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너를 낳은 걸 후회해
(44/155)
44화. 너를 낳은 걸 후회해
(44/155)
44화. 너를 낳은 걸 후회해
2023.04.17.
“알아.”
그녀의 대답은 따사로웠다. 그 온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승리감에서 나올 뿐,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와는 관계없었다.
인정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하는.
나는 사라진 에메랄드 반지가 부디 내 손가락 사이즈에 맞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성의라도 갖춘 누명이면 조금 덜 억울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내가 옷을 풀어 내리기 시작하자 황녀 전하가 도끼 눈을 떴다.
“너 지금 무슨 짓이야?”
하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등을 열어 그녀에게 보였다.
“헉……!”
그리고 한 팔의 붕대도 풀어 보였다. 내 등은 내가 볼 수 없었지만, 피멍이 검게 변한 내 팔은 내가 봐도 끔찍한 꼴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프고 바람만 스쳐도 아팠다.
“너 미쳤니?”
내 상처를 보니 새삼 분이 차올랐지만, 나는 꾹꾹 억누르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 보여 드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더러운 꼴을 어디서……. 너 제정신이야?”
“제 팔보다 긴 회초리로 두 시간씩 얻어맞으면 누구라도 이렇게 돼요. 더럽다면 이런 일의 배경에 깔린 악의가 더러운 거겠죠.”
“네가 감히……!”
나는 아파서 이를 악문 채 옷을 추스르고 붕대를 대충 감았다. 붕대가 닿으니 아파서 끅 소리가 나려 했지만, 거기 묻은 약 기운이 다시 느껴지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저는 내일도 매를 맞으러 갈 거예요. 저는 자백할 생각이 없으니 시녀장님은 어깨 상태를 생각해서 보양제라도 좀 드셔야 할 거예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전하.”
내가 돌아서자 그녀가 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였다.
“권력이 그렇게 좋아? 사생아라 그런가?”
“…….”
참신한 질문이라 나는 저도 모르게 돌아섰다.
나는 느리게 깨달았다.
황녀 전하는 나를 권력에 목숨 건 계집애로 보는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걸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법이니까.
그녀는 내가 바라는 것이 단지 혼자서도 적당히 풍족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 정도라는 사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생아는 권력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전하. 사생아가 부릴 수 있는 권력이란 게 세상에 있던가요?”
“……!”
황녀 전하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입술을 앙다물었다. 거친 욕을 하고 싶은데 황족의 체면상 못 하는 것 같았다.
그걸 보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체면 때문에 욕은 못 하는데 사람 목숨은 서슴없이 날리는구나.
“제가 입궁한 건 제 의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거의 끝나가는 것 같네요. 저도 사람이거든요.”
나는 정중하게 예를 취한 다음 물러났다.
* * *
다음 날, 에리아는 일찌감치 나를 찾아와 붕대를 갈아 주고 식사까지 먹여 주었다.
“고마워, 에리아.”
“아…….”
내 인사를 들은 에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알아. 또 매질하러 끌고 가려고 먹이고 입혀 준 것. 그건 그거고, 에리아가 날 걱정해 준 건 그것대로 고마운 거고.”
“시녀님……! 저는 정말 속상해요.”
아아, 에리아. 그런 얼굴 하면 내가 너까지 달래 줘야 하잖아. 나도 지금 힘들단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준비를 마쳤다. 그러자 어제 그 하인들이 찾아와 나를 시녀장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그녀가 회초리를 들고 서 있는 포즈까지 똑같아서, 나는 마치 어제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씨X.
“밤에 반성의 시간을 가졌기를 바라요. 로아르 양.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세요.”
나는 눈을 꼭 감고 생각해 보았다. 여기저기서 치이면서 만날 이런 꼴이나 당하는 건 나에게도 죄가 있지 않나 싶어서 말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게 죄라면 죄인데, 그렇게 말하면 우리 엄마가 너무 속상할 것 같아서 그냥 이만 악물었다.
시녀장이 독하기가 뭐 같다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나는 눈을 감고 딴생각에 집중했다.
오늘은 어딜 때릴까. 허벅지? 엉덩이?
하지만 시녀장은 독했다.
“팔을 내밀어요.”
제기랄, 때린 데 또 때리다니, 사람도 아니다.
“아악!”
첫 번째 회초리가 날아왔을 때, 나는 예상보다 너무 아파서 참으려던 것도 잊고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시녀장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문이 벌컥 얼렸다.
시녀장이 새파랗게 질리며 머리를 숙이기에 뭔가 했다. 나도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천히 돌아보니 처음 보는 중년의 귀부인이 서 있었다.
황후 폐하.
하지만 나는 정신이 없어서 바닥에 주저앉은 그대로 그녀를 올려보기만 했다.
황후 폐하는 흥분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녀장, 지금 제정신인가?”
“저는, 황녀 전하의 명령으로 도둑질의 자백을 받는 중이었습니다. 황후 폐하.”
“도둑질?”
나는 힘껏 소리쳤다고 생각했지만 통증 탓에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온몸이 끓는 물에 던져진 개구리처럼 아픈 상태였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게 이런 누명을 씌우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시녀장이 발끈하여 쏘아붙였다.
“입 다물지 못해요? 어느 안전이라고!”
“그대야말로 자중하는 게 좋을 거야, 아멜라 시녀장.”
나는 일부러 팔의 붕대를 흘러내리게 하고는 흐느꼈다.
“자백할 것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기 전에 자백했을 거예요. 흐흐흑.”
황후 폐하는 썩은 소시지 같은 내 팔을 보고는 눈이 커졌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가 방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온 건 그때였다.
황후 폐하는 내 팔에서 황녀 전하에게로 시선을 획 돌려 소리쳤다.
“세 번째 사자의 딸을 이 꼴로 만들다니! 아무리 머리가 텅 빈 너라지만, 이런 짓을 해?”
황후 폐하의 노성에 황녀 전하는 새하얗게 질렸다.
“화, 황후 폐하, 저는…….”
“시녀장도 그래! 황녀가 얼빠진 소리를 한다고 그대로 따라?”
나는 시녀장이 그런 불쌍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저는 명령에 따라……. 저 또한 세 번째 사자의 따님을 체벌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황후 폐하. 제 어깨를 얼마나 혹사했는지…….”
“듣기 싫어!”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문득 내가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사건도 아닌데 황후 폐하가 나타나 나를 구해 주고 시녀장과 황녀 전하를 나무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곧 황녀 전하가 울먹였다. 그건 말이라기보다 웅얼거림이었다.
“황후 폐하, 저는, 이 애가 도둑질을…….”
“닥쳐, 밀리오라! 오를이 네게 베푼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고도 할 말이 있어? 반지라니, 세상에!”
“흐흐흑!”
황녀 전하는 흐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흐느낌은 바로 울음이 되었다.
황후 폐하는 그런 그녀를 분한 듯이 쏘아보며 말했다.
“너는 꼭 나를 욕보이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구나. 너를 낳은 날이 후회스러워!”
나는 황후 폐하의 폭언에 놀라 굳을 정도였다. 친딸에게 저런 말을 하는 엄마가 있다니…….
바로 시녀장이 끼어들었다.
“의사를 불러 진료를 부탁하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이만 이 누추한 곳을 비우시지요.”
“나를 이 누추한 곳으로 오게 한 것이 누군데 그래! 밀리오라에게 시녀를 들인 건 오를의 뜻이야. 그것은 또한 나의 뜻이고. 시녀장이 늙어 판단력이 흐려졌나?”
“부디 제 실책을 용서하십시오, 황후 폐하. 로리샤 시녀의 회복을 위해 이 노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녀 전하는 서럽게 울면서 나갔다. 우느라 제대로 걷지도 못해 벽을 짚으면서 말이다.
황후 폐하는 그것을 지켜보다 일갈했다.
“어쩌면 예쁘게 보아 줄 데가 단 한 군데도 없을까!”
“황후궁으로 모시겠습니다. 황후 폐하.”
“됐어. 자네도 당분간 내게 얼굴 보이지 말아.”
황후 폐하는 그렇게 나가 버렸다. 시녀장은 비틀거리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나는 정적 속에서 얼얼한 정신을 수습하려 애썼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시녀장이 황녀를 간단하게 배신하는 꼴은 놀랍지도 않았다.
눈꼴신 사생아를 매질할 때는 그렇게 즐겨 놓고, 위기에 몰리니까 바로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니.
하지만 황후 폐하의 태도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황후 폐하는 친딸을 저렇게 미워하시는 거야?’
나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내 인생의 태반을 증오와 저주 속에서 보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살아 있는 동안 나를 가장 사랑해 준 사람이었다.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주려고 노력했다.
나를 사생아로 낳아서 미안해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예뻐해서.
하다못해 백작 부인도 미샤 같은 계집애가 세상 최고인 줄 알고 절절맨다.
그런데 내가 황후 폐하에게서 느낀 혐오감은 나에 대한 백작 부인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았다.
대체 어떡하면 자기 친딸을 저렇게 소름 끼치게 싫어할 수가 있는지…….
허탈감이 밀려왔다.
내게 도둑 누명을 씌워 나를 기절할 때까지 매질한 황녀 전하를 미워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너를 낳은 날을 후회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죽어 버렸을 거다!
“이건 진짜…….”
황녀 전하는 정말 골치 아픈 인간이었다. 미워하게 만들든지 동정하게 만들든지, 일관성이 좀 있었으면.
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하인들이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지금까지 나를 끌고 다니다시피 하던 자들이 이제 나를 모셔 가는 듯한 태도였다.
“의사는 방으로 오라고 해 주세요.”
나는 하인들에게 몸을 맡겨 내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