이언 전하에게 예를 갖췄다.

“드디어 마음을 정했니?”

그레이언 전하는 그녀가 나를 동반한 것을 두고 웃으며 물었고, 황녀 전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레이언 전하도 대답을 기대한 말이 아닌 듯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잠깐이지만 황족들의 분위기를 보니, 그동안 내 거취 문제가 황궁의 소란 거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부담을 감수하다니, 백작님은 정말 대담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그레이언 전하가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는 건 좀 빈정 상했다.

내 쪽에서도 그레이언 전하와 초면인 척해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기껏 흙 갈아 먹여서 키워 놨더니……. 음. 이건 아닌가?

조금 후 황제 폐하가 정무 홀로 드시고, 우리는 순서대로 호출되었다.

오를 황자 전하와 르네 자작, 그레이언 황자 전하와 카이델 공자, 밀리오라 황녀 전하와 나. 호위 기사들은 뒤편에서 기다렸다.

나는 저 멀리 실물로 선 황제 폐하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제국의 지존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황제 폐하는 풍채가 좋은 중년이었다. 배가 살짝 나온 건 눈에 띌 수밖에 없었지만 짧은 은발에 맑은 녹안은 몹시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그사이 황후 폐하도 들어와 황제 폐하 곁에 섰다.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보석을 브로치를 단 노부인이 홀 구석에 서서 우리를 지켜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황궁에 저렇게 나이 든 시녀도 있었나?’

그때 황제 폐하의 시종이 나아와 말했다.

“황자녀 전하께서는 시종의 메달을 준비하십시오.”

황제 폐하 앞으로 나아간 오를 전하는 르네 자작의 가슴에 메달을 달아 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황녀 전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눈 마주칠 새도 없이 고개를 획 돌리는 게 아닌가.

‘헉!’

내 얼굴은 흙빛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서 직감할 수 있었다.

황녀 전하는 메달을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메달을 만들기나 한 건지!

‘……거기에 너를 데리고 가긴 하겠지만 그걸로 뭔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

시종 임명식에 데려가기만 하겠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의 뜻이었을 줄이야.

황제 폐하 앞에서 어쩌자는 것인지, 머리가 어찔한 가운데 의심이 떠올랐다.

설마 내가 메달을 미리 받고서 잊어버렸다고 황제 폐하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정말 이렇게 막 나갈 거예요?’

황녀 전하는 내 원망의 시선을 쓰윽 피해 버렸다.

그때 론드 경이 내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오더니 내 손에 무엇을 쥐여 주었다.

1681906757558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