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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주인을 잘못 고른 건 알고 있잖아요 (45/155)


45화. 주인을 잘못 고른 건 알고 있잖아요
2023.04.18.


“시녀님, 주무세요? 식사를 좀 하고 주무세요.”

에리아는 나를 조심스럽게 깨워 일으켜 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아팠지만 다행히 진통제가 그럭저럭 듣고 있었다.

에리아는 내게 수프를 떠먹여 주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다녀가셨다면서요?”

“응. 황후 폐하께서 다녀가셨어.”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나는 에리아를 향해 뚱한 시선을 돌렸다.

“에리아. 내가 안 훔쳤어.”

“……네.”

어쩐지 긍정하는 것 같은 대답이라 더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눈을 피했다.

에리아는 내가 누명을 쓴 걸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아는 티를 낼 수는 없는 거다.

황궁 하녀로서,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그림자처럼 살아야 한 몸 온전히 보전할 테니까.

그래, 너도 힘들겠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아기 새처럼 입을 쩍쩍 벌리고 수프를 받아먹었다.

폭풍의 한가운데 있는 나에게 이 정도 온정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도 고마웠다.

“황녀 전하는?”

“통곡하고 계세요. 며칠 방에서 안 나오실 테니까 안심하고 푹 쉬세요, 시녀님.”

나 같아도 그럴 것이다. 그런 소릴 들었으면, 그것도 미워 죽을 지경인 애 앞에서 들었으면, 울고 또 울면서 자신을 미워하겠지.

삶이란 참으로 이상했다. 하찮은 사생아에게는 세상 최고의 엄마가 있고, 제국 최고의 영애에게는 최악의 엄마가 있다니.

그 최악의 엄마가 딸에 대한 악의로 선물한 시녀가 나라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말이다.

에리아는 식사 쟁반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할까 봐요.”

“아니야, 아니야. 나는 혼자 자는 편이라서.”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고마워, 에리아.”

내가 에리아를 돌려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오랜만에 좀 마음껏 욕을 해 보고 싶어서.

나는 밀리오라 황녀 전하에 대한 내 이중적인 감정이 짜증 났다. 악당이 끝까지 악당으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 게 그렇게 큰 소원이냔 말이다.

나는 에리아가 나가자마자 드러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보며 분하게 구시렁거렸다.

“이건 뭐, 되는 건 없고 될 만하면 죄다 엉망이 될 뿐이고, 아우 내가 진짜 확 다 엎어 버릴 수도 없고…….”

“뭘 엎어요?”

“제 주제에 엎긴 뭘 엎어요. 속상해서 하는 소리지. ……크헉!”

내 혼잣말에 남자의 미성이 대꾸했다?

놀라 획 돌아보니 카이델 공자가 자기가 넘어 들어온 창을 닫는 중이었다. 그 몸짓이 어찌나 태연한지, 누가 보면 자기 방인 줄 알겠다.

“가까이 있으니까 참 편하네요. 안 그래요?”

“지, 지금…….”

편해? 편해……? 네가 떠올리는 단어가 그거라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겠네요. 공자님.

하지만 나는 그에게 열을 올릴 기운조차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진통제가 더 필요해졌을 뿐.

“끄응. 오늘은 좀 미루시죠. 보다시피 제 상태가 좀 그래요.”

카이델 공자는 침대로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고는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내 꼴이 그 정도라는 건 알지만, 여자 방에 불쑥불쑥 숨어들어 오는 남자에게 저런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좀 그래요’? 하아.”

그는 화가 난 듯이 얼굴이 굳은 채로 침대로 상체를 숙였다.

나는 저절로 숨을 헉 참았고, 그는 내 발치에 있던 이불을 확 끌어당겨 내 턱밑까지 덮었다.

‘뭐, 뭐, 지금 시체 염하는 거야?’

나는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입을 벌린 채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심각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괜찮냐고는 못 묻겠군요. 로아르 양.”

“황궁 치안이 이 모양이니까 범죄에 다들 그렇게 예민한 모양이에요.”

내가 그가 창을 넘어온 걸 꼬집자, 카이델 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의 반지를 훔쳤다면서요?”

“그렇다더라고요.”

“크흠.”

우리의 대화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내가 도둑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용건 끝나지 않았나요?”

“병문안이에요. 보면 모르겠어요?”

“……공자님이라면, 보면 아시겠어요?”

내가 다시 그가 들어온 창을 눈짓하자, 그도 나를 따라 시선을 던지더니 눈을 휘어 접어 웃었다.

이미 해도 졌는데 뭐 저따위 햇살 같은 미소를…….

내가 얼굴을 확 찌푸리자 그는 웃음을 지웠다.

“출궁하면 몸을 추슬러요. 당신이 할 일은 내가 구해 줄 테니까.”

“…….”

이건 무슨 개가 풀 뜯어 먹다가 풀피리 연주하는 소리지?

댁은 아카데미 수석 생도라며? 이미 가정 교사는 필요 없잖아. 이렇게 어중간한 경력의 날 누가 고용한다고.

새삼 짜증이 치솟았다. 정말 되는 게 없다.

원치도 않았던 시녀 자리에 헛꿈 꾸다가 도둑 누명이나 쓰고, 또라이 깜장 머리는 시도 때도 없이 내 방 창문을 넘나들고.

빵 반죽처럼 짓이겨진 내 몸뚱이는 아예 언급도 말자.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 싶었지만 아파서 눈만 질끈 감았다.

“저기요, 공자님.”

“고집은 그만 부리고. 주인을 잘못 고른 건 알고 있잖아요.”

“…….”

나는 그가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온전한 집중력을 발휘해 그를 바라보았다.

‘주인을 잘못 고르다.’

맞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내 침묵에 그는 다시 부연했다. 내가 힘들어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세 번째 사자의 딸에게 도둑 누명이라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겁니다. 당신은 이런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로리샤 로아르 양.”

여자 방문 창을 넘어온 남자치고는 그의 목소리는 티끌 하나 없이 진지했다. 심지어 엄숙하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나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거예요. 카이델 공자님.”

“사정?”

“세상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기분 아세요?”

나는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여기며 눈을 뜨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어떤 감정은 사람을 짓이겨요. 상처를 내고, 내고 또 내다보면 겉에서 보이는 건 흉터뿐이죠. 흉측한, 흉터.”

“지금……, 황녀 전하를 편드는 겁니까?”

“…….”

내가 밀리오라 전하를 편드는 중인가?

나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꼭지가 돌아 버릴 만큼 아팠고 황녀 전하가 미웠다. 독한 년, 더러운 년 소리는 흘려들을 수 있어도 도둑년 소리는 못내 억울했다.

그런데 말이 그렇게 나왔다.

오히려 카이델 공자가 열기를 억누르고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당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앞으로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이 멈출 때예요.”

“그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요.”

나는 카이델 공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우리가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

“그 얘기 하러 오신 거예요? 황궁에서 나가라고요?”

“당신이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무슨 취급을 받고 싶은지는 제가 결정할 테니 걱정 마세요, 공자님.”

“당신은……!”

카이델 공자는 미간을 확 일그러트렸다. 짜증이 치솟아 어쩔 줄 모르는 그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 인간도 이 인간이지만, 나도 참 제정신은 아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음 써 주시는 건 좋은데, 이건 제 몫의 기생충이에요. 공자님. 이미 황후 폐하께서 개입하셔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당신, 못 당하겠군요.”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웃음은 어쩐지 다른 표정보다 빛깔이 짙었다.

아마 내 고집에 질려서 그러겠지.

백작님도 나를 설득하려다가 내가 고집을 부리면 저것과 비슷한 얼굴로 나를 한참 바라보곤 했다.

“기왕 오셨으니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세요. 로이만 실장님께서 약을 만들어 놓으셨을 텐데 그것 좀 론드 경에게 전해 주세요.”

그 말에 카이델 공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로이만 실장님과 친했고 제3황궁은 지척에 있었다. 그런데 그 부탁이 저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 싶었다. 사람 민망하게.

“론드 경의 약이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저는 당분간은 못 나갈 것 같아서…….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론드 경을 위해서 하는 부탁이에요.”

“알아요. 무슨 말인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난번 후원에서 마주쳤을 때 론드 경은 그를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도 그를 불편해하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유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거다 싶었다.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의 약점이라도 하나 잡아 놓자.

“왜요?”

“…….”

“이유를 말해 주세요. 문병 선물 대신요.”

그는 그제야 자신이 빈손으로 왔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는 것 같았다. 벽을 타고 올라오면서 뭘 들고 올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병문안이라고 먼저 말한 건 자기였으니까.

나는 이때라고 그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빤히 응시했고, 그는 인상을 쓰며 잠시 공중을 바라보았다.

“론드 경은 아마타전에서 제 휘하의 부대에 있었습니다. 그는 제 후방을 지키다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어머…….”

예상외의 놀라운 이야기였다. 카이델 공자는 무거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는 툰바르에서 돌아가는 건 자신의 유골뿐일 것이라고 강하게 거부했지만, 저는 그를 후방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는 남부의 군벌 아모에가의 아들입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귀향한다는 건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가문에서도 그의 처신을 불명예로 여기고 있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론드 경은 고향으로 안 돌아가는 게 아니라 못 돌아가는 것이었다.

멀쩡한 아들이 다쳤는데 그냥 죽는 편이 나았다는 건지, 빌어먹을 귀족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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