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저는 반지를 훔치지 않았어요 (43/155)


43화. 저는 반지를 훔치지 않았어요
2023.04.16.


“전…….”

내가 전하를 부르기도 전에 반지 함은 내게 날아왔다. 나는 그걸 공중에서 잡아챘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황녀 전하가 헛숨을 뱉었다.

“하!”

‘이런 씨…….’

나는 함에서 튀어나와 카펫에 떨어진 반지 두어 개를 다시 집어넣은 다음, 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흘끔 눈치를 보니 황녀 전하는 기가 막혀 숨도 멈춘 얼굴이었다.

‘아이 씨, 그냥 맞을걸! 내가 어디 찢어졌으면 전하가 조금 미안해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녀를 다시 찬찬히 보고서, 나는 반지 함을 붙잡기를 잘했다고 결론 내렸다.

밀리오라 전하는 내 이마가 찢어지거나 눈알이 터졌어도 눈도 깜짝 안 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르르 떨며 말했다.

“감히……. 너란 계집애는 나를 능멸하기를 멈추지 않지!”

“……!”

억울한 마음에 반박하려다가, 내가 첫날부터 황녀 전하를 도발한 것이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계속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절하게 말했다.

“전하, 계속 저를 내치느라 시간을 쓰시는 것보다 저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해 봐 주세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제가 이래 보여도 닥치면 다 하는 성격이거든요.”

카이델 공자는 나더러 칭찬하듯이 그랬는데, 황족에게도 먹히려나.

“닥쳐. 닥치고 꺼져.”

“전하, 부디…….”

“꺼지라잖아!”

밀리오라 전하의 손이 다시 반지 함으로 향했다. 저걸 또 받아 내면 황녀 전하는 내가 자기를 갖고 논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물러나기로 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하. 그 전에라도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응접실에서 도망치듯 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자, 에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엄지를 세우고 지친 듯 웃었고, 에리아는 웃음을 꾹 참았다.

* * *

나는 오랜만에 후원으로 향했다.

방금 대화가 생산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황녀 전하가 나와 말을 섞기 시작한 것은 발전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나는 론드 경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드디어 황녀 전하와 대화했어요.”

“……그렇소?”

나는 론드 경이 나를 불쌍하게 보는 시선에 웃고 말았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걱정 마세요.”

그는 차를 후 불어 마시더니 말했다.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니 에리아가 황궁 하인들과 함께 이리 오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시녀님, 저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러자 하인이 그녀를 밀치고 앞으로 나와 말했다.

“시녀장님이 기다리십니다.”

* * *

하인들에게 이끌려 시녀장의 방으로 향하며,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냥 오라고 하면 되지, 하인들은 왜 붙여 보낸단 말인가.

내 불길한 예감은 맞았다. 시녀장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그녀는 자기 팔보다 기다란 회초리를 들고 서 있었다.

나를 데려간 하인들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문 앞을 막아섰다.

‘이런, 씨X.’

시녀장은 나를 향해 명령했다.

“꿇어요.”

“…….”

“꿇으라고 했어요.”

“왜죠?”

내가 복종하는 대신 반문하자, 시녀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짓에 하인들이 달려와 내 어깨를 눌러 꿇어 앉혔다.

나도 언성이 커졌다.

“왜 이러는지 이유는 말해 줘야죠!”

“이유를 몰라서 그래요, 로아르 양?”

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빈정거리고 있었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경멸이 가득했다.

“몰라요!”

“팔을 내밀어요.”

“설명하라니까요!”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요, 로리샤 로아르 양.”

그래도 내가 버티자 시녀장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하인들은 내 팔을 강제로 앞으로 폈다. 그리고 매운 회초리가 날아왔다.

“악!”

내가 비명을 크게 지른 건 반쯤은 놀라서였지만, 실제로도 잠깐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아팠다.

“이제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회초리가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비명을 참으려니 이가 부드득 갈렸다.

“밀리오라 전하의 지시인가요?”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세요.”

시녀장은 그때마다 회초리를 내리쳤다. 내 팔에는 이미 붉은 피멍이 줄지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놔! 놓으라고! 내가 맞을 테니까!”

나는 몸부림을 쳐 하인들을 떼어 내고 스스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녀장은 나를 가늘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소리쳤다.

“잘못을 고백하라고요? 저는 모르겠으니까 계속 치세요. 황녀 전하의 시녀를 매질한다면 정당한 이유와 증거를 갖고 있으시겠죠?”

회초리를 높이 들어 올렸던 시녀장은 나를 벌레 보듯 노려보며 말했다.

“하! 어디까지 뻔뻔할 셈인지.”

“때리면 맞아 드리죠. 황녀 전하의 시녀로서 시녀장님에게 처벌을 받는 거라면 기꺼이 당하겠어요. 하지만 그 고백이라는 건 듣지 못할 거예요. 전 잘못한 게 없으니까!”

“대체…….”

이건 전쟁이었다. 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고백이 무엇인지 끝까지 묻지 않았고, 그녀는 자기의 아픈 어깨를 붙잡아 가며 매질을 계속했다.

내 팔이 피멍으로 뒤덮여 더 때릴 데가 없자, 시녀장은 나를 돌려세워 등에 매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이 힘겨워 헐떡이며 말했다.

“로아르 양. 이렇게 버티는 건 황녀 전하를 모욕하는 거예요.”

“…….”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단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열 몇 대까지는 세었지만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인이 시녀장을 말려서야 그녀는 씩씩대며 물러났다.

“내일 다시 시작하죠. 로아르 양.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양심에 따라 생각해 보도록 해요.”

나는 하인들에게 부축되어 내 침소로 질질 끌려갔고, 에리아가 약을 들고 내 방으로 왔다.

나는 아파 꿈틀대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원래 이 정도 맞아서는 의사를 안 불러 주는 거야? 아니면 나라서 안 불러 주는 거야?”

“가만 계세요. 기운을 아끼세요, 시녀님.”

그러고 보면 에리아도 특이한 애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를 시녀님이라고 불러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에리아, 나 대체 왜 맞은 거야? 넌 이유를 알아?”

에리아는 움찔 놀라며 눈을 피했다.

“에리아, 제발. 나 내일 또 맞을 텐데 이유나 알고 맞자.”

“헉. 또 때리신대요?”

“내 말이.”

에리아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시녀님이 황녀 전하의 반지를 훔치셨다고…….”

“……응?”

“시녀님이 황녀 전하의 반지 함을 만진 이후에 에메랄드 반지가 사라졌다고요.”

“이런 썅. 그런 거였어?”

“……!”

내가 무심결에 욕을 하자, 에리아는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놀라지 말라고 손을 젓고 싶었지만, 한 팔은 에리아가 붕대를 감는 중이었고 나머지 팔은 그냥 너무 아팠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내가 도둑년이래?”

“네. 그래서 시녀장님이…….”

“난 또 뭐 엄청난 게 있는 줄 알았지. 아니까 마음이 좀 놓인다. 알려 줘서 고마워, 에리아.”

“…….”

에리아는 내 대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확실한 건, 기분은 시궁창이었다.

밀리오라 전하가 내게 반지 함을 집어 던진 건 처음부터 의도적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튕겨 나간 반지를 찾지 못하자 내게 누명을 씌우기로 마음먹은 걸까?

나는 후자라고 믿고 싶었지만 보통 이럴 때 답은 전자다. 그리고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없을 때 마음에 상처를 입는 법이다.

나는 에리아가 돌아간 후 새우처럼 웅크려 누워 생각에 잠겼다. 매질 당한 등도 부어올라서 똑바로 누우면 견디기 힘들게 아팠기 때문이다.

지금 황녀 전하의 응접실로 숨어들어 반지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반지를 찾더라도 내가 그걸 들고 나타나면 도둑질을 들키니까 연극한다고 몰아갈 것이 뻔했다.

아마 황녀 전하는 내가 시녀 자리를 포기하고 출궁하는 대신 절도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거래를 걸어오겠지.

내가 버티면 맨살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매질 당하다가 감옥에 가게 될 거고.

올무에 걸린 기분이었다.

미샤도 나를 함정에 밀어 넣은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지금은 백작 부인의 구박이 아니라 감옥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울적함 속에서 생각했다.

백작님이 체면을 걸고 궁에 보낸 사생아가 황족의 물건에 손을 대 감옥에 갔다는 결말보다는, 내가 먼저 포기하는 쪽이 눈곱만큼 낫기는 했다.

겨우 눈곱만큼.

어쨌든 내 가정 교사의 꿈은 다시 한번 끝장난 거다.

“끄으으…….”

힘겹게 몸을 일으키니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어차피 상황은 엉망이었고, 기왕 도둑년이 된 바에 또라이 같은 도둑년이 못 될 것도 없었다.

* * *

“황녀 전하, 로리샤입니다.”

황녀 전하의 침실 앞에서, 나는 긴장 속에 대답을 기다렸다.

“들여라.”

방으로 들어간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금도금이 된 침대에 드리워진 거미줄 같은 커튼, 외국산이 틀림없는 무늬가 직조된 침구, 본 적도 없는 문양의 도자기들…….

이곳은 사치스러운 황족의 침실을 상상할 때 떠올리는 모습 그대로의 방이었다.

황녀 전하는 반짝거리는 레이스 장식이 덧대진 얇은 가운을 걸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실린 나른한 만족감을 보니 울컥 반감이 일어났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똑똑한 미샤와 백작 부인을 섞어 놓은 것 같았다.

“어쩐 일이야?”

황녀 전하의 부드러운 말투는 그녀가 내 항복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인생이 원래 좀 이따위였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반지를 훔치지 않았어요, 황녀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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